# 303
마법사는 고개까지 숙이곤 물러났다.
현수가 8써클에 이른 마법사라 생각한 때문이다.
이번 대결에 나선 마법사 레온은 7써클 유저이다. 다시 말해 드래고니안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마법사이다.
7써클 유저는 8써클 마법사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 검법에는 변식과 변칙이 있을 수 있지만 마법은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물러난 것이다.
그가 물러간 후 잠시 관중석이 술렁였다. 현수가 8써클 마법사라라는 말이 전해진 때문이다.
잠시 후, 누군가의 음성이 있었다.
“나머지 마법사 전부 대결을 포기했네. 이제 자네는 라수스 협곡을 지나쳐도 좋네.”
“……!”
드래고니안 전부를 상대로 현수가 승리를 얻는 순간이다.
“고맙습니다.”
현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떼거지로 덤벼들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스물여덟 번째 대련자가 입을 연다.
“자네에게 언제든지 라수스 협곡을 지나갈 권리를 주겠네. 일행을 데리고 와도 되네. 대신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대련을 해주게.”
“기꺼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통행을 허가하여 주심을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현수는 드래고니안으로부터 길 안내까지 받았다. 라수스 협곡을 가장 빨리 지나칠 수 있는 지름길을 알게 된 것이다.
이 길은 드래고니안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몬스터의 습격은 거의 없었다. 가끔 정신 나간 오크나 오우거가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가 작살나는 상황만 있었을 뿐이다.
현수는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마법과 검법을 마음껏 사용했다.
마나를 사용하면 유사시를 대비하여 전능의 팔찌와 체내의 마나량이 늘 최상이 되도록 유지시켰다.
고급 텐트와 야영 장비는 고생스런 여행길이 되지 않도록 해주었다. 아공간이 있기에 매번 설치와 해체를 하지 않아 좋았다.
식사도 착실하게 챙겨 먹었다.
신선한 식재료가 풍부하니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마트 도서 코너에 진열되어 있던 요리책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번거롭지만 이렇게 한 이유는 하루 이틀에 끝날 여행이 아니기에 건강을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이번 기회에 조리 실력을 갈고닦기 위함이기도 하다.
처음엔 실패도 많이 했다. 기껏 요리를 했는데 형편없는 맛이 나는 경우엔 아낌없이 버렸다.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대화할 상대가 없어 외로움을 느꼈다.
그때마다 음악을 듣거나 지구에서, 또는 아르센 대륙에서 할 일들을 기록했다.
그러고 보니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
반둔두 지역과 비날리아 지역의 개간과 벌목, 중장비의 운반, 투입 인원 확보 등 그야말로 일이 산적해 있다.
세심히 기록해 두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윤 소령에게 부탁한 항공·유도 무기체계팀장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찌할 것인지도 기록했다.
아무튼 별 문제가 없어 기분은 좋았다. 길은 없지만 평탄한 곳에 당도하면 MTB를 타기도 했다.
그렇게 여행하던 어느 날이다.
현수는 지긋지긋한 숲 속을 벗어나게 되었다.
지난 사흘간 헤맨 곳은 너무나 울창하여 방향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온통 나뭇잎뿐이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밀림을 헤맨 것이다.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지나쳤던 곳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 일쑤였다.
바닥은 습지라 신발이 푹 젖은 상태이다.
“휴우! 드디어 끝인가? 웬 놈의 나무가 이렇게 많아? 어쨌든 건강에 좋은 피톤치드는 넘치게 많이 받았네.”
지나쳐 온 숲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현수는 암석 지대를 지나쳤다.
양쪽엔 야트막한 야산들이 있고, 그곳은 나무가 적당히 있다.
“발도 씻고 몸도 씻어야겠네.”
신고 있던 등산화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어 발이 무거울 지경이다. 입고 있는 의복은 땀에 절어 있다.
두리번거리던 중 계류가 있을 법한 곳을 발견한 현수는 반가운 마음에 그곳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시냇물이 흐른다.
물도 맑고 수량도 풍부하다.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 포천에 소재한 백운계곡 정도 된다.
물론 요즘처럼 개발되고 오염되기 전의 계곡을 뜻한다. 물속 조약돌까지 환히 보이는 걸 보면 1급수 내지는 특급수 정도 될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인지라 현수는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그리곤 시원한 물속에 몸을 담갔다.
풍덩―!
“어이, 시원하다!”
깊이가 허리를 약간 넘기에 넓적한 돌을 깔고 앉아 묵은 때를 벗겼다. 절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게 된다.
“룰루루르, 룰르르!”
모처럼 시원한 목욕을 한 현수는 새 옷을 꺼내 입었다. 숲을 헤치고 오느라 옷의 곳곳이 해진 때문이다.
등산화도 갈아 신었다. 밑창이 떨어지려 해서이다. 하긴 오래 신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내친김에 밥도 해서 먹었다. 신김치에 꽁치 통조림과 감자, 양파, 부추, 깨 등을 넣고 팔팔 끓였더니 냄새가 그럴듯하다.
시각을 확인해 보니 오후 4시쯤이다. 숲 속을 헤매느라 점심을 굶은 현수는 몹시 시장했기에 허겁지겁 뱃속을 채웠다.
“끄으으윽―!”
기분 좋게 트림까지 하고는 설거지를 했다.
“흐음, 이제 슬슬 출발해 볼까?”
방향을 가늠한 현수는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넓적한 바위가 많아 이리저리 디디는 재미도 있다.
그렇게 50여m쯤 내려왔을 때다.
쏴아아아아―!
“폭포가 있나 보네. 경치 좋으려나?”
홀로 중얼거리며 낙차 큰 폭포를 예상하던 현수의 귀로 웬 여자의 음성이 들린다.
“아이, 시원해! 호호, 계집애들은 왜 여길 안 오려고 하는지 몰라.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데. 룰루루! 룰루랄라!”
“헐!”
현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어떤 여자가 목욕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퇴로를 찾았다. 졸지에 치한 취급 당하기 싫어서이다.
“끄응! 하필이면…….”
물러설 길을 찾던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왔던 길 이외엔 너무도 울창한 수림 때문에 마땅한 곳이 없다.
그런데 왔던 길로 뱀 두 마리가 오고 있다. 죽이면 간단하다. 문제는 밑에서 눈치챌 수 있다는 것이다.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죽은 뱀 두 마리가 뚝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목욕하던 여자가 얼마나 놀라겠는가!
“프리징!”
마법으로 두 마리 뱀을 꽁꽁 얼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마법이 구현되자 꿈틀거리며 다가오던 뱀의 움직임이 멈춘다.
하나를 잡아 얼른 숲 속으로 던졌다. 나뭇가지에 걸린다.
그러는 사이에 나머지 하나가 물속으로 빠져든다.
“헐!”
얼른 물속에 손을 넣어 놈을 잡아갔다. 그런데 유속이 너무 빨라 교묘하게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폭포 쪽으로 다가간다.
“이런, 제기랄! 에라, 모르겠다.”
현수는 얼른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혹시 몰라 밥해 먹었던 곳보다도 더 위쪽으로 갔다.
그렇게 튀어가던 현수의 신형이 또 한 번 급격히 낮아진다.
“뭐야, 이건?”
또 하나의 작은 소(沼)가 있고, 거기에 발가벗은 여인 하나가 목욕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밑에서 소리가 난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자갈들을 밀어내는 소리이다.
우드드득―!
“누구예요? 라이사 언니?”
“……!”
어찌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현수는 얼른 좌우를 살폈다. 아래쪽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제기랄! 퍼펙트 트랜스페어런시!”
얼른 투명 은신 마법을 구현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목욕하던 여자가 일어나서 내려다본다. 당연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아주 잘 나온 아름다운 몸매이다.
얼굴을 보니 예뻐도 너무 예쁘다.
미국 영화 전문 웹사이트 인디펜던트 크리틱스가 발표한 ‘가장 아름다운 얼굴 10’에서 1위를 차지한 카밀라 벨 뺨칠 정도이다.
붉은 머리카락은 하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하여 치명적인 섹시함이 느껴진다.
현수는 잠시 멍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카이로시아도 절세미녀이고 로잘린 역시 매우 아름답다.
지구에서의 이리냐 역시 눈이 번쩍 뜨일 미녀이다. 그런데 눈앞에 거의 비슷한 수준의 미녀가 발가벗은 채 서 있다.
어찌 사내로서 멍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지난 며칠간 여자라곤 구경도 못한 상황이다.
그리고 현수는 혈기왕성한 남자이다. 그렇기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때때로 이리냐의 멋진 몸매를 생각했었다.
문득 하늘하늘한 잠옷만을 걸친 카이로시아도 떠올렸다.
속옷이 시원치 않은 세상인지라 속이 훤히 비치는 잠옷 속에 너무도 섹시한 몸매가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목욕하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던 로잘린의 몸매도 최고였다.
겉보기엔 조금 마른 듯하지만 로잘린 역시 끝내주는 몸매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현수는 이런 생각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상상엔 도덕이 강요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니 어찌 사내로서 멍하지 않겠는가!
“어라, 이상하네? 분명 무슨 소리가 났는데? 뭐지? 여긴 짐승들도 거의 안 오는 곳이라 소리가 날 리 없는데. 혹시 숨은 건가? 언니! 라이사 언니! 언니예요? 어디 숨은 거예요?”
“……!”
당연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은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 씩씩거리며 올라온다.
몸매가 거의 하마에 버금갈 뚱뚱한 여인이다.
현수는 이 여인의 벌거벗은 몸을 볼까 싶어 피했다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어! 언니!”
“그래, 다프네구나. 근데 너 여기서 누구 못 봤니?”
“네? 누굴 봤냐니요? 그게 무슨……?”
“이 근처에 마법사가 있어. 혹시 이상한 조짐 없었어?”
“마법사라니요?”
“내가 목욕하는데 뱀을 얼려서 떨어뜨린 놈이 있어.”
“네에? 뱀을요?”
“그래. 나 목욕하는 거 훔쳐보다가 날 놀래키려고 했나봐. 그러면 벌떡 일어날 줄 알고.”
“……!”
다프네는 정말이냐는 눈빛을 하고 있다.
“진짜야. 근데 어떤 놈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너 혹시 누굴 보거나 무슨 소리 들은 거 없어?”
“네. 본 건 없구요, 방금 전에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너, 여기 언제부터 있었니?”
“저요? 전… 한 시간쯤. 무리를 좀 해서 땀이 많이 났거든요.”
한편, 현수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한 시간쯤 되었다면 이 여인이 씻은 물에 밥을 해 먹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헐!’
아무리 예쁘다곤 하지만 남이 씻은 물에 밥해 먹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어딜, 어떻게, 얼마나 씻었는지 모르는데!
하여 현수가 벙찐 표정을 짓는 동안 아래에 있던 여인이 묻는다.
“한 시간? 분명하지? 근데 아무도 못 봤어?”
“네, 아무도요. 여긴 아래에서, 또는 위에서 오는 방법밖에 없는 데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래서 묻는 거야. 근데 아무래도 어떤 놈이 우리보다 먼저 여기 와 있다가 나 목욕하는 걸 훔쳐보려 했나 봐.”
“네에?”
다프네는 속으로 웃긴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라이사의 몸매는 꽝이다. 그냥 꽝이 아니고 완전한 꽝이다.
얼굴은 제법 그럴 듯하지만 허벅지는 야생마와 비슷하다.
허리둘레는 가슴둘레보다 훨씬 더 굵다. 라이사의 몸매를 굳이 사물에 비교하자면 종과 비슷하다. 누가 보면 임신했다 할 정도이다.
그것도 만삭이다.
다시 형용하면 위로부터 점점 굵어지는 몸매이다. 그리고 다시는 오므라들지 않는다.
장딴지 하나의 굵기가 다프네의 허리 정도 되기 때문이다.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코끼리나 하마를 상상할 것이다.
“어머? 그래요? 자, 잠깐만요.”
깜짝 놀란 다프네가 서둘러 옷을 걸친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하류에서 목욕하던 하마 같던 여인이 주변을 예리한 시선으로 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