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313화 (313/1,307)

# 313

“그건 제가 알아서 준비합니다.”

대답하는 현수의 뇌리로 스치는 상념이 있다.

아르센력으로 지난 4월 13일.

그러니까 그곳을 떠나오기 석 달 전, 카이로시아가 데니스 알만 드 유카리안 백작의 지하 뇌옥에 억류되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카이로시아가 부임하기 전 이레나 상단 미판테 지부장이었던 일루신 에델만 드 로이어로부터이다.

그는 15,000골드에 해당하는 뇌물을 데니스 백작에게 제공했다. 그의 영지에서 발견된 마나석 광산 때문이다.

그가 준 뇌물은 한국 돈으로 약 150억 원에 해당된다.

이 돈은 채굴된 마나석의 40%를 채굴할 권리의 대가이다. 매입 가격은 시세에 준하는 것으로 협정되었다.

새로운 지부장이 된 카이로시아는 이 거래를 확인하기 위해 유카리안 영지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이레나 상단과 경쟁 관계에 있는 아렌시아 상단이 더 많은 금품을 제공했다.

무려 25,000골드이다.

사치와 향락을 즐기느라 재산을 탕진한 데니스 백작으로선 입이 딱 벌어질 거금이다.

그런데 기존의 거래를 끊으려면 상대편의 결정적인 결격 사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계약금의 두 배를 위약금으로 물어주는 것이 관행이다.

물어줄 돈은 30,000골드가 된다. 하여 어찌 무마할까를 고심했다.

그런데 영지에 당도한 카이로시아가 먼저 이 소문을 들었다. 하여 데니스 백작에게 부당함을 호소하고 위약금을 요구했다.

백작은 카이로시아의 언행에 트집을 잡고 그녀를 억류

했다.

사실 카이로시아를 억류한 것은 그녀의 빼어난 미모 때문이다. 처음 보는 순간 끓어오르는 음욕을 주체하기 힘들

었다.

여태껏 보았던 귀족가의 어떤 영애도 카이로시아와 견주기엔 부족하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상냥하고 똑부러진다.

그러니 어찌 탐나지 않겠는가!

그런 그녀를 첩으로 들인다면 이레나 상단으로부터 받았던 뇌물 15,000골드는 물론이고 상단의 일부가 혼수품이 되어 올 것이다.

데니스 백작의 입장으로선 꿩 먹고 알도 먹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이다. 하여 천천히 요리해서 마음과 몸 모두를 굴복시킬 요량이었다.

어쨌거나 당시엔 그녀를 구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기에 기(旣) 제공된 15,000골드에 대한 항의 표시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석 달의 시일이 흘렀다.

생각해 보니 데니스 백작은 거래의 한편을 대표하는 카이로시아에게 심각한 무례를 범했고, 아직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현수는 그때의 일을 빌미 삼을 생각을 품었다.

7장 난감해. 너무 난감해!

데니스 알만 드 유카리안 백작은 장차 장인이 될 로니안 자작의 원수이다. 이십 년 전 벌어졌던 영지전 때 그의 부친이 전사당했고, 영지의 절반을 빼앗겼다.

데니스 백작이 차지하고 있는 미판테 최고의 곡창지대가 원래는 테세린의 영지였던 것이다.

현수는 아르센 대륙으로 돌아가면 로니안 자작을 부추길 생각을 품었다.

영지전을 선포하게 하고 전투를 돕는다면 빼앗겼던 곡창지대를 찾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데니스 백작의 원래 영지까지 빼앗을 계획이다. 마나석 광산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 개의 구리 광산과 질 좋은 철광석 광산도 있다.

이만하면 결혼 예물로는 아주 훌륭할 것이다.

로니안 자작으로선 잃었던 곡창지대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삼림 자원이 풍부한 나머지 영지까지 차지하니 마나석 광산에 대한 권리를 기꺼이 양도할 것이다.

그건 카이로시아가 몸담고 있는 이레나 상단에 양도한다. 이것 역시 훌륭한 결혼 예물이 될 것이다.

마나석 광산은 결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항온 마법진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마나석을 달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 기꺼이, 그리고 웃는 낯으로 마나석 포대를 넘길 것이다.

항온 마법진이 더 필요하더라도 마나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 현수이기에 편한 표정이다.

그러면서 전에 읽었던 신문 기사 내용을 떠올렸다. 6월에 읽었으니 몇 달 전에 본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기사 내용을 기억하는 것에 이유가 있다. 기절했다 깨어난 이후 급격하게 뇌 기능이 향상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전 인구의 3.1%인 88만 가구, 155만 명이 기초생활수급자이다.

“흐음, 155만 명이라……. 조금 많구나.”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기초생활수급자 수가 155만 명쯤 되거든요. 어른도 있고 애들도 있을 테니 그걸 감안해서 내복을 만드세요.”

“네에? 155만 벌이나요?”

“하나 갖고는 못 입을 테니 310만 벌은 만드셔야지요.”

“허얼!”

박근홍 사장은 입을 딱 벌렸다.

옥션에서 팔리는 겨울용 내복 가운데 가장 저렴한 것의 가격은 8,000원 정도이다.

그런데 50만 원 이하의 의류는 옥션에서 가져가는 수수료만 10%이다. 이제 판매자가 매출의 20%를 이득으로 취한다고 계산해 보면 내복의 원가는 5,600원이 된다.

여기엔 운송료, 창고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나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량 생산을 하면 이보다 싼 가격에 내복을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벌당 5,000원이면 고품질 내복도 가능하다.

이걸 보건복지부에 7,000원 정도에 납품한다면 약 62억 원의 이득이 생긴다.

이 정도면 인원이 많이 줄어든 이실리프 어패럴 직원들의 1년치 봉급이 넘는다.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참, 차상위 계급에게도 판매해야 하니까 더 많이 만들어야 할 겁니다.”

“차상위 계층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물론이죠. 185만 명쯤 됩니다.”

“그럼 그 사람들 것도 만들라는 말씀이신가요?”

“넉넉하게 400만 벌을 만드셔야 할 겁니다.”

“……!”

“보건복지부와 많이 접촉하셔야겠습니다.”

“끄으응!”

말이 400만 벌이지 쌓아놓으면 산더미 같을 것이다.

“질긴 천으로 만드세요. 그래야 오래 입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박근홍 사장은 갑자기 생긴 짐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회사엔 이득이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애써 웃는 표정을 지었다.

* * *

“다녀왔습니다.”

“그래, 이제 왔니? 기자들 때문에 늦게 왔나 보구나.”

“네, 밖에서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진급 축하한다. 네가 전무이사라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아버지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현수는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저녁은?”

“기다리다 먹었어요.”

모자간의 대화처럼 현수는 우미내 마을 인근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진을 친 기자들 때문이다.

이들이 물러간 것은 H일보 강민경 기자가 보도한 특종 기사 때문이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일거에 해소시켜 주겠다는 듯 아예 한 면 전체를 현수와의 인터뷰로 가득 채웠다.

자신들이 알고자 하는 내용이 전부,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있기에 모두들 그 기사를 보러 떠난 것이다.

현수가 어찌하여 샐러리맨의 신화를 만들었는지 궁금해하던 시민들은 너도나도 가판대의 신문을 샀다.

TV와 신문은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현수가 만든 신화의 자세한 내막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H일보는 오랜만에 증쇄하는 기쁨을 누리는 중이다.

물론 강민경 기자는 보도국장으로부터 두툼한 봉투를 받았다. 특종에 대한 금일봉이다.

이런 걸 기자들은 따로 독종이라는 표현을 쓴다. 유일무이하게 어떤 사건을 보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현수의 등을 토닥인다.

“이제 너도 장가가야지?”

“네? 아, 네에. 슬슬 준비해야지요.”

의례적으로 하는 대답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반응이 이상하다. 이쯤 되면 ‘에구, 이 녀석아! 말로만 그러지 말고 참한 아가씨를 데리고 와’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빙그레 미소를 지으신다.

“현수야, 그 아가씨 아주 참하더라.”

“네? 그 아가씨라니요?”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려던 현수가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이에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 흡족한지 또 한 번 그윽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곤 입을 떼었다.

“지현이 말하는 거야.”

“네? 지현이요? 지현이라면… 혹시 권지현 씨요?”

“그래, 이 녀석아. 어떻게 그렇게 꽁꽁 감춰둘 수가 있니?”

“감춰두다니요?”

“엄마한테 한 번도 말을 안 했으니 감춰둔 거지.”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래!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라며?”

“어머니가 그건 어떻게 아시는 거죠?”

“어떻게 알긴… 그냥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보셨는데 아가씨가 너무 참하고 예쁘다더라. 마음에 들어. 참, 저쪽 부모님들께 인사도 드렸다면서?”

‘헐! 이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현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어머니의 말이 이어진다.

“그쪽 부모님들도 허락하셨다니 얼른 상견례하고 날 잡자.”

“어머니!”

“이 녀석아! 너도 이제 낼모레면 삼십이야. 장가 늦게 가서 애 늦게 낳으면 나중에 늙어서 고생이야. 그러니까 아가씨 있을 때 얼른 장가가서 애부터 낳아라.”

“……!”

“아버지도 나도 찬성이다. 네가 큰일을 해서 전무가 되었지만 이 엄만 그 아이가 네게 과분하다는 느낌이다. 그쪽 집안이 아주 쟁쟁하다며?”

“……!”

“애는 몇이나 낳을 거니? 둘? 둘은 적어. 셋은 낳아야 한다. 우리도 집안이 북적거리는 걸 좀 보고 싶구나.”

“헐!”

현수는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이미 모든 상황을 결정 지어놓고 그에 따라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 때문이다.

“이번 주는 좀 그렇고 다음 주 토요일쯤에 상견례하고 올해 안에 식 올리자. 알았지?”

“어머니!”

“아이고, 이 녀석아! 이 어미 귀 안 먹었어.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그리고 내 말이 틀렸냐? 아주 예쁘고 참한 데다 얼마나 싹싹한지, 그런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게다가 널 너무 좋아한다며? 그러니 얼른 식 올리자.”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그러면서 대체 어떻게 권지현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머니, 지현 씨를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으응, 너 없을 때 그 아이가 집으로 전화했다. 그래서 만났지.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거든.”

“전화를 걸어요? 지현 씨가요?”

“그래. 네 녀석이 하도 소개를 안 해줘서 네 회사에다 전화 걸어 알아봤다고 하더구나.”

“……!”

사건의 전말이 어찌 된 것인지 한순간에 이해된다.

현수는 너무도 난감한 기분이다.

권지현에게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강연희와 잘 되어가는 중이다.

둘 중 누구와 미래를 함께할 것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강연희가 영국에 있을 때이다.

당시 현수의 마음은 50 대 50이었다.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지현의 착한 마음씨와 상냥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명석함에 이끌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강연희와 재회한 후에도 51 대 49 정도였다.

점심 메뉴 중 짜장면과 짬뽕 가운데 어느 것을 고를 것이냐고 물었을 때와 유사하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강연희와 권지현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처럼 막상막하

였다.

전무이사가 된 이후 강연희를 비서로 정했을 때 현수는 지현을 정리할 생각을 품었다.

아쉽고 아깝지만 일부일처제인 대한민국에서 두 여자를 함께 데리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조만간 전화를 걸어 뜻을 밝힐 생각이다. 그런데 이야길 들어보니 그동안 부모님을 여러 번 만난 모양이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지현을 미래의 며느리로 낙점하셨다. 그 과정에서 지현은 그야말로 지극정성을 보인 모양이다.

현수가 멍한 표정을 짓는 동안 어머니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떤 날은 백화점에 가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새 옷을 선물하였고, 어떤 날은 보약을 지어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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