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강전호의 부친과 강동호의 부친은 사촌지간이다.
물론 강동호의 부친이 형님이시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작은 다툼이 있었고, 그 이후로 왕래를 끊었다.
강전호가 고등학생 시절의 일이다. 헤어지기 전까지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강동호가 강전호의 과외선생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호? 그래, 전호구나. 근데 네가 여기 웬일이니?”
“전 김 전무님을 만나러……. 그러는 형님은 웬일이십니까?”
“여기 이게 내가 하는 식당이야.”
“아! 그래요? 근데 형님이 식당을 해요? 전에 듣기론 농업연구소의 연구원이라 들었는데.”
“그럴 일이 있어.”
“참, 이거 제 명함이에요. 태백조선소에 다녀요.”
“그래? 난 명함이 없다.”
“하하, 네에.”
현수는 잠시 육촌지간의 해후를 지켜만 보았다. 그러다 강전호가 정색을 한다.
“아이참! 형님, 자세한 이야긴 나중에 해요. 제가 급한 일로 김 전무님을 좀 뵈어야 하거든요.”
“그래, 그러자꾸나.”
강동호가 고개를 끄덕일 때 현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배가 고프니 해장국 둘 주세요.”
“하하, 네에.”
현수의 주문에 강동호가 주방으로 들어가며 환히 웃는다.
아내가 병세를 떨치기 시작한 날 이후 크론 식당은 예전과 달라졌다. 늘 찌푸리고 있던 주인장의 얼굴에 웃음이 배이면서 손님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요즘은 살맛이 나며, 그래서 웃음 띤 얼굴인 것이다.
“두 분이 친척이라니 참 세상 좁습니다.”
“하하, 네에. 제겐 육촌 형님이시자 예전엔 과외 선생님이었습니다. 형님과 연락이 끊겼었는데 여기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내가 좋은 일을 한 셈이네요.”
“네, 여러 모로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전무님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에고…….”
하도 많이 들은 말이라 현수는 대꾸 대신 웃음만 지었다.
“기사를 열 번도 더 읽었습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정도였으니 세바스티앙을 잠재울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보니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에구! 카리스마는 무슨…….”
면전에서의 칭찬은 늘 닭살 돋기에 현수는 그냥 웃어만 주었다.
“그나저나 급한 일이라는 게 뭡니까?”
“세바스티앙이 현재 국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요?”
현수는 세바스티앙을 떠올렸다. 지난 7월 29일에 만났으니 두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나이는 55세, 현재는 CMA 오머런 사의 부회장이지만 실제적인 경영주이다. 매부리코에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게 어찌 보면 유태인처럼 생긴 사람이다.
현수가 세바스티앙 오머런을 떠올릴 때 강전호의 말이 이어졌다.
“네,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죠?”
“이놈이 서연을 데리고 오라고 성화입니다.”
“서연이라면 5인조 걸 그룹 다이안의 리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현수가 서연이라는 연예인을 아는 이유는 H일보에 난 기사 바로 뒤쪽 연예면에 그녀의 사진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네. 그래서 미치겠습니다.”
“계약을 이미 했는데 왜죠?”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호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첫째는 가설계 클라이언트 승인이 떨어져야 본 설계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내년쯤 추가 발주될 컨테이너선이 있는데 서연이를 안 데리고 오면 오시마조선소와 계약하겠다는 겁니다.”
전호는 현수가 이해하기 쉽도록 용어를 바꾸어 설명했다.
선박의 건조 과정은 다음과 같다.
견적→계약→기본설계→조선설계→생산설계→가공→소조립→대조립→도장→P.E→탑재→도크의장→진수→안벽의장→시운전→인도.
이중 생산 설계 과정은 두 가지로 분화되는데 나머지는 다음과 같다.
생산설계→관제작→유닛의장→탑재.
생산설계→관제작→성행의장→대조립.
이런 복잡한 과정을 현수가 알 리 없기에 쉬운 용어로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현수는 대꾸 대신 전호만 바라보았다.
“……!”
“셋째는 이놈이 스위스 MSC 사와의 계약에 어깃장을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MSC 사는 뭐죠?”
“세계 2위 컨테이너선사입니다. 현재 MSC 사의 지앙뤼지 아폰테(Gianluigi Aponte) 회장이 국내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여러 조선사와 협상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요?”
“세바스티앙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일본 오시마조선소 쪽으로 계약을 유도하려 합니다.”
전호의 말은 사실과 약간 다르다.
MSC 사가 세계 2위 컨테이너선사라는 타이틀을 거저 딴 것이 아니다. CMA 오머런 역시 작은 회사는 아니지만 다른 회사 사람의 의중에 따라 하려던 계약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MSC 사는 지난 2002년에 현대중공업으로부터 6,700TEU급 컨테이너선 두 척을 인도 받은 바 있다.
또한 2005년엔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하는 8,400TEU급 컨테이너선 네 척을 추가로 발주한 바 있다.
이처럼 한국과 관계있는 MSC 사가 세바스티앙의 농간에 좌지우지될 일이 있겠는가!
어쨌든 MSC 사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두 척을 발주하기 위해 한국에 머무는 중이다. 하여 모든 조선소에서 제안서를 제출한 바 있고, 현재 검토 중에 있다.
물론 세바스티앙이 언급한 일본의 오시마(大島)조선소에서도 사람들이 와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나의 롱셩(熔盛)중공업, 진하이(金海)중공업, 다롄(大連)조선에서도 몰려들었다.
세계 7, 8, 9위 조선사들이다.
MSC 사의 의중과 관계없이 이들은 어떻게든 지앙뤼지 아폰테 회장을 만나려고 기를 쓴다.
만나야 뭘 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오시마조선소의 나카무라 쇼헤이 전무는 사방을 헤집으며 지앙뤼지 아폰테 회장과 선을 대려 한다.
그중 하나의 인맥이 세바스티앙이다.
태백조선소에 발주된 8만 톤급 석유 제품 운반선 세 척과
2만 TEU급 컨테이너선 네 척을 수주하기 위해 여러 번 만나 안면이 있다.
그걸 빌미로 세바스티앙을 통해 지앙뤼지 회장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중이다.
세바스티앙 오머런의 경우는 동종 업계 사람인 지앙뤼지 아폰테 회장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만나려는 의사 표시만 하면 비서들끼리 연락하여 시간과 장소가 결정될 것이다.
이걸 빌미로 전호에게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한편, 이번 일은 태백조선소의 전무이사 권철이 진두지휘 중이다.
캔슬되었던 선박 수주 공을 인정받아 일약 과장이 된 전호는 실무자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렇듯 애가 닳는 것은 권 전무가 계속해서 전호를 대동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리곤 어떻게든 세바스티앙을 주무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난히 애사심이 강한 전호이기에 이처럼 발 벗고 나서서 일을 해결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늘 세바스티앙은 나카무라 쇼헤이 전무를 만날 예정이다.
세바스티앙의 비서이자 마음속의 연인인 베아트리체 바네사로부터 얻은 정보이기에 확실할 것이다.
본격적인 어깃장이 시작될 경우 MSC 사로부터의 발주는 포기해야 한다. 문제는 권철 전무이사이다.
어떻게든 이번 수주전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밤낮으로 직원들을 달달 볶는 중이다.
새벽 출근, 심야 퇴근은 보통 일이다. 아예 지앙뤼지 아폰테 회장 근처에서 숙식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다른 회사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큰 주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백조선소만큼 극성은 아니다. 하여 직원들 모두 다크서클이 밑으로 축 처질 정도이다.
전호 역시 예외가 아니라 몹시 피곤한 기색이다. 그렇기에 최후의 보루로 여기던 현수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김 전무님께서 세바스티앙을 한번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현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본인도 할 일이 많다. 그런데 남의 일까지 나선다는 게 마뜩치 않은 때문이다.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세바스티앙이 말을 듣지 않아요. 어떤 자식인지 몰라도 한국에선 돈만 있으면 어떤 연예인과도 하룻밤 섬씽을 만들 수 있다고 가르쳐 준 모양이에요. 돈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데려오라는데 미치겠어요.”
“……!”
얼마 전, 어떤 기업하는 놈이 CF를 빌미로 여자 탤런트로부터 성 상납을 받았다는 폭로 기사가 보도되었다.
제법 인기 있는 연예인이기에 사회적인 파장이 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드라마 주연을 주겠다며 성 상납을 요구했던 PD가 망신살을 겪었다. 해당 탤런트의 매니저가 주연 자리를 놓치자 폭로한 것이다. 그 탓에 담당 PD는 방송국에서 잘렸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한류가 기세를 떨치는 중인지라 이를 호재라 여긴 혐한들이 갖가지 루머를 양산해 냈다.
그중 하나가 프랑스의 삼류 에로소설 메이커인 ‘르 파리앤느’이다. 이곳은 연예인들의 추문을 전문으로 양산해 낸다.
일본어를 섞어 표현하자면 ‘황색 찌라시’ 정도 된다.
그런데 세바스티앙은 이 신문사의 애독자이다. 돈은 넘치도록 많고 주변에 미녀도 많지만 자극적인 것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의 배설구 삼아 이 신문을 매일 본다.
그런데 이 신문에 한국 연예계에 관한 내용이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었다. 그중 성 상납과 관련된 추문들이 과장되어 있다.
방금 전 강전호가 말한 것처럼 한국의 연예인들은 돈만 있으면 언제든 즐길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하여 굳이 한국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데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다.
“돈은 얼마나 준답니까?”
“달라는 대로 준다고 합니다. 근데 돈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우릴 무시하는 거라고요.”
세바스티앙 때문에 열을 잔뜩 받았기에 강전호의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그놈 참… 이군요.”
현수도 어이가 없었기에 농담처럼 대꾸했다.
“김 전무님, 바쁘신 거 압니다. 그래도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십시오. 아무래도 김 전무님이 나서야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에구, 우리 회사 일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나섭니까? 괜한 뒷말 생길 일입니다.”
태백조선소도 조직이다. 서로 상충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다. 현수가 나서서 일을 어떻게 해준다 해도 권철 전무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이를 씹을 수 있다.
그렇기에 망설였다.
“MSC 사가 발주하는 컨테이너선은 수주를 못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은 하루라도 빨리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루가 늦어질 때마다 돈이 억수로 깨집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강전호가 허리를 깊숙이 숙인다. 너무 열정적이다. 이러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데 내가 나선다 해도 잘 해결되리라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나서만 주십시오. 되고 안 되고는 차후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안 돼도 괜찮습니다. 해볼 건 다 해봤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강전호의 표정은 정말 절박해 보인다. 회사 일이고 본인이 맡은 업무 가운데 하나이지만 주인 의식을 갖지 않고는 이러기 힘들다.
그러고 보니 입술이 터져 있다.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면 이럴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좋습니다. 한번 나서보죠. 언제 어디로 가면 되죠?”
“잠깐만요. 전화 통화 좀 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한 강전호가 통화를 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갔다. 이때 물 잔을 들고 온 강동호가 한마디 한다.
“전호 저 녀석 참 괜찮은 놈입니다. 어릴 때 가르쳐 봤는데 영특하기도 했구요. 배를 좋아하더니 결국 태백조선소로 간 모양입니다.”
강동호의 말에 현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와주신다니 제가 아우를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에구, 사장님도 참…….”
현수는 얼른 고개 숙이려는 강동호를 만류했다.
“강전호 씨는 프랑스 여행을 하다 우연히 만났어요. 그땐 술에 취해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지요.”
말을 하던 현수는 피식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