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
지현이 배시시 웃음 짓는다. 너무나 예쁘다. 그래서 안구가 시원하게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께 말씀 들었습니다.”
“네? 아, 죄송해요. 현수 씨에게 먼저 말하고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제 생각이 조금 짧았어요. 언짢으셨죠?”
지현은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에 어찌 마음 상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휴우! 다행이에요. 저는 또…….”
잠시 말을 끓었던 지현이 현수와 시선을 마주친다.
“천만다행인 게 어머님이 절 너무 예뻐해 주셨어요. 아버님도요. 뵈러 가는 내내 마음 졸였거든요.”
지현은 정말 다행이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끄응, 이러면 말을 못하지.’
현수는 침음을 삼켰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슴 같은 여인에게 어찌 화를 내고 타박을 할 수 있겠는가!
“참, 어머님께서 다음 주 주말에 상견례를 하자는 말씀을 하셨어요. 현수 씨 생각은 어떠세요?”
지현은 아주 조심스런 표정이다. 혹시라도 현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누가 봐도 지현은 과분한 아가씨이다.
현수가 대기업 과장이라곤 하지만 삼류 대학 수학과 출신이고, 집안도 변변치 않다.
만일의 경우 회사를 그만두면 갈 데가 없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지현은 일류 대학을 졸업하였고, 행정고시를 패스하여 5급 서기관으로 재직 중이다. 뿐만 아니라 초절정 미녀이다.
웬만한 탤런트나 영화배우는 명함조차 내밀기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렇기에 엔터테인먼트 사로부터 받은 명함만 수십 장이다. 그래서 천지건설 CF 모델로 발탁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부친은 서울고검장이고 할아버지는 독립투사였다.
소위 말하는 뼈대 있는 명문 집안의 자손이다.
이러니 현수가 많이 처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약간 다르다. 천지건설 전무이사가 되었으며 60세까지 연봉 60억이 보장되었다.
게다가 통장엔 보너스 100억 원이 예금되어 있다. 고맙게도 세금을 회사에서 내준 결과이다.
이밖에도 천지약품의 공동 사장이며, 이실리프 무역상사 대표, 이실리프 어패럴과 대한약품, 그리고 대한동물의약품의 대주주이다.
뿐만 아니라 콩고민주공화국에 만들어질 이실리프 농산과 농장, 그리고 축산의 주인이다.
불과 2년 남짓한 세월 동안 이룩한 성과이다.
이제는 누가 봐도 현수가 갑이고 지현이 을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지현이 현수에게 쩔쩔매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으로 알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다르다.
지현과 현수는 그리 자주 만나 사랑을 주고받은 사이가 아니다. 일 때문에 떨어져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지현의 마음엔 현수라는 존재가 각인되어 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최 경사를 치료해 준 고마움과 호감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이다.
하여 지현은 현수를 장래의 지아비로 여기기에 존중해 주는 것이다. 물론 깊고 깊은 사랑이 바탕이 되어 있다.
어쨌거나 현수는 의도했던 용건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지금은 마음 아프지만 시간이 흐르면 더 큰 아픔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저어… 그것 때문에 지현 씨를 보자고 했어요. 근데 그거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아뇨, 아직은. 어머님께 말씀은 들었지만 현수 씨 일정이 어떨지 몰라 아직 말씀 안 드렸어요. 그날 안 돼요?”
현수는 말을 하면서 가볍게 떨고 있는 지현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몹시 긴장한 상태인 것이다.
차마 마음을 베어내는 칼날을 들이밀 수 없는 상황이다. 하여 말을 돌려야 했다.
“네, 유감스럽게도 그전에 콩고민주공화국으로 가야 해서요.”
“아! 그러셨구나. 전무님 되셔서 그런 거죠?”
“…네에.”
현수는 짐짓 말을 끊었다.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쓰는 착한 여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기에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때문이다.
지현은 이를 오해했다. 상견례하기로 한 날이 뒤로 미뤄지는 것이 미안해서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우선은 회사 일이 급하죠. 상견례는 다녀오신 다음에 해도 돼요. 그러니 마음 쓰지 마세요.”
“……!”
현수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어머,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
현수는 또 말을 끊었다. 지현의 눈에 습기가 보인 때문이다.
지현은 다음 주 주말에 상견례를 하면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식을 올릴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현수의 곁에서 머물고 싶은 것이다.
며칠 전 회식을 했다. 그때 지현은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지현은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마음과 똑같은 노래가 있는지 신기해했다.
그리곤 곧 다가올 행복을 예감했다.
다른 부부들은 살면서 부부싸움도 한다. 의견 충돌 및 감정 격화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지현은 현수와 살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 인내해 내리라 마음먹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최 경사를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여기에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까지 품고 있다.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참고, 아니다 싶어도 반대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현수에게 최고의 배우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아이도 가급적이면 많이 낳을 생각이다.
사랑하는 님과의 사이에서 얻은 소중한 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사회의 일꾼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 임무라 생각했다.
그러는 가운데 여자로서의 행복도 놓치지 않고 모두 챙기리라 마음먹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였기에 그날 지현은 웃으면서 잠들었다.
아무튼 현수는 지현의 눈에 머금어진 습기를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졌다. 모든 사내들이 여인의 눈물에 약하듯 현수 역시 그런 것이다.
‘아! 이젠 어쩐단 말인가!’
현수는 내심 탄식을 터뜨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너무도 난감한 상황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강연희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지금껏 상상해 보지도 않던 일이기 때문이다.
“지현 씨!”
“네.”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이 근처 어디가 맛있어요? 전에 먹었던 황태구이도 괜찮은데.”
“근처에 해물 칼국수 하는 집 있어요. 칼국수 괜찮아요?”
현수는 지현을 새삼 바라보았다.
생긴 건 천사 뺨치게 생겼다. 오만의 극치를 달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 식성은 아주 서민적이다.
“칼국수 좋죠. 근데 지현 씨 월급 얼마나 돼요?”
“네? 그건 왜요?”
“버는 거 다 어디에 쓰는 거냐고 묻는 거예요, 지금.”
5급 공무원이면 초봉이 300만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지현은 1호봉이 아니다. 그러니 월급이 제법 될 것이다. 부양가족이 있는 게 아니니 그 돈 전부를 써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이런 경우 많은 여자들이 비싼 화장품이나 옷, 구두, 장신구 등을 사들인다. 물론 밥도 분위기 찾아가면서 먹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물은 것이다.
한편, 현수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지현은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월급 받으면 저축부터 해요.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니까 한 80%쯤 은행에 넣어요. 나머지로 사는 거죠.”
“그거 가지고 충분해요?”
“다행히도 전 보석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비싼 브랜드 옷도 별로구요. 그러니 살 만하죠.”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옷이 평범하다. 그래서 미모가 더 돋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근데 왜 물어본 거예요?”
“검소해 보여서 좋아서요.”
“정말요?”
배시시 웃음 짓는 얼굴이 너무나 예쁘다. 현수는 지금이 조선시대가 아닌 것이 몹시 아쉬웠다.
현수는 평범한 사내이다. 거의 모든 사내가 그러하듯 현수 역시 미인과 함께하고 싶다.
그런데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둘 때문에 혼란스럽고 난감하다. 혹시 이런 마음을 들킬까 싶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칼국수 집에서 다정하게 식사를 했고, 인근 공원에 가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는 두어 시간 동안 담소를 나눴다.
이번엔 현수가 말을 많이 했다. 전무이사로 승진하게 된 내용을 리바이벌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현은 때론 박장대소를 터뜨렸고, 때론 손에 땀을 쥔 채 이야기에 몰입해 주었다.
이렇게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구의 어느 곳에선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가 진행 중이다.
회의 참석자는 모두 여섯.
그중 하나가 상석에 앉아 있고 다섯은 그 앞에 서 있다.
모두 검은 양복 차림이다. 그리고 상석에 있는 자를 빼놓곤 모두 긴장한 표정이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끈 상석에 앉은 자가 입을 연다. 금테 안경을 쓰고 50대 초반 정도 돼 보인다.
“그러니까 잉가댐 공사도, 여섯 개 도로 건설 공사도 모두 이자 때문에 우리가 물먹었다는 건가?”
그의 음성엔 은은한 분노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가 손짓하는 곳엔 인민일보가 놓여 있다.
지나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발행한 신문이다.
거기엔 현수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 한국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을 나름대로 구성한 기사 바로 옆이다.
이 신문에선 현수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만든 신화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잉가댐과 발전소 공사, 그리고 총연장 2,432㎞짜리 4차선 고속도로 공사 단독 수주가 그 내용이다.
이 신문에도 잉가댐 현장을 공격하여 정부군 100명이 사상당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물론 지나인들이 다수 섞여 있다는 내용은 없다. 현수도 의도적으로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후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서 발주될 공사에 대한 소개권이 현수 본인에게 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일 그것마저 언론에 노출되면 이권을 노린 사람들에 의해 하루 종일 몸살을 앓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인민일보의 논조는 지나 국민들도 이런 영웅적인 행위를 하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상석에 앉은 자가 눈빛을 빛내며 앞에 선 다섯을 차례차례 노려본다. 누구든 어서 대답하라는 뜻이다.
이에 가장 선두에 있는 자가 입을 연다.
“제가 보고 드리겠습니다. 알아보니 이자는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의 신임이 매우 두텁습니다. 그의 조카가 교통사고 당할 뻔한 것을 구해준 때문이랍니다.”
“그래?”
“최근엔 죠셉 카빌라 대통령과도 아주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자가 추진하는 농장이 카빌라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게 우리가 추진하던 공사 모두를 좌초시켰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지금껏 보고하던 자의 뒤에 있던 대머리가 한 말이다.
“그럼 뭐지?”
“누군가 잉가댐 현장을 반군들로 하여금 습격하도록 바람을 넣었습니다. 그게 결정적 요인입니다.”
“그게 누구지?”
상석의 사내가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자넨가?”
“아, 아닙니다.”
방금 보고했던 자가 얼른 정색하며 손을 흔든다. 상석에 앉은 자의 시선이 모두를 훑었지만 다들 아니라는 몸짓을 했다.
“그 상황에 대해 보고해 봐.”
“네, 누군가가 삼합회에 선을 댔습니다.”
“삼합회에?”
“네, 그 결과 삼합회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반군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한편 급습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확실해?”
“네, 제가 콩고민주공화국까지 가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비공식적인 것이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콩고민주공화국은 우리 지나와의 선 긋기에 나선 것 같습니다.”
“……!”
“정보원에 의하면 향후 우리 회사는 지나에서의 공사 수주가 어렵다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