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
현수는 박근홍 사장의 생각을 읽고 싱긋 웃었다.
“그건 마술이었습니다. 불이 나게 하는 마술이지요.”
“아!”
박근홍 사장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마술사들은 교묘한 손놀림으로 이목을 속인다. 그래서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속는 게 마술이다.
“언제 마술을 배우셨습니까?”
“대학 다닐 때 마술 동아리에서 배웠지요. 호감 가는 여자를 애인으로 만들 때 아주 유용하다고 해서요.”
현수는 말을 하면서 손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그런 그의 손에는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다. 아공간에서 꺼낸 것이다.
그걸 다시 주머니에 넣고 손으로 탁탁 친다. 다음엔 안주머니를 까서 보여주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다.
“헐! 대단하십니다. 그 정도면 텔레비전에 출연하셔도 되겠네요.”
“에구, 뭘 이것 가지고. 마술 동아리에 가면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거예요.”
“아! 그런 겁니까?”
박근홍 사장은 완전히 마음을 푼 듯하다.
‘에구, 이것도 못할 짓이군.’
현수는 내심 실소를 지었다.
“미군에게 간 전투복이 오면 받아만 두십시오.”
“그럼요. 그나저나 점심땝니다. 아내가 도시락을 싸줬는데 같이 드시지요.”
“네? 아, 아닙니다. 사장님 드실 걸 제가 왜…….”
“밥은 넉넉합니다. 요즘 거의 매일 손님을 만나기에 아내가 항상 2인분씩 싸주거든요.”
박근홍 사장이 탁자 아래 있던 찬합을 꺼내며 뚜껑을 연다. 과연 그의 말대로 1인분은 아니다.
“오늘은 김밥이군요. 잘되었습니다. 같이 드십시다.”
“네, 그럼 염치 불구하겠습니다.”
탁자엔 김밥과 유부초밥이 든 찬합이 각각 한 개다. 이밖에 각종 반찬을 담은 찬합이 하나 있고, 보온병에 담아온 된장국이 있다.
네 명은 충분히 먹을 분량이다.
“냠냠! 사모님 음식 솜씨가 좋군요.”
음식의 맛은 간에 있다. 재료가 몇 가지 없더라도 간이 딱 맞으면 맛있게 느껴진다.
현수는 먹던 김밥을 유심히 살폈다. 안에 어떤 재료를 얼마만큼 넣는지를 확인해 본 것이다.
‘아르센에 김밥을 퍼뜨려? 참, 거긴 김이 없구나.’
현수는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이 김밥 먹는 장면을 상상하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다.
‘아르센에선 카이로시아와 로잘린 모두 데리고 살아도 되는데 왜 여긴 안 되지? 왜 지현 씨와 연희 씨 중 하나만 골라야 하지?’
일부일처제인 사회 구조가 원망스러운 순간이다.
‘쩝, 100년 전만 해도 이 땅엔 3처 4첩을 거느린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쉽구나.’
박근홍 사장은 배가 몹시 고팠는지 김밥과 유부초밥을 말 그대로 흡입하고 있었다. 왜 음식 양이 많았는지 이해되는 순간이다.
현수는 천천히 음미하며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자 커피를 내온다.
‘이 커피가 사람 몸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고 했지?’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커피는 천연 항산화제로 알려져 있다. 변비와 치아 우식6)을 예방해 주고 통풍7)의 위험도도 낮추기 때문이다.
다른 탄산음료에 비해 페놀류를 많이 함유하고 있어 노화 예방 및 세포 산화 방지작용을 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커피는 단기 기억을 증진시켜 준다. 시험 공부하는 동안 마신 커피가 점수를 올려준다는 뜻이다.
이밖에 여성의 경우는 피부암 발병률 20% 감소, 뇌졸중 확률 최대 25% 감소, 우울증 걸릴 확률을 20%나 줄여준다는 결과도 있다.
남성은 전립선암으로 인한 사망을 60%나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또한 커피는 다이어트에도 일조한다. 카페인이 지방 분해 효소인 리페이스8)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숙취 해소에도 작용한다.
간에서 알코올이 분해될 때 생기는 아세트알데히드9)의 분해를 촉진시킴과 동시에 신속히 체외로 배출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커피에 함유된 폴리페놀은 동맥경화의 발생 및 진행을 예방한다.
이밖에도 대장암(결장암), 자궁암, 간암, 2형 당뇨병 등도 예방하는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커피는 몸에 매우 좋은 기호식품이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각성 효과로 인한 수면 방해를 하며, 임산부가 마실 경우 저체중아와 태아 빈혈을 유발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칼슘 흡수를 방해하여 골밀도를 저하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커피만의 쓰고 떫은맛을 내는 타닌이라는 성분의 검정 색소는 구강에 남아 있는 단백질과 결합하여 치아에 착색된다.
특히 뜨거운 커피는 치아 표면의 미세한 구멍의 흡수를 빠르게 하여 치아 착색을 더 빠르게 진행시킨다.
그리고 입 냄새의 주범 중 하나이다.
“흐음, 이것들만 해결되면 좋은데…….”
이실리프 농산에서는 국내 소비량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커피를 생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치아 착색을 막는 건 마법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아직 해결책을 찾지 못한 것이다.
* * *
“어서 오십시오. 이쪽입니다.”
로비에 들어서자 강전호가 반색을 하며 맞아들인다.
“세바스티앙이 이 호텔에 머물러요?”
“네, 지금은 나카무라 쇼헤이와 면담 중입니다.”
“아! 오시마조선소의 전무라는 사람이요?”
“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미치겠습니다.”
“그렇군요.”
현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남의 회사 일이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앙은 제가 오는 걸 알고 있나요?”
“네, 얘기했더니 아주 반색을 하더군요. 그래서 역시 김 전무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에구, 별 기대 마시라니까요.”
“그래도요. 참, 커피숍으로 가시죠. 저희 전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저희를 위해 시간을 내주셨으니 차라도 한 잔 대접하는 게 도리라면서 꼭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표정을 보니 안 가면 나중에 권철 전무라는 사람에게 한소리 들을 것 같다.
“뭐, 그럽시다.”
강전호의 안내를 받아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우정훈과 박창민이다.
그들의 곁에는 중후한 분위기의 중년 신사가 서 있다.
“어서 오십시오. 태백조선소의 권철 전무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천지건설 김현수라 합니다.”
명함을 주고받고 자리에 앉았다.
“신문에서 뵈었는데 이렇게 보니 훨씬 어려 보이는군요.”
“네에, 제가 좀 동안입니다.”
11장 된 사람이 이러면 안 되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더군요. 그래서 저희 회장님께서 왜 이런 인재를 뽑지 못했느냐고 한 질책 들었습니다.”
“하하, 네에.”
현수는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어 넘겼다.
하지만 방금 권 전무가 한 말은 사실이다. 현수의 기사를 읽은 태백그룹 회장은 그룹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곤 지난 3년간 그룹에 지원했던 지원자들의 원서를 확인토록 했다. 백두그룹에서 그러했듯 현수가 지원했는데 떨어뜨린 회사가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수는 태백그룹 계열사에 원서를 넣은 적이 없다. 삼류 대학 수학과 출신은 뽑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태백그룹에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입사 지원자들의 출신 대학을 기록하는 난을 과감하게 없애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 붙이는 것도 없앴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신입사원을 선발하겠다는 것이다.
현수 덕에 삼류 이하의 대학에 다니거나 졸업한 사람들에게 취업문이 넓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혜택이 주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불황이라 신입사원을 거의 뽑지 않기 때문이다.
권철 전무는 웃음 띤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잘 부탁드립니다. 놈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거나하게 한잔하지요.”
자신보다 훨씬 어리다는 것을 알지만 권철 전무는 말을 낮추거나 깔보지 않았다. 천지건설 역시 재벌의 계열사이고 능력으로 당당하게 전무 자리를 꿰찬 것에 대한 예의이다.
“하하, 네에. 그러지요. 저도 술 좋아합니다.”
“네, 좋은 데 예약해 놓겠습니다.”
“여기 있는 강 과장님과 우 과장님, 그리고 박 과장님도 함께 가는 거죠?”
현수의 시선이 미치자 강전호와 우정훈, 그리고 박창민은 웃는 낯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요 며칠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에 체한 것 같은 기분이었던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넥타이 풀고 진탕 마셔도 됩니다.”
권 전무가 환히 웃는다. 현수의 말에서 이번 일이 순조롭게 풀릴 거라는 예상을 한 모양이다.
사실 현수에겐 세바스티앙 따위를 주무르는 건 일도 아니다.
어팬시브 참 마법에 걸려 있는 상태이니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번거로운 일에 나선 것은 물론 강전호 과장 때문이다.
회사 일을 진심으로 내 일로 여기는 직원은 찾기 힘들다. 그런데 강 과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 도와주고픈 마음이 인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태백그룹에서 제철과 항공, 그리고 철도와 기계, 증권과 섬유업 등을 하는 것을 상기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현수는 거의 산업 전반에 대한 추천권을 부여받았다. 이 중에는 지나의 업체가 시공하던 것을 이어야 하는 것도 있다. 그중 하나가 철도 사업이다. 기존 철도를 개보수해야 하는 것도 있고, 노선이 신설되는 것도 있다.
현수는 철도 관련 임원을 소개해 달라는 말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전호가 시간이 되었다는 몸짓을 한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한 곳은 세바스티앙이 머물고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 오랜만이네요.”
“아! 무슈 킴! 네, 반갑습니다.”
베아트리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살갑게 미소 지었다.
“세바스티앙 부회장님은 안에 계신지요?”
“네. 그런데 지금은 오시마조선소의 나카무라 쇼헤이 전무와 말씀 중이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지요.”
소파에 앉아 실내를 둘러보았다. 비싼 돈을 받을 만큼 인테리어가 훌륭했다.
“강 과장님, 미스 베아트리체와의 연애 전선은 괜찮은 거죠?”
“네? 아, 네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강전호는 쑥스러운 듯 웃음 짓는다. 사실 베아트리체와 전호는 상당히 사이가 좋아졌다.
현수가 준 반지 덕분이다. 참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고, 그 대상은 그 반지를 건네는 사람이 되도록 한 바 있다.
그렇기에 강전호를 약간 무시하던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변했다. 갑자기 매력 있는 남자로 느껴진 때문이다.
그 호감으로 인해 둘은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아직 깊은 사이가 된 것은 아니다. 님을 봐야 뽕을 딸 것 아닌가!
수주 계약이 성사된 이후 강전호는 계속 한국에, 베아트리체는 프랑스에 머물렀다. 이따금 전화 통화만 했으니 어찌 전향적으로 관계가 좋아지겠는가!
그러던 중 드디어 어제 둘은 데이트를 했다.
전호는 명동으로 안내했다. 그리곤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맛있는 음식도 먹었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보았다.
딱 한 번의 데이트였지만 그 결과 눈빛이 달라졌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장래의 희망 등을 조리 있게 이야기한 때문이다.
“제가 보기에도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잘해보세요.”
“하하, 네에.”
여전히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는다.
이때 베아트리체가 문을 열고 나온다. 그의 뒤로는 세바스티앙이 웃는 얼굴로 따라오고 있다.
“오오! 무슈 킴! 오랜만입니다.”
“네, 무슈 세바스티앙. 그동안 잘 있었지요?”
“하하! 물론입니다.”
“모처럼 한국에 오셨다고 해서 무작정 만나 뵈려고 왔는데 손님이 계신 모양입니다.”
“네, 오시마조선소의 전무랑 이야기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끝날 겁니다.”
“네에, 그러십시오.”
현수가 왔다는 소리에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나온 모양이다. 곁에 있던 강전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