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
누군지 잡기만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한편, 현수는 자리를 뜰 수 없는 상황이다.
투명 은신 마법을 구현시켜 눈에 뜨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플라이 마법으로 허공으로 솟은 뒤 적당한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문제는 현재 밟고 있는 돌이다. 압력이 사라지면 움직이게 된다. 그렇기에 땀만 삐질 흘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세히 살펴봤는데 분명 누군가가 있어.”
“네, 언니. 근데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마법 중에 눈에 뜨이지 않게 하는 것도 있다고 들었어.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테니 더듬어봐.”
“네? 마법이요? 아! 네에, 알았어요.”
둘은 눈가리개를 하고 사람을 잡으려 팔을 벌려 더듬거리듯 그렇게 주변을 훑기 시작한다.
‘제기랄!’
현수는 점점 다가오는 여인들을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두 여인 중 하나에게 생포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묘안이 떠오른다.
‘이게 될지 모르겠네. 그리스!’
마찰계수를 순간적으로 줄여주는 마법이 구현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코앞까지 다가온 다프네의 발밑에 작용하였다.
와륵! 와르륵!
“어어어어!”
풍덩―!
“어푸! 어푸!”
발밑의 돌에 갑작스레 미끄러져 균형을 잃은 다프네는 몇 번 허우적거리다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에 현수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다프네가 허겁지겁 일어나는 소음을 틈탄 것이다.
현수는 즉시 현장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만 잠시 머뭇거리고 말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그랬다.
사람이 살면서 늘 특별한 이유가 있어 어떤 행위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듯이.
물에 빠졌던 다프네는 얼른 옷에 묻은 물을 털어냈다. 하나 이미 흠뻑 젖은 뒤였다. 덕분에 육감적인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홀딱 벗고 있을 때보다 적당히 가려졌을 때가 더 섹시하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정답이 보인다.
현수 역시 사내인지라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얼른 시선을 돌리곤 숲 너머로 이동했다.
“휴우! 정말 대단한 몸매였어!”
간신히 위기를 넘겼기에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라수스 협곡 저쪽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현수는 산천경계를 감상하듯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풍경도 뛰어났지만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만드라고라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드래고니안과 대결하는 동안 마나 포션이 소진되었다.
이제 마나가 떨어지면 결계를 치고 들어가 앉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어찌 알겠는가!
하여 유사시를 대비할 마나 포션이 필요하다.
“흐음, 이 근처 어디서 냄새가 났는데.”
나직이 중얼거리곤 주변을 살폈다.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엔 분명 만드라고라 냄새가 포함되어 있다. 지구로 치면 칡이 있는 곳에 냄새가 나는 것과 같다.
현수는 점점 더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슬슬 눈에 뜨일 때도 되었는데……. 아, 저기!”
숲 속 큰 나무 아래 비교적 뙤약볕이 덜 비치는 곳이 눈에 뜨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만드라고라가 자생하기에 최적인 곳이다.
서둘러 다가가려던 현수가 멈칫거린다.
“우와! 심봤다! 헐, 이것도 영물에 속한다는 건가?”
예상대로 만드라고라가 자생하고 있다.
그런데 곳곳에 적지 않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지구와는 품종이 다르기에 확실하다 할 수는 없지만 독사인 것 같다.
대가리는 삼각형이고 눈빛은 요사스럽다.
“얘들아, 난 요 녀석들이 필요하거든. 근데 니들 때문에 불편하니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
현수는 아공간에서 백반(명반)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봉지를 뜯어 뿌렸다. 처음엔 뭐하는 짓인가 바라보던 놈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난다.
뱀은 후각이 매우 뛰어난 동물이다.
비경 대신 혀를 사용해 냄새를 맡는데 축축한 혀를 날름거리면서 공기 중의 냄새 성분을 모은다.
단, 혀로 직접 냄새를 맡는 것이 아니라 입안 깊숙이 위치한 야콥슨 기관(Jacobson’s organ)에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냄새를 감지한다.
뱀의 혀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은 야콥슨 기관에 두 개의 구멍이 있어 그곳에 혀끝을 넣기 때문이다.
후각이 굉장히 발달한 뱀은 싫어하는 냄새를 맡으면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하와이는 화산 폭발로 생성되었고 아직도 땅에 백반, 유황 등 뱀이 가장 싫어하는 유독성 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하여 뱀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거나 백반 가루가 뿌려지자 뱀들이 일제히 물러난다.
“후후, 사람은 이래서 상식이 있어야 해.”
별일 아니건만 기분이 좋아졌다. 아공간을 뒤졌다. 호미를 찾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아무리 없는 것 없는 대형 할인마트라지만 농기구까지 파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쩝, 아쉬운 대로 모종삽이라도 찾아봐야겠군.”
예상대로 있기는 하다. 그런데 조금 약해 보인다. 가정에서 작은 식물 몇 개를 상대로 하는 디자인 중시 제품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 이거라도……. 참, 이실리프 마법서 오픈!”
샤르르르릉―!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마법서에서 만드라고라 채취법을 확인했다.
산삼과 마찬가지로 잔뿌리까지 모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냥 뽑으면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걸 막기 위해 논 노이즈 마법을 구현시켰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기 때문이다.
“끄응! 잔뿌리를 무시하고 그냥 뽑으면 약효가 절반 정도로 준다니 어쩔 수 없네. 근데 이걸 언제 다 뽑지?”
나직이 투덜거린 현수는 가장 앞에 있는 만드라고라 주변을 조심스런 손길로 파냈다. 잔뿌리를 일거에 잘라 버릴 모종삽은 아예 아공간에 넣어버린 채이다.
하나를 캐곤 보존 마법을 걸었다. 그리곤 상자를 꺼내 이끼를 깔고 그 위에 얹었다.
집중해서 작업을 하니 허리가 아프다. 재보진 않았지만 대략 일곱 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런데 아직도 만드라고라는 많다.
채취한 것은 아홉 뿌리이고, 남아 있는 것은 대략 100여 뿌리이다.
“이걸 다 캐갈까? 아냐. 그건 욕심이지. 반쯤은 남겨둬야 요놈들이 또 새끼를 치니까. 흐음, 여기에 타임 패스트 마법을 걸어놓으면 단시간에 많은 수확도 할 수 있겠군.”
현수는 오늘 끝낼 일이 아니라 판단하여 텐트를 쳤다. 그리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시장기를 해결했다.
어둠이 찾아들자 야외용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작업으로 노곤해진 몸을 쉬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아침 식사를 해결하곤 곧바로 채취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난 것은 오후 다섯 시 정도이다.
채취된 만드라고라는 62뿌리이다. 마나 포션 31병을 만들 분량이다.
뿌듯한 마음이 든 현수는 만드라고라 자생지 인근에 마법진을 설치했다. 하나는 눈앞에 있음에도 볼 수 없도록 하는 컨퓨징 이미지 마법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타임 패스트 마법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게 함으로써 보다 오래 묵은 만드라고라를 얻기 위함이다.
어쨌거나 두 마법진은 손톱만 한 중급 마나석 하나만 박아 넣으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마법이 지속될 것이다.
나중을 위해 좌표를 기록해 두곤 곧장 포션 제조에 들어갔다.
그전에 남겨두었던 만드라고라를 먼저 사용했고, 한 뿌리는 견본용으로 보관했다.
지구에서도 번식시킬 수 있을지를 실험해 볼 생각인 것이다.
다음날 새벽, 현수는 31병의 마나 포션을 소유하게 되었다.
“룰루랄라! 룰룰루랄라! 룰루랄라 룰루랄라!”
만드라고라 서식지를 떠난 현수는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휘적휘적 걸었다. 몬스터들이 제법 나타났으나 몇 번 손을 쓰니 알아서 자빠져 준다. 그냥 놔두면 인근 식물의 거름이 될 것이다.
“어라? 여기에도 마을이 있어? 이 깊은 곳에? 설마 또 드래고니안은 아니겠지?”
마을로 다가가 보니 이번엔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 드래고니안이 살던 곳은 몬스터들이 침입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가까이 다가갔다간 식량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의 경계에 둘러놓은 목책이 허술했다. 그런데 이곳은 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견고한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라수스 협곡 안에 마을이 있다는 걸 알면 다들 놀라겠군.”
현수는 거침없는 발길로 가까이 다가갔다.
“멈추세요.”
“……!”
현수의 시선이 미친 곳엔 연보랏빛 눈동자 두 개만 반짝이고 있었다. 목책에 뚫린 구멍으로 경계 근무 중이었던 모양이다.
음성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이거나 여자인 듯싶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신분을 밝혀요.”
“미판테 왕국에서 왔습니다. 이름은 하인스라 불러주십시오.”
“설마… 인간인 거예요?”
“네, 100% 인간 맞습니다.”
“100%가 무슨 뜻인가요?”
“아! 그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인간이 여기까지 칼 한 자루만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설마 여기가 어딘지 모르진 않겠지요?”
“물론입니다. 라수스 협곡 아닙니까? 용무가 있어 협곡을 가로지르는 중입니다. 여기로 들어온 지 꽤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을이 없어 고생했는데 하룻밤 묵어갔으면 싶어 왔습니다.”
“진짜 인간이란 말이지요?”
“네. 말도 안 된다는 거 알지만 진짜 인간 맞습니다. 여러분도 여기 있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건 우리가……. 으음!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네, 그러죠.”
현수가 기다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목책 너머로 수십 개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들의 손엔 각기 활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물론 시위에 화살을 먹인 채이다.
인기척이 났기에 가까이 온 것은 알았지만 이렇듯 적대적일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기에 현수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어!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냥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데. 어라! 그러고 보니…….”
목책 위로 올라선 사람들은 전부 여자다.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까지로 모두 삼십여 명이다.
활을 들고 있는 폼을 보니 아주 능숙한 듯싶다.
‘뭐야? 내가 아마조네스1)를 만난 거야?’
“진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 봐.”
“네? 제가 인간임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너무도 어이없는 말이기에 저도 모르게 한 반문이다.
“드래고니안은 어깨 뒤에 비늘이 있어. 그게 없다는 걸 보이라는 거야.”
“그럼 저더러 옷을 벗으라는……?”
“상체만 벗으면 되는데, 왜? 부끄러워?”
“아, 아뇨.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현수는 속에 입은 러닝셔츠가 이들의 눈에 어떻게 뜨일지 걱정되었지만 일단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상의를 벗고 러닝셔츠마저 벗는 동안 여자들의 눈이 커진다.
약간 마른 체형인 것으로만 보이던 현수가 의외로 근육질임을 알게 된 때문이다.
더구나 볼륨감과 더불어 잘 발달된 근육은 각까지 잡혀 있다.
여성으로서 본능적인 섹시함을 느꼈기에 눈이 커진 것이다.
“이제 되었습니까?”
현수가 등을 돌리자 여인들의 시선이 쏠린다. 대흉근과 식스팩이 너무도 멋진 때문이다.
“문을 열어줘라!”
“네, 언니!”
삐거덕―!
경첩 같은 게 없는 세상인지라 문 열리는 소음이 들린다.
“들어와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현수는 서둘러 옷을 입고는 목책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여인들만 사는 곳이 맞는 것 같다. 사내들이 머물렀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없다.
‘에구, 이거 잘못 들어온 거 아냐?’
순간적으로 씨받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현수의 상념이었다.
“일단 루디 언니에게로 가요.”
“네, 그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