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현수를 데리고 오면 뭔가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세바스티앙의 표정과 몸짓을 보니 생각보다 쉽게 뜻대로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가 다시 소파에 앉자 베아트리체가 커피를 내왔다.
“언제 들어도 무슈 킴의 불어는 일품이에요. 프랑스에서 유학 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한국에서 독학한 겁니다.”
“네에? 정말요? 믿기지 않아요. 독학으로 어떻게 프랑스 사람과 똑같이 말할 수 있는 거죠?”
눈을 크게 뜨니 인형이 따로 없다. 과연 강전호가 혹할 만하다.
흘깃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의 미소가 빛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것 참, 어팬시브 참을 한 번 더 써야 하나?’
현수는 둘이 확실하게 맺어지도록 해야 하는지를 고심했다. 전호야 열렬하게 베아트리체를 원하고 있다.
그럼 그녀는 어떤지 살펴야 한다. 원하지도 않는데 마법을 써서 어느 한쪽만 좋게 하는 일은 벌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강 과장님, 제 발음이 정말 베아트리체 양의 칭찬을 받을 만한 건가요?”
“그럼요. 제가 들어봐도 파리 본토박이와 똑같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에구! 그거 괜한 칭찬이죠?”
“아닙니다.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 제 말이 틀렸습니까?”
“어머! 아니네요. 무슈 강의 말처럼 무슈 킴의 불어는 정말 대단해요. 그죠?”
현수는 순간 둘이 눈빛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참 마법이 인챈트된 반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전호에게 깊은 호감을 보이고 있다.
이때 문이 벌컥 열린다.
“하하! 저는 오머런 부회장님만 믿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귀국하시기 전에 감사의 뜻으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크게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래도 힘은 써보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카무라 쇼헤이는 룸을 나서면서 현수를 힐끔 바라본다. 대화 도중에 양해를 구하고 나갈 만큼 대단한 인물 같지는 않다.
그런데 왠지 낯이 익다는 느낌이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카무라가 나가자 세바스티앙이 과장된 몸짓으로 현수를 끌어안는다.
“그동안 무슈 킴을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와서야 대단한 일을 한 영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길 듣고 싶은데 해주시겠습니까?”
한국 신문에 실린 기사 중 굵은 글씨만 누군가가 번역을 해준 때문이다. 하긴 영어만 우선하는 한국 사회이니 불어로 유창하게 번역해 줄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같은 순간 베아트리체 역시 현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강전호로부터 이야길 들어 초고속 승진과 더불어 막대한 보너스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 그 내막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거 제 입으로 말하긴 조금 쑥스럽네요. 그래도 관객이 원하니 해야겠죠? 우선 자리에 앉읍시다.”
현수의 손짓에 따라 모두들 소파에 앉았다. 관객은 세바스티앙과 베아트리체, 그리고 강전호이다.
현수는 천지건설에 입사한 것부터 이야길 했다. 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탄식과 환성을 교차시켰다.
클라이맥스가 되어 잉가댐 전투 상황을 설명하면서 총을 쏘는 시늉을 하자 손에 땀을 쥔 채 긴장된 표정이다.
그러면서 현수의 몸에 혹시 상처 난 데는 없는지를 살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최종적으로 비너스 호텔 총격 사건이 설명되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한 나라의 수도에서 벌어진 교전치고는 너무 격렬하게 묘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장하거나 뻥을 친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조금 실감나게 설명했을 뿐이다.
긴 이야기가 끝나자 세바스티앙과 베아트리체가 숨을 몰아쉰다. 너무 깊숙이 몰입해 있었던 때문이다.
“정말 대단합니다. 무슈 킴과 알게 된 게 영광일 정도로!”
세바스티앙의 극찬에 현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저도요. 너무 멋져요.”
베아트리체가 한마디 하자 강전호가 우려 섞인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러다 현수에게 빼앗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칭찬해 줬다고 제 애인에게 전해줄게요.”
현수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베아트리체가 배시시 웃음 짓는다. 워낙 영리하니 무슨 뜻인지 금방 깨달은 것이다.
“무슈 킴, 우리 회사로 자리 옮길 생각 없어요? 나는 곧 회장이 될 것 같은데 지금 내 자리 어때요?”
세바스티앙이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다.
“제안은 고맙지만 전무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조금 더 있어봐야겠네요. 나중에 그 자리 달라면 그때 주세요.”
“하하! 물론이오.”
파안대소를 하며 즐거워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의 대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현수가 강전호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자리를 비워달라는 뜻이다.
“미스 베아트리체, 뭐 시원한 거 없어요?”
“네? 무슈 강, 목 말라요?”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두 분도 그렇지 않겠어요?”
“네, 알았어요.”
베아트리체가 나서자 전호가 뒤따라 나간다. 세바스티앙은 그런 둘의 모습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무슈 세바스티앙, 결혼하셨죠?”
“그럼!”
“그럼 애들은요? 아들? 딸?”
“아들 하나에 딸만 둘이오.”
세바스티앙은 현수에게 보여주겠다는 듯 탁자 위에서 가족사진이 든 액자를 뒤로 돌린다.
“아이가 있는 걸 보니 결혼한 자식이 있나 봅니다.”
“우리 아들이 2년 전에 결혼을 했지. 올해 연말엔 큰딸아이도 결혼시킬 생각이네.”
세바스티앙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진 속 인물을 보니 20대 중반은 넘은 듯 보인다. 자세히 보니 제법 미인이다.
“따님이 미인이네요.”
“하하, 고맙네. 제 어밀 닮아서 어디 빠진다는 소리는 듣지 않지.”
자식을 칭찬해 주는데 기분 나빠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세바스티앙도 다르지 않다.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히 웃는다.
“근데 그거 알아요? 다이안의 서연이 올해 스물한 살이라는 거.”
“……!”
현수의 느닷없는 말에 세바스티앙이 대꾸하지 못한다.
“당신의 딸에게 아버지보다도 나이 많은 어떤 남자가 하룻밤 상대로 지목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끄으응!”
노회한 세바스티앙은 현수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어펜시브 참이라는 마법에 걸려 현수에 대해 지독한 호감을 가지게 된 거지 멍청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 과장이 서연에게 연락을 했다더군요. 근데 그거 알아요?”
“……?”
“서연이 내 친척 여동생이란 걸.”
“Vraiment?”
세바스티앙의 눈이 몹시 커진다. 진짜냐는 뜻이다. 물론 아니다. 현수는 서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한국인은 한 민족이니 따지고 보면 먼 친척일 수도 있다.
“좋은 마음으로 후원을 해준다면 존경의 뜻은 보내겠지만 하룻밤 상대를 위한 스폰서가 되는 건 분명 거절할 겁니다.”
“끄으응!”
세바스티앙은 대답 대신 침음을 냈다.
“아름다운 꽃은 감상하는 거지 꺾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솔직히 내 과욕임을 인정하지. 그 뜻을 접겠네. 자네의 충고, 고맙네.”
“이렇듯 흔쾌히 인정하는 걸 보니 당신은 된 사람입니다.”
“된 사람? 그게 무슨 뜻인가?”
“한국에서는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이란 말을 가르칩니다. 난 사람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그럼 든 사람과 된 사람은?”
“든 사람은 학식이나 경륜이 풍부한 사람이고, 된 사람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 가르칩니다.”
“된 사람!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
세바스티앙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을 곱씹었다. 이때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네,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이셨으니 무슈 세바스티앙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신과 같이 있는 이 시간이 즐겁습니다.”
“그런가? 하하! 그 칭찬, 기분이 좋군. 고맙네.”
“뭘요!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세바스티앙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다.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임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나저나 한국에서의 일은 언제 끝납니까?”
“그건 왜……?”
“이곳은 제 홈그라운드입니다. 귀빈이 오셨으니 맛있는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면 어떨까 해서 그러지요.”
“그럼 무슈 킴이 저녁을 사는 건가?”
“물론입니다. 아름다운 베아트리체 양과 같이 모시고 싶습니다.”
현수의 이 말은 혹시라도 여자가 나오는 술집을 기대할까 싶어 미연에 차단하는 뜻이다.
세바스티앙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파안대소한다.
“하하! 좋네. 기대하지.”
“근데 일이 끝난 다음에 자리를 함께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하! 무슨 뜻인지 알겠네. 큰 하자만 없다면 오늘 태백조선소의 기본 설계 도면에 대한 승인을 하지.”
역시 노회한 사업가임이 틀림없다. 현수는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럼 오늘 저녁 시간을 비워주셔야겠습니다.”
“물론이네. 무슈 킴이 사는 저녁, 몹시 기대되네.”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현수가 문을 나서자 베아트리체와 전호의 시선이 쏠린다. 현수는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으로 성공 여부를 알렸다.
전호는 몹시 기뻐했고, 베아트리체 역시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자신의 상관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남의 애를 타게 하는 모습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 오늘 저녁은 내가 삽니다. 저녁 시간을 비워주십시오.”
“어머, 그래요? 호호, 고마우셔라. 알았어요, 시간 비워둘게요.”
잠시 후 현수와 전호는 권철 전무와 마주 앉아 있다.
초조한 심정으로 머물던 룸 안에는 여러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태백조선소에선 기본 설계 도면 전체를 가져온 모양이다.
“권 전무님, 지금 올라가면 바로 승인해 줄 겁니다. 그리고 다이안의 서연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며칠간 권철 전무는 말도 안 되는 세바스티앙의 요구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그 까다롭던 녀석이 단번에 승인해 준다고 하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하여 허리까지 굽실거리면서 감사의 표시를 한다.
태백조선소 직원들이 서류를 갖추는 동안 룸 밖으로 나온 현수는 삼청각에 전화를 걸었다.
창밖 풍경이 보이는 수국B라는 룸과 궁중수라 4인분을 예약했다. 1인분이 세전 및 봉사료 미포함 가격으로 18만 원이나 하지만 기꺼운 마음이다.
태백조선소와의 일은 매듭이 지어진 상황이지만 친구인 김상렬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세바스티앙의 CMA 오머런과 김상렬의 신세계마리타임 간에 업무 협조할 일도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생각난 김에 상렬과 통화를 했다.
CMA 오머런과 제휴하면 좋을 일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면서 반색한다.
CMA와 손을 잡게 되면 신세계마리타임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효과가 있다면서 꼭 그렇게 되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하여 농담으로 들어갈 비용을 청구하겠다고 하니 상렬이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민주영과 이은정, 그리고 김수진과 이지혜가 생각난다. 천지건설의 전무이사가 된 후 크게 한턱내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하여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약속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주영과 은정은 상관없는데 수진과 지혜가 얼마 전부터 만나기 시작한 남자친구와의 더블데이트가 있다고 한다.
밥을 사주겠다고 하니 얼씨구나 한다. 하여 창밖 풍경이 보이는 난초A룸과 궁중수라 6인분을 예약했다.
예약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서니 강전호가 환한 웃음을 짓는다. 눈 아래 시커멓던 다크서클이 조금 엷어진 것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