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최 대령은 스스로 웃긴다는 듯 웃음 짓고 있다.
현수는 이 웃음이 어이없었다. 남의 물건을 제 마음대로 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최 대령님, 저희가 이 샘플을 드리면서 뭐라 말씀드렸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글쎄요. 뭐라 했습니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천연덕스런 표정이다.
“항온 전투복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그랬나요? 글쎄, 잘 기억이…….”
최 대령은 짐짓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눈빛으론 그 소리를 들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군대의 생명은 보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도의 보안을 당부 드렸는데 다른 나라 사람에게 전투복과 전투화, 그리고 전투모까지 건네신 겁니다. 이게 보안입니까?”
현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 대령이 입을 연다.
“미군은 우리의 혈맹입니다. 그런 미군에게 정보를 제공한 겁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일입니까? 이실리프 어패럴로서는 우리와 미국 모두에게 납품하면 이득 될 일 아닙니까?”
너무도 어이없는 소리를 하기에 현수와 박근홍 사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최 대령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대신 이실리프 어패럴의 영업사원 역할을 해준 셈이니 나중에 미군에 납품하게 되면 내게 술 한잔 사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부아가 돋는 중인데 기름을 확 뿌리는 소리이다. 이에 박근홍 사장의 음성이 약간 커진다.
“뭐라고요?”
“틀린 말 아니지 않습니까? 이실리프 어패럴로서는 좋은 일 아닙니까? 근데 왜 언성을 높이십니까?”
누가 누구 사무실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적반하장이다.
현수 역시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삭였다.
“그 샘플도 모두 회수해야 합니다. 저희가 최 대령님께 드렸으니 최 대령님이 회수해 주십시오.”
“미군 군수지원사령부로 간 샘플을 내가 어떻게 회수합니까?”
“뭐라고요?”
이번엔 현수의 음성이 높아졌다.
‘이런 미친! 이 새끼 대가리엔 대체 뭐가 든 거야? 이 새끼는 군사 비밀도 미군에게 갖다 바칠 놈이잖아. 개새끼!’
현수가 속으로 욕하는 동안 최 대령의 말이 이어진다.
“그 양반은 원 스타고 난 대령이오. 이미 그 양반 손에 들어간 걸 내가 어찌 달랠 수 있겠냐는 말이오.”
최 대령은 아예 배 째라는 듯 눈을 부라린다.
현수는 잠시 분노를 삭였다. 그러는 동안 저 오만한 최 대령을 골탕 먹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전투복 누가 준 겁니까? 저희가 준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에 항온 전투복의 부작용이 뭐냐고 물으셨죠?”
“그렇습니다. 말해줘야 합니다.”
“납품을 안 해도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일단 우리 손에 샘플이 넘어왔던 거라 꼭 알아야 합니다. 게다가 혈맹인 미군에게 샘플을 준 거라 더합니다.”
‘이런 미친 새끼! 아예 미국 놈 똥구멍을 핥아라.’
속으로 치미는 분노에 의한 욕지기였다. 그리고 최 대령의 이런 반응은 현수로 하여금 미국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애써 표정의 변화를 제어했다.
그러면서 탁자 위에 놓은 항온 전투복 위에 모자를 얹고는 슬슬 문질렀다. 이에 다들 뭐하는 거냐는 표정을 짓는다.
이때 현수의 입술이 달싹인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이 항온 전투복에 쏠려 있을 때의 일이다.
“파이어 버스트!”
펑, 퍼펑! 퍼펑! 화르르르륵―!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뜨거운 불길이 곳곳에서 치솟는다.
“헉! 이게 뭐야?”
“으윽! 이, 이게 대체 왜 이러지?”
최 대령 일행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 현수는 얼른 다른 전투복으로 불길을 덮어 껐다.
“이, 이게 뭡니까?”
선진식 소령의 물음이다. 이에 현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보셨습니까? 전투모와 전투복의 안쪽이 서로 비벼지면 화염이 발생됩니다. 저희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3초 내로 전투복을 완전히 탈의하지 않으면 병사의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
셋이, 아니, 박근홍 사장까지 모두 넷이 경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폴 헐리 준장이 우리와 접촉을 시도한 것은 이런 전투복 10만 벌을 구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십만 벌……!”
최 대령 등은 예상외의 수량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우리와 상의 없이 최 대령님이 폴 헐리 준장에게 건넨 전투복과 전투모, 그리고 전투화를 가지고 미군들이 갖가지 상황을 만들어 시험하고 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
이번에도 대꾸가 없다. 현수의 말처럼 최 대령도 샘플로 받은 전투복으로 별의별 짓을 다 한 때문이다.
전투복을 입고 냉동식품 창고에 들어가 보았다. 노출된 얼굴과 손을 뺀 나머지 부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불길 센 주방의 불가에 서 있게 하기도 했다.
평범한 전투복을 입은 취사병들이 땀이 줄줄 흘리는 반면 실험 대상이 된 병사는 마냥 느긋한 표정이었다.
이밖에도 수십여 차례에 걸쳐 각기 다른 상황을 설정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반드시 군에 필요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래서 박근홍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계통을 밟아 납품해 달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계통이란 걸 명확하게 밝히진 않았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품에 하자가 있어 납품을 포기하며, 샘플 또한 모두 돌려달라기에 득달처럼 달려온 것이다.
최 대령이 생각하기에도 항온 전투복은 정말 획기적인 물건이다. 비록 의복일 뿐이지만 전투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무더운 더위와 혹독한 추위는 병사들의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전투복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일반 판매가 가능한 물건이며,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는 내내 군납을 포기하고 내수 판매를 하려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납품 과정에서 발생되는 리베이트를 한 푼도 먹을 수 없다. 그리고 신개념 전투복을 처음 도입하는 공도 사라진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그렇기에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하자를 목격했다. 하여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이다.
“샘플을 회수해 주지 않으면 미군 중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폴 헐리 준장이 아닐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폴 헐리 준장이 시원한 군복을 그냥 놔둘까요, 아님 부하들에게 입힐까요?”
“끄으응!”
최 대령은 떫은 감 씹은 표정을 짓는다. 놀람과 당혹감 때문이다.
박근홍 사장 역시 상당히 놀랐다. 전투복에서 뜨거운 화염이 발생되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애써 표정 변화를 억제하려는 듯 헛기침을 해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쐐기까지 박는다.
“저희가 실험해 본 바에 의하면 최초 3초간 발생되는 온도는 화장장에서 시신을 불태울 때의 온도와 같습니다.”
최 대령은 폴 헐리 준장이 화염에 휩싸인 장면을 연상하는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그에게 항온 전투복을 보낸 장본인이 최 대령이다.
나중에 생색내기 위해 보내는 상자에 ‘육군 군수사령부 보급처 최세창 대령 보냄’이라는 글씨를 큼직하게 쓰도록 했다.
만일 폴 헐리 준장이 비명에 횡사를 하게 되면 틀림없이 조사를 나올 것이다. 그리고 미군 장군을 죽음으로 몰아간 죄를 물을 것이다.
이실리프 어패럴을 언급하겠지만 샘플을 주면서 절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한 것을 여럿이 보았다.
그 자리엔 박근홍 사장, 김현수, 그리고 비서 아가씨가 있었다. 마지막은 얼마 전에 제대한 운전병이다.
싸가지 없는 놈이라 복무하는 동안 상당히 많이 갈궜다. 만일 놈이 앙심을 품고 사실을 고변하면 그날로 군문에서의 생활이 끝난다.
‘이런 우라질!’
최 대령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편, 곁에 있던 선진식 소령은 불길에 휩싸였던 전투복을 보고 경악한 표정이다.
최 대령은 샘플을 받아간 날 곧바로 다른 부대에 재직 중인 동기에게 그걸 보여주었다.
안 대령이라는 자는 최 대령과는 같은 부류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린다는 뜻이다.
안 대령 역시 부하들로부터 신망이 좋지 않다. 자기만 아는 지독한 이기주의에, 계급으로 깔아뭉개는 성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손바닥 비비기 신공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안 대령은 항온 전투복의 효용을 한눈에 꿰뚫었다. 그렇기에 선 소령을 파견했다. 일의 진행 과정을 직접 확인해서 보고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선 소령은 최 대령의 직속부하가 아니다. 그리고 최 대령보다는 조금 더 끝발 있는 부대 소속이다. 그렇기에 중간에 나서도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선 소령도 최 대령과 같은 과의 인물이다. 이권에 개입하여 떨어지는 콩고물 주워 먹는 게 특기이다. 그렇기에 금방 의기투합했다.
이곳에 오기 전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중 하나는 어쩌면 이실리프 어패럴이 뇌물을 쓰기 싫어 납품을 포기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투복이 아닌 티셔츠로 만들어 팔아도 대박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의 생각엔 안 될 말이다. 항온 전투복은 군에 납품되어야 하고, 중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금전적 이득을 취해야 한다.
물론 그 안엔 자신들도 포함되어야 하며, 그것에 대한 공은 자신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당연히 진급에 영향이 있다.
곧 준장 진급을 할 것이란 공공연한 소문이 번진 최 대령 입장에선 또 하나의 호재이다.
따라서 박근홍 사장이 헛소리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선 소령을 동반했다. 군대를 다녀왔으면 굳이 소속을 밝히지 않아도 눈빛 날카로운 사람들이 어디서 근무하는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까지 나머지 샘플도 회수해 주십시오. 못하신다면 저희가 폴 헐리 준장에게 직접 연락드리겠습니다. 물론 하자도 설명하구요.”
“아, 아니오. 내, 내가 회수해 주리다.”
최 대령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고 있었다.
“저흰 발생된 하자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그러시오.”
최 대령은 무얼 생각했는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선다.
“선 소령, 이만 가지!”
“네, 대령님!”
일행이 일어났기에 현수와 박근홍 사장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하자 있는 물건으로 심려를 끼쳐 드리게 돼서.”
문을 열고 나가는 최 대령의 등에 대고 현수가 한 말이다. 하지만 셋은 아무런 대꾸 없이 나가 버렸다.
그들의 등에는 현수의 차가운 시선이 꽂혀 있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어, 김 전무님, 아까 그거…….”
박근홍 사장이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전투복의 원단은 박 사장이 직접 고른 것이다.
한국군이 종전에 사용한 전투복은 폴리에스터와 면 혼방이다.
유사시 면이 심지 역할을 하고 폴리에스터가 발화 역할을 하여 군복으로선 최악의 혼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고른 원단은 내열섬유인 아라미드계 섬유와 나일론66 혼방 원단이다.
여기에 고어 가공을 해서 투습 및 방수 기능을 추가시켰다. 뿐만 아니라 적외선 관측 장비에 잘 포착되지 않도록 특수 처리까지 했다.
특별한 기능이 있는 전투복이니 이렇게 하고 제값을 받으면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항온 전투복은 비벼진다 해서 불이 붙을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분명 모자로 살살 문지르기만 했는데도 화염이 치솟았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기에 고개를 갸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