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
루디 언니가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 모든 여인들이 졸졸 따라온다. 경계의 눈빛을 띈 여인도 있지만 대부분이 호기심 어린 표정이다.
“루디 언니, 우리 마을에 남자가 왔어요. 인간이에요.”
“뭐? 뭐라고?”
우당탕탕―!
보고한 여인의 말에 깜짝 놀랐는지 소음이 들린다.
‘치이, 남자면 당연히 인간이지. 그리고 마을에 남자가 온 게 뭐 큰일인가? 뭔 호들갑이야?’
내심 웃겼지만 현수는 표정 관리를 했다. 사람들 틈에서 하룻밤 묵어가려면 그만한 배려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삐꺽! 와당탕―!
“헉! 남자다. 진짜 남자야.”
루디 언니라 불린 여인은 30대 중반으로 농염하다. 볼륨감 있는 육체는 더운 날씨 때문인지 거의 드러나 있다.
지구로 치면 수영복만 걸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옷이 낡아서 속살이 반쯤 비춰 보인다.
“처음 뵙습니다. 하인스라 하는데, 라수스 협곡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는 중입니다. 오늘 이 마을에서 묵었으면 좋겠습니다.”
“묵어요? 아! 여기서 자고 싶다고요? 물론 환영해요.”
여인은 현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니들은 기억하니? 오늘이 그날이다. 파티 준비해.”
“와아아아! 파티다!”
여자들이 썰물처럼 흩어진다.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환영하는 듯하니 안심이다.
“하인스, 여기서 하루만 묵을 건가요?”
“네. 제가 저쪽에 좀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근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못 보았나요?”
“봐요?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짐짓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드래고니안을 만난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흐음, 이상하네. 그 녀석들이 가만 놔둘 리 없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난 건가?”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현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뭐야? 드래고니안이 있는 걸 알면서도 여기서 사는 거야? 대체 이 여자들 정체가 뭐지?’
새삼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남자들이 사용할 법한 물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특징은 집집마다 현관 입구에 활이 걸려 있고, 화살통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가 아니니 아마조네스는 아닐 텐데, 대체 뭐지?’
의아심이 생겼으나 이내 관심을 끊었다. 하룻밤 묵어갈 잠자리와 남이 해주는 음식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3장 내기 하실래요?
“알았어요. 날 따라와요.”
루디 언니의 뒤를 따라간 곳은 마을 외곽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이다. 하나 세심한 손길이 있어서인지 그런지 정갈하다는 느낌이다.
“잠은 여기서 자면 돼요. 식사는 우리와 함께 해야 하구요. 우린 항상 모여서 먹거든요.”
“네, 고맙습니다.”
현수가 예를 갖추자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흐음, 이게 진짜 오두막이군.”
한 사람이 누워 잘 침상이 있고, 벽에는 옷가지를 걸어둘 못이 박혀 있다.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벽지는 당연히 없고 전등도 없다.
풀썩―!
침상에 누워보니 의외로 푹신하다. 하여 뭔가 싶어 들춰 보다 이맛살을 찌푸렸다. 온갖 넝마가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냄새도 난다.
“크으으! 이 여자들이 진짜…….”
서둘러 페브리즈를 뿌렸다. 그런데 꿈틀거리는 벌레들이 보인다.
“으음, 이 위에선 못 자겠군.”
현수는 오두막을 나섰다. 여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첫째는 모두가 붉은 머리라는 것이다. 이쯤해서 현수는 뭔가를 눈치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이곳 아르센 대륙엔 머리카락 색깔이 총천연색이다. 보라색도 있고 심지어 초록에 가까운 색도 많다.
붉은 머리는 당연히 더 많다. 코찔찔이 세실리아의 엄마인 로사도 그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걸치고 있는 의복이 심하게 짧다는 것이다.
소매가 없는 옷도 있고 미니스커트로 보이는 치마도 많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음기가 상당히 강하다.
‘음기가 강하면 냉기로 인한 혈액 순환 장애가 많은데…….’
언젠가 읽었던 한의학 서적의 내용이 문득 떠오른다.
이러면 수분이나 노폐물 배설에 문제가 생겨 몸이 잘 붓고 소화기를 비롯한 여러 장기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럴 땐 계피차, 생강차, 대추차, 인삼차, 유자차가 좋다. 음식으론 양파, 마늘, 파, 부추, 고추가 좋을 것이다.
내친김에 여자들의 안색을 살폈다. 예상대로 소화기관 및 배설기관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생리통을 겪는 듯하다.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보답할 건 해야지?”
현수는 아공간을 뒤졌다. 다행히도 부추는 뿌리까지 있었다.
‘부추만으론 조금 옹색하지만 어쩌겠어? 이것밖에 없는데.’
현수는 오두막 인근에 버려진 텃밭을 일구었다. 그리곤 부추를 심고 물을 주었다.
책을 찾아 읽어보곤 빙그레 웃음 지었다.
부추는 게으른 사람이 짓기에 딱 알맞은 채소라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씨를 뿌리면 그 자리에서 10년 이상을 자라며 일 년 내내 끊임없이 수확해서 먹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타민과 철분 등을 다량 함유한다. 하여 여인에겐 좋은 식재료이다.
모든 일을 마칠 즈음 여인 하나가 다가온다.
“식사 준비 다 되었어요. 어서 가요.”
“네, 그러지요.”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곤 여인의 뒤를 따랐다.
마을 중앙에 긴 식탁이 놓여 있고, 음식을 담은 목기와 토기들이 진설되어 있다.
현수가 등장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때 루디 언니가 한마디 한다.
“오늘 우리 마을에 손님이 왔다는 건 다들 알지?”
“네에.”
“하룻밤 묵어가신다니 불편하지 않도록 주의해 줘.”
“네에.”
“하인스님,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인의 말에 현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하룻밤 잘 쉬겠습니다.”
“네, 편히 쉬십시오. 우선은 식사부터 해요.”
길게 이어진 식탁 위엔 갖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다. 육류도 있지만 대부분 소박한 소채를 조리한 것이다.
식탁을 보니 포크와 나이프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무엇으로 음식을 먹나 싶어 바라보니 모두 손으로 집어먹고 있다.
손을 안 씻었기에 우물쭈물하고 있는 찰나 요란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땡, 땡, 땡, 땡!
“몬스터가 나타났다! 몬스터가 나타났어!”
“뭐야?”
식사를 하려던 여인 모두가 고개를 번쩍 든다. 그리곤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들이 다시 모이는 데 걸린 시간이 불과 2분이다.
재집결한 여인들은 모두 활로 무장되어 있었다.
“너희는 저쪽으로, 너흰 저기! 그리고 너, 너, 너는 저기 보이지?”
“네, 언니!”
촌장이라 하기엔 너무 젊고 예쁜 30대 중반의 루디 언니 손짓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흩어진다.
“몬스터들이 왔나 봅니다. 여기서 식사하고 계세요.”
“네? 아, 네에.”
현수는 나서겠다는 말을 할 수 없기에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디 언니도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간다.
그러는 사이에 목책 뒤쪽 발판을 딛고 올라선 여인들의 활 쏘는 모습이 보인다.
목책의 높이는 대략 5m이다. 그리고 계단을 딛고 올라서게 만들어진 발판의 높이는 4m쯤 된다.
여인들은 안정된 자세로 연신 활을 쏜다.
핑! 핑, 핑! 핑핑핑핑! 핑! 핑핑! 피피피핑!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져 간다.
“뭐야? 뭐가 대체 얼마나 왔기에 저렇게 쏘아대는 거지? 헐! 저러다 화살 떨어지겠네.”
여인들은 조금도 쉬지 않고 속사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거야?”
호기심이 돋은 현수는 목책으로 다가갔다.
“올라가도 됩니까?”
“…네.”
쉴 새 없이 화살을 쏘던 여인의 간결한 대답이었다.
목책에 올라보니 사방으로부터 오크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대략 헤아려 보니 2,000여 마리이다.
“놈들이 왜 오는 거죠?”
“배가 고픈가 보죠.”
여인은 오크를 쏘기에도 바쁜데 자꾸 말을 거는 현수를 힐끔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다.
이곳에 당도하기 전 계곡에서 목욕하던 여인이다. 현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괜스레 치한이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여인은 연신 활을 쏜다.
“미안하지만 내려가서 화살 좀 가져다줄래요? 저기 저 오두막 안에 있어요.”
바라보니 오늘 밤 묵기로 한 오두막 바로 곁이다.
“알겠소.”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기에 현수는 서둘러 오두막으로 향했다.
삐이꺽―!
문이 열리자 잘 정돈된 화살더미가 보인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비축해 놓은 물량인 듯싶다.
“흠, 일단 많이 가져가야겠지?”
아공간에 담아가려던 현수는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화살 공격이 멈춰지면 오크들이 목책을 기어오를 것이다.
인간에겐 5m가 넘지 못할 높이일 수도 있지만 근력이 뛰어난 몬스터들에겐 약간의 장애밖에 아닐 것이다.
만일 오크들이 마을 안으로 난입한다면 오늘 저녁식사를 같이 하려던 여인들이 한 끼 식사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
마음이 급해진 현수는 마법을 쓰기로 했다. 마법사임을 감출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플라잉 브랜켓(Flying Blanket)!”
마법이 구현되자 공기로 이루어진 비행 담요가 생성되었다. 이 위에 화살더미를 서둘러 올려놓았다.
전에 이수연을 성폭행하려던 히로야마와 졸개 네 놈을 올려놓고도 거뜬하던 것이다.
오두막 안의 화살 거의 모두를 올려놓은 현수는 서둘러 목책으로 향했다.
“화살 필요하신 분!”
현수가 소리를 지르자 고개를 돌린 여인들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화살더미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여기요! 여기 한 더미 던져 줘요.”
“네, 갑니다.”
현수가 화살더미를 목책 위로 던져 올렸다.
“여기도요! 화살 다 떨어졌어요!”
“여기, 여기도요! 이제 몇 발 안 남았어요!”
“나도 필요해요! 여기도 던져 주세요!”
현수는 화살을 필요로 하는 곳마다 정확히 배달해 줬다.
그리곤 다프네라 불렸던 여인에게로 갔다. 여전히 활쏘기에 여념이 없다.
“다프네 양, 여기 화살이요.”
“네? 아, 네에. 고마워요.”
화살더미를 올려주자 경황 중임에도 환히 웃으며 고개까지 숙여준다.
“올라가도 되죠?”
“네, 올라오세요.”
현수가 올라서는 사이에도 다프네는 연신 화살을 날린다. 그런 그녀의 앞에 활 한 자루가 보인다.
“이거 내가 써도 돼요?”
“활 쏠 줄 아시면 쏘세요.”
현수는 활을 만져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쏘는 건지는 안다. 그렇기에 화살을 얹은 뒤 시위를 당겼다.
피잉―!
시위를 떠난 화살은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듯 공중을 유영하며 쏘아져 간다. 현수가 노린 곳은 무리의 뒤쪽에서 연신 녹슨 도끼를 휘두르며 동족들을 독려하는 놈이다.
모르긴 해도 몰려온 놈들의 우두머리쯤 될 것이다.
늘 그렇듯 높은 놈들은 부하를 사지에 몰아넣고 혼자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퍼어억―!
꿰엑! 꿰에에에엑―!
대가리를 노렸는데 배에 박힌다. 오크는 통증이 심한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시위를 당긴 힘이 워낙 강했기에 아주 깊숙이 화살이 박힌 때문일 것이다.
“어머! 좀 쏘시네요?”
“쩝, 머리를 노렸는데 배에 맞는군요.”
“키킥! 키키킥!”
다프네는 활을 쏘다 말고 현수의 표정과 말이 웃긴다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곧 잘 쏠 수 있을 겁니다. 처음이잖아요.”
“네에? 정말 활을 처음 쏴본 거예요?”
시위에 화살을 얹던 다프네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네. 그동안 보기만 했지 쏴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런데도 맞았으면 아주 괜찮은 거예요. 노린 곳을 맞추려면 최소 10년은 활쏘기 수련을 해야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