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이밖에 여러 검법서와 각종 병장기를 다루는 법이 기록된 책도 상당히 많이 읽었다.
무언가를 읽을 때마다 뇌의 어딘가에 각종 지식이 기록된다. 그런데 가끔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
분명 아는 얼굴인지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당혹스러운 순간이다.
누구나 한 번쯤을 경험해 보았을 일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한참 지나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날 때가 있다.
뇌를 수없이 많은 서랍장에 비유하자면 어느 서랍에 어떤 지식을 넣어두었는지 찾지 못해 생각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뇌에 기록된 지식이 서로 유기적인 정렬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치면 디스크 조각 모음이 이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하드 디스크의 용량이 작던 예전엔 디스크에 저장되는 데이터의 단위가 작게는 512byte부터 많게는 64kb 정도였다.
이것들은 파일 형태로 저장되었다. 그런데 저장 명령을 내리면 하드 디스크의 아무 데나 그것을 기록한다.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멀리 떨어져 기록되면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의 액세스 타임이 길어진다.
그래서 이것을 가까운 곳으로 모아놓으면 하드가 파일에 접근하는 속도가 높아지곤 한다.
이를 목적으로 한 것이 디스크 조각 모음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연산 속도가 엄청 빨라졌기에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된다.
아무튼 현수가 혼절해 있는 동안 뇌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리프레쉬 마법이 구현된 바 있다.
이때 모든 지식과 기억이 재정렬되었다.
그렇기에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어쨌거나 현수의 뇌리엔 8써클 마법에 대한 요해가 정렬되어 이해를 돕고 있었다.
또한 무언가를 깨달을 때마다 재정립되고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 하는 중인 것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현수의 심장엔 여덟 개의 선명한 마나 고리가 맹렬한 회전을 하고 있었다.
이 순간 또 한 번의 바디 체인지가 일어나고 있다. 현수의 기대 수명은 이제 400년이다.
300살이 되도록 청년의 몸과 얼굴로 살게 될 것이다. 나머지 100년 동안 서서히 늙게 될 것이다.
9써클에 이르러 또 한 번의 바디 체인지를 겪으면 수명이 700세로 늘어난다. 600살까지는 젊음이고, 이후에 늙는다.
스승인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보다도 더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어쨌거나 현수의 바디 체인지는 72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벌모세수 된 몸이 또 벌모세수를 받고 한 번 더 같은 과정을 밟는 것과 같다.
이번엔 큰 변화보다는 작은 변화가 많았다. 미세 조정이라는 표현이 부합될 것이다.
모든 뼈마디는 위치를 재확인하였고, 모든 장기는 싱싱함을 유지하도록 다시 한 번 주의를 받았다.
그리고 이젠 노폐물이 쌓이지 않는 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독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독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다.
“흐으음!”
바디 체인지가 끝나자 현수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심장을 돌고 있는 마나 고리를 먼저 확인했다.
“8써클 비기너는 넘는 것 같고, 유저와 마스터의 중간쯤 된 건가? 마음에 드는군!”
현수는 읽고 있던 마법서를 갈무리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검법 수련에 돌입했다.
어느새 소드 마스터 비기너를 벗어나 있다.
하긴 검법만 수련한 시간을 계산해 보면 족히 10년은 된다. 먹고 싸는 시간을 뺀 나머지 거의 전부 수련에 할당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위가 확실히 높아진 것이다.
“이제 라이세뮤리안과 거의 동등한 수준은 된 건가?”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이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조금 더 수련해 보자.”
현수는 다시 검법과 마법, 그리고 궁술 수련에 돌입하였다.
결계 안 시간으로 29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또 하나의 성과가 있었다. 드디어 오러 입힌 화살을 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구에 가면 강력한 컴파운드 보우를 장만해야겠어. 라이세뮤리안, 이 자식을 혼내주려면 강력해야 하니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양궁은 리커브 보우(Recurve Bow)라는 것이다. 컴파운드 보우(Compound Target Bow)는 도르래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리커브 보우와 똑같은 세기의 활을 가지고 화살을 쏠 때 약 10파운드 이상의 더 센 활을 쏘는 스피드가 난다.
참고로, 세계 양궁연맹의 플라이트 아처리(Flight Archery) 경기에서 리커브 보우의 멀리 쏘기 기록은 485.27m이다.
컴파운드 보우의 기록은 709.50m이다.
화살의 최대 스피드는 리커브 보우는 235㎞/h, 컴파운드 보우는 360㎞/h이다.
확실히 컴파운드 보우가 더 강하다.
현수는 지구로 갔을 때 아주 강력한 컴파운드 보우를 주문할 생각이다.
얼마나 센 활을 만들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사거리 2,000m짜리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라이세뮤리안이 쇄도하는 동안 적어도 몇 발은 쏠 수 있을 것이다.
결계 밖에선 고작 하루지만 3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로지 라이세뮤리안을 꺾을 수련을 마쳤다.
결계를 풀고 밖으로 나온 현수는 그동안 참았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라수스 협곡으로 곧장 갈 것인지의 여부를 생각해 본 것이다.
다프네가 살고 있는 마을 근처의 좌표를, 아니, 마법을 구현시키면 순식간에 당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문득 떠오른 다른 목적 때문이다.
일단 알베제 마을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는 쉐리엔을 채집하기 위함이다.
카이로시아의 말대로라면 지금이 쉐리엔의 열매가 맺힐 시기이다. 열매와 줄기는 물론이고 뿌리까지 모두 쓸모가 있으니 될 수 있으면 많이 채집해야 한다.
줄기는 다이어트 보조제의 원료가 될 것이고, 뿌리는 새로운 진통제로 거듭날 것이다.
열매에 줄기의 즙을 약간 탄다면 다이어트와 입맛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새로운 음료가 될 것이다.
“그나저나 여기서 머문 기간이 얼마나 되지?”
손꼽아 아르센에서의 세월을 따져 보았다. 그런데 결계 안 30년의 세월이 더해지자 계산이 쉽지 않다.
아르센력으로 보면 지난 6월 20일에 왔다. 그런데 오늘은 7월 13일이다. 23일간 머문 것이다.
“일단 지구로 먼저 가자.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하긴 30년 세월이 지났으니 오래되긴 오래되었다.
“마나여, 나를 지구로 데려다줘! 트랜스퍼 디멘션!”
샤르르르르르릉!
현수의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 * *
2013년 9월 12일 목요일.
“흐음! 역시 공기는 아르센 대륙이 최고야.”
서울의 공기에 현수는 잠시 답답함을 느꼈다.
하긴 자연 그대로인 아르센 대륙의 청정 공기와 매연에 찌든 서울 공기를 어찌 비교하겠는가!
현수는 잠시 기억을 정리했다. 30년 전에 일어난 일로 느껴지지만 천지건설의 전무이사가 되고 불과 사흘째 되는 날이다.
“흐음, 세월이 뭐 이래?”
조금 헷갈렸기에 현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향하던 현수의 발길이 멈춘 것은 일단의 무리를 발견한 직후였다.
“앗! 저기 김현수 전무다.”
“어디? 어디? 아! 저기!”
“김현수 전무님! 인터뷰 좀 합시다. 거기 서요!”
현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집요한 기자들에게 붙잡혀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기 싫어서이다.
이때 전화가 진동한다.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웅―!
“응? 강민경 기자네.”
골목에 몸을 숨긴 현수는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헉헉! 헉헉! 김현수 전무님! 헉헉! 헉헉!”
“강 기자님도 같이 계셨습니까?”
“헉헉! 왜 이렇게 빨라요? 헉헉! 육상선수 하셔도 되겠어요. 헉헉! 인터뷰 좀 해요. 헉헉!”
“에구,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강 기자님이라면 해야죠.”
“헉헉! 고마워요. 헉헉!”
얼마나 달렸는지 숨이 턱에 찬 듯하다.
“회사 근처는 좀 그렇고, 강 기자님 신문사 근처로 갈게요.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헉헉! 네에. 헉헉!”
강민경 기자와 현수가 마주 앉게 된 것은 이로부터 40분 정도 지난 후이다.
강 기자는 카메라 기자를 대동하고 왔다.
손님이 적은 오전 시간인지라 현수가 선택한 카페는 한적했다. 주인에게 허가를 받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김현수 전무님, 국내 굴지의 상장사 최연소 임원이 되셨어요. 재벌가의 자손도 아닌데 말이지요.”
“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현수는 싱긋 미소 지었다. 자신이 이룩한 일이기는 하지만 혼자 생각하기에도 대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
려요.”
“네, 저는 천지건설에 입사하여…….”
현수는 가급적 간략하게 이력을 이야기했다.
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한 것부터 시작이다. 그것이 잉가댐 공사로 이어졌음을 이야기했을 때 강 기자는 탄성을 냈다. 작은 인연이 너무도 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음은 천지약품 이야기이다. 이익의 50%를 킨샤사 빈민 구제에 쓴다는 말에 강 기자는 뭔가를 열심히 기록했다.
다음엔 잉가댐 현장 근처에서 벌어졌던 총격전 이야기이다. 그리고 비너스 호텔 총격전도 말했다.
그 결과가 2,432㎞짜리 4차선 고속도로 건설이다.
“휴우, 정말 대단하세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느낌이에요. 그래서 이젠 무엇을 하시려 하나요?”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저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대단위 농장을 개설하려 합니다. 거기서 청정 식품을 생산하는 것이 꿈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죠?”
“커피와 각종 곡물, 그리고 한우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계란, 소시지 등이 생산될 겁니다.”
“종류가 다양하네요. 그럼 거기서 생산된 커피와 고기, 그리고 곡물과 과일 등은 국내로 들여올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국내에 수입되는 것 가운데에는 품질의 안정성이 의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쇠고기이죠. 광우병 때문에.”
“그것뿐만 아니라 지나에서 수입되는 각종 농산물이나 식품 종류도 품질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그렇죠.”
“저는 국민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값싸고 품질 좋은 농산물과 축산물을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나산 채소는…….”
현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내용이다. 농약을 많이 쓴다거나 몸에 해로운 처리를 한 후에 수출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강민경 기자는 메모를 하면서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는 항목들을 기록했다.
이것들은 기사가 나갈 때 이해를 돕는 표로 작성될 것이다.
현수는 현재 지나산 채소를 전부 콩고민주공화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을 고려 중이다.
물론 몸에 해로운 농약을 과다 사용한다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등의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영리 단체이다 보니 무농약 청정 재배는 약속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법으로 해결될 부분은 그리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해충 방제를 위한 농약 살포 대신 초음파 발생 마법진을 설치할 계획이다. 그러면 농약을 쓰지 않아도 해충의 접근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한국까지 오는 해상 운송은 상하기 쉬운 식료품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선박 창고 내에 보존 마법을 걸면 1년이 걸리더라도 까딱없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아공간을 이용할 생각이다. 100년을 두어도 결코 부패되지 않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식료품에 방부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식료품의 가격은 지나산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 싸게 책정할 생각이다. 더 싼 인건비와 훨씬 더 넓은 농장, 그리고 다양한 마법 적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현수의 최종 목표는 국내에 반입되어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지나산 식료품의 근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