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
또 다른 어떤 날엔 하루 종일 집안일을 도왔는데 어머니가 피곤해하자 무려 두 시간이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고 한다.
어떤 날엔 두 분을 모시고 나가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였고, 맛있는 음식을 알게 되었다며 식사를 사주기도 했단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싹싹하고 상냥하게 굴었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또 칭찬이시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지현을 아예 새아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러 대목에서 현수는 ‘끄응’ 하고 신음만 냈다.
지현이 어떤 여자인지를 알기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했는지 눈에 선하다.
마지막은 새아기가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절대 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결혼만 하라고 하신다.
아침밥, 점심밥은 물론이고 저녁밥도 당신이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집안 청소와 빨래도 당신이 다 해줄 것이며, 아이를 낳으면 아이까지 돌봐주겠다고 자청하셨다.
이 모든 것은 지현이 진짜 자신을 사랑해서 진심으로 부모님을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헤어져 달라는 말을 어찌하겠는가!
현수는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쉽게 해결할 방도가 없다.
“하여간 다음 주말에 아버지 시간 비워놓으셨다. 친구들하고 했던 약속 다 깨셨어.”
“네?”
“너도 알지? 아버지가 평생지기로 여기던 군대 동기 모임. 그게 그날이었는데 이번엔 불참하신다고 하셨다.”
“아, 네에.”
“친구들도 좋지만 아들 장가가는 게 더 중요하다 하니까 그분들도 흔쾌히 빠지라고 하셨단다. 아무튼 그날 상견례 하는 걸로 새아기하고 얘기 다 되었으니 어디 가면 안 된다. 사돈집에서도 그리 알고 계시니.”
“……!”
“아, 왜 대답이 없어? 알았어, 몰랐어? 너도 장가가야잖아.”
“네, 알았어요.”
현수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그리곤 제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때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과일 좀 주랴?”
“아뇨.”
“새아기에게 예단이랑 이런 거 일절 해오지 말라고 했다. 우리도 이제 살 만하니 몸만 오라고 했어. 괜찮지?”
“네, 그럼요.”
“호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에게 과분한 아가씨야. 네가 장가 안 가고 나이만 먹어서 걱정했는데 정말 좋은 아가씨를 물어왔어. 잘했다, 내 아들!”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내곤 제 방으로 들어갔다.
‘큰일이네. 어쩌지?’
현수는 너무도 난감한 기분이 들어 털썩 주저앉았다.
강연희와 평생을 같이하고 싶은 것으로 마음을 정한 상황이다. 그런데 권지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문제는 지현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나 싫다는 감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잘해줘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강연희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이번 혼사에 감지덕지했을 것이다.
“끄으응! 미치겠네.”
마법도 이보단 쉽겠다는 생각에 현수는 골치가 지끈거렸다.
짹, 짹, 짹!
날이 밝았다. 그러는 내내 현수의 방은 환했다. 밤새 한잠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난 나쁜 놈이야. 진짜 나빠. 휴우∼!”
창밖을 보며 현수가 중얼거린 말이다.
밤새 고심했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양손에 떡을 쥐었는데 둘 다 너무 맛있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너무나 가혹하다.
“어떻게 하지? 끄으응!”
현수는 237번째 침음 소리를 냈다. 너무나 난감해서이다.
“일단 지현 씨를 만나봐야겠군.”
생각난 김에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쯤 출근 준비 하느라 바쁠 것 같아서이다.
지현 씨!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언제 시간 있어요?
회신은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은 둘이 주고받은 메시지의 내용이다.
급한 일이세요?
급한 일은 아니지만 지현 씨와 나눌 얘기가 있어서요.
네,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알려주시면 갈게요.
아뇨. 바쁘신데… 제가 법원 근처로 갈게요.
그럼 언제든 편한 시간에 오세요. 전화 주시면 나갈게요.
네, 그럼 이따 뵙죠.
네, 기다리겠습니다.
현수는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버지 때문이다.
아침밥을 먹으라고 불렀을 때 내려가 보니 아버지가 계셨다.
오랜만의 부자지간 겸상이다.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셨기에 막 한 숟갈 뜨려 했다. 현수가 좋아하는 가지 무침이 있었던 것이다.
“현수야, 아버진 새아기가 마음에 흡족하다. 그러니 다음 주말에 상견례하고 곧바로 식 올리거라.”
“……!”
“왜 대답이 없어? 그만한 아이가 어디 흔한 줄 알아?”
“아버지.”
“왜?”
현수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내 녀석이 뭘 말하려다 말아? 어여 말해봐. 넌 그 아이가 마음에 안 드는 거니?”
“아뇨. 그건 아니에요. 아버지 말씀처럼 그만한 여자 찾기 힘들죠. 지현 씨는 정말 괜찮은 여자예요.”
“그래, 그런데 왜?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어?”
“네에. 그런 게 좀……. 그래서 제게 시간이 조금 필요해요.”
“알았다. 네가 가는 장가이니 기다려 주마. 자, 밥 먹자.”
“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말씀이기에 어머니는 동석했지만 찍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식사하는 내내 분위기가 몹시 불편했다.
두 분 모두 마뜩치 않다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하하! 어서 오십시오, 김 전무님! 세기의 진급을 하신 걸 감축드립니다.”
“에구, 민 사장님도 참.”
그러고 보니 민 사장의 책상 뒤쪽에 신문 스크랩해 놓은 게 보인다. H일보를 아예 유리 액자에 끼워두었다.
현수는 계면쩍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한약품에 당도하여 사장실에 들어가기까지 현수는 제법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았다.
진급 발표를 한 날 이후 오늘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된 때문이다.
실제로 현수의 이름은 이제 거의 모든 국민이 안다. 코찔찔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역사 이래 이만한 일감을 단독으로 따온 사람이 있었던가!
신문마다, 방송마다, 인터넷 매체마다 김현수라는 이름 석 자를 언급했다. 그러니 거의 모두 아는 것이다.
현재 인터넷 포탈 검색어 1위는 9월 10일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동이다. 물론 김현수라는 이름 석 자이다.
하여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현수의 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진급도 진급이지만 100억 원이라는 보너스와 60세까지 보장된 60억 연봉에 관한 이야기이다.
당연히 부러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민윤서 사장의 비서 역시 그중 하나이다.
현수를 아예 우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현수가 들어섰음에도 인사조차 못했다. 그저 멍한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H일보가 놓여 있다. 거기엔 현수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나 있다.
환히 웃는 모습이다.
기사 내용 중엔 대한약품과 대한동물의약품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현수가 지분의 50%를 가졌다는 것을 밝힌 때문이다.
이는 현수가 추진하고 있는 이실리프 축산 및 농산과 농장 납품 건으로 선을 대려는 사람들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괜한 귀찮음이 싫었던 것이다.
덕분에 대한약품의 주가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중이다.
천지약품과 이실리프 농산 등의 규모가 밝혀지면서 거기에 납품될 물량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수에게 대한약품의 주식을 팔았던 사람들은 아침부터 깡소주를 들이켜는 중이다. 하긴 속이 몹시 쓰릴 것이다.
민 사장은 웃는 낯으로 입을 연다.
“그렇지 않아도 김지우 연구실장님이 김 사장님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저를요? 왜요?”
“우선은 기적의 치료제 미라힐 때문입니다.”
“기적의 치료제 미라힐이요? 상품명인가요?”
현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기에 물은 것이다.
“네, 전에 주셨던 그 파란 액체로 만들 상품입니다.”
“아, 네에. 그런데 왜 이름이……?”
“기적을 뜻하는 ‘Miracle’과 치유를 뜻하는 ‘Healing’을 조합하여 만든 상품명입니다.”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정말 딱 맞는 명칭이다. 기존의 약품들은 미라힐에 비해 상처를 빠르게 아물게 하는 효능이 부족하다.
하여 소독에 주안점을 두던지, 새살 촉진에 무게를 두던지 하는 등이었다.
이에 비래 미라힐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효과를 보인다. 수술 후 봉합한 실을 뽑는데 보통 7∼10일 정도 걸린다.
하지만 미라힐은 바르면 24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미라힐이 왜요?”
“전에도 말씀드렸듯 두 가지 성분은 합성되지 않는다는군요. 그걸 어디에서 얻으신 건지 몹시 궁금해합니다.”
“합성이 안 된다고요?”
“네. 노력은 했는데 매번 실패해서 김 실장님이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보죠. 그리고요?”
민윤서 사장은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다시 묻는다.
“쉐리엔의 원료 수급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 쉐리엔이요. 제가 곧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갈 겁니다. 그때 채취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가급적 많은 양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무슨 뜻인지 알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대한약품에 머물면서 여러 약품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청향도 그중 하나이다.
현재 임상 중에 있는데 그 효능이 너무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냄새만으로도 심신을 편안케 해주고 피로를 풀어준다고 한다. 하여 샘플로 몇 개 가져왔다.
현수가 당도했다는 보고가 들어갔는지 김지우 실장이 숨이 턱에 차 뛰어왔다.
당연히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곤 곧장 업무로 들어갔다. 김 실장은 회복 포션의 주요 성분은 합성할 수 없어 상용화가 어렵다면서 그걸 어떻게 얻은 건지를 물었다.
현수는 몇 가지 질문을 통해 두 가지 중요 성분이 효소라는 걸 알아냈다. 하여 비슷한 성분을 가진 효소들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에 김 실장은 연구실로 직행했다.
그리곤 효소 몇 가지를 내놨다.
* * *
딸랑―!
출입구에 달아놓은 종이 소리를 냈건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현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세요?”
“나갑니다.”
사람 나오는 기척이 들리자 그때야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제법 규모 있는 팬시점이다. 각종 필기도구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상품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어서 오십시오. 뭐가 필요한 거죠?”
나온 사람은 건장한 체구의 40대 장년인이다.
“혹시 로빈훗님 되십니까?”
“아! 새벽에 글을 남기신 김현수님이군요.”
“네, 맞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요. 일단 앉으시지요.”
현수는 로빈훗의 손짓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지난밤 현수는 한잠도 못 잤다. 물론 강연희와 권지현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밤새도록 고민만 한 것은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하여 인터넷 서핑을 했다. 그러던 중 아르센 대륙에서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라이세뮤리안이 떠올랐다.
놈을 상대하기 위해 30년간 수련하면서 8써클 마법사가 되었고, 보우 마스터도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현수는 활에 대한 것들을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컴파운드 보우가 사정거리도 길고 강한 위력을 낸다.
문제는 시중에 있는 활로는 라이세뮤리안을 공략할 수 없다. 놈의 와이드 센스 마법은 1㎞쯤 될 것이다. 8써클이 된 후 확인해 본 결과이다. 하지만 천려일실이라는 말이 있다. 놈은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다.
사람보다 훨씬 더 예민한 감각 기관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놈의 최대 탐색 거리를 2㎞로 가정했다. 이게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