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
“김 전무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시름을 덜었습니다.”
“하하, 네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저랑 차나 한잔하시지요.”
“그럴까요?”
둘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전무님,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뭡니까?”
“네?”
“세바스티앙이 서연을 후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아, 그거요? 그건 단순한 후원입니다. 소속사 아시지요?”
“태백음료 CF모델이니 그거 알아내는 건 문제도 아닙니다.”
“그럼 소속사에 연락하셔서 결연을 맺어주세요. 신문을 보니 인기 있는 가수지만 연예 활동을 해도 돈을 못 버는 수가 있다고 하더군요.”
“네?”
“음반을 낼 때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면 연예인에게 지불되는 게 하나도 없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죽어라고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말이죠.”
“……?”
“신문에서 본 거라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음반 제작비, 활동비, 런칭비 등등이 너무 많이 들어서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그렇지 못한 가수들이 많다고 합니다.”
“……!”
“서연에게 세바스티앙이 직접 후원을 한다면 화제성도 있고 해서 다이안이라는 그룹 자체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겠죠. CMA 오머런은 세계적인 해운사거든요. 그 회사의 CEO가 한국의 걸 그룹을 후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다이안은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게 되겠죠. 근데 정말 그래도 됩니까?”
강전호는 여전히 서연을 어찌해 보려는 세바스티앙의 속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아까까지만 해도 당장 하룻밤 상대로 들이라는 노골적인 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세바스티앙은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서연을 한번 만나게는 해주십시오. 후원을 받고도 안 그러면 속상해할 테니 말입니다.”
현수의 말대로 세바스티앙은 서연에 대한 감정을 없앤 것이 아니다. 사람 마음이 어찌 말 몇 마디에 그렇게 되겠는가!
너무 좋아서 하룻밤 품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 마음을 접었지만 서연이 좋은 건 여전하기에 후원할 결심을 한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추진하지요. 참, 세바스티앙 부회장으로부터 다른 얘기는 못 들으셨습니까?”
“다른 얘기라니요?”
“베아트리체가 그러는데 오시마조선소가 뭔가 획기적인 제안을 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네. 우리랑 계약하기 전에 그 조건을 내놨다면 어쩌면 이것저것 살필 것 없이 무조건 그쪽과 계약할 만큼 좋은 조건인 것 같다고 합니다. 혹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들은 건 없습니까?”
“흐음, 그런 얘기는 못 들었습니다. 알아봐 줘요?”
“아이고, 아닙니다. 서연 양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순조롭게 기본 설계 승인 받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진데 어찌…….”
현수의 예상대로 강전호는 염치가 뭔지를 아는 남자이다. 이러면 더 해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따 세바스티앙과 저녁 먹기로 한 거 알죠?”
“그럼요.”
“그때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슬쩍 떠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 식대는 저희가 내겠습니다.”
“누가 내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따 여섯 시 반에 삼청각에서 만나요. 전호 씨가 세바스티앙이랑 베아트리체를 안내하시면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수는 좋은 기분으로 호텔을 나섰다. 그리곤 곧장 이실리프 어패럴로 향했다.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들어서이다.
“누구십니까?”
“엥? 누구냐뇨? 그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현수는 어이없게도 이실리프 어패럴이 사용하는 건물의 로비에서 낯선 이들의 제지를 받았다.
“우리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습니다. 이 건물의 누구를 왜 만나러 오셨는지 용무를 밝혀주십시오.”
말하는 투나 생김으로 짐작컨대 눈앞의 사내들은 군인이다. 항온 전투복과 관련되어 온 자들인 듯싶은데 몹시 무례하다.
“난 이실리프 어패럴의 대주주이고, 대표이사인 박근홍 사장을 만나러 온 사람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더라도 이곳에 잠시 계셔줘야겠습니다.”
“뭐요?”
“지금 박근홍 사장님은 우리 사장님과 대화 중이십니다. 그 대화가 끝날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러 주셔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거 보세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댁들 사장님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래도고 저래도고 저흰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사장님이 대화를 마치실 때까지는 절대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다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몹시 위압적인 어투와 표정이었다. 당연히 화가 난다.
현수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당신이 왜 막아?”
“이러다 다치는 수가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듣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이런 시러배 잡놈이 어디서……!”
분노가 폭발한 현수가 놈의 손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주먹이 날아온다.
하지만 명색이 소드 마스터이다. 지구상의 어떤 사내도 완력으론 현수를 당해낼 수 없으며, 속력 또한 따라잡을 수 없다.
턱―! 퍼억!
“크윽!”
사내의 주먹을 막아냄과 거의 동시에 다른 주먹으로 놈의 배를 가격했다. 주먹에 사정을 두지 않았으니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낄 것이다.
놈이 신음을 내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순간 곁에 있던 두 녀석이 주먹과 발을 휘두른다.
어찌 이에 맞겠는가!
침착하게 놈들의 공격을 막음과 거의 동시에 두 녀석에게도 주먹의 쓴맛을 보여주었다.
쉬이익―! 파팍! 퍼퍼퍽!
“캐액! 끄윽!”
딱 한 방씩이다. 하나는 관자놀이를 맞아 거품을 내며 기절했다. 옆구리를 가격당한 놈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며 고꾸라진다.
현수가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홀을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 있던 여섯 녀석이 우르르 달려들고 있다.
“그리스!”
찌익! 와당탕탕! 꽈당! 와당탕!
갑작스레 바닥에서 마찰력이 사라지자 여섯 놈 모두 나뒹군다. 하지만 이내 일어나려 한다. 그러나 마찰력이 0이 된 곳에서 일어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와당탕! 꽈당! 꽈당탕!
계속해서 엎어지고 쓰러지는 모습은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현수의 입가엔 웃음이 전혀 배어 있지 않다.
한겨울의 싸늘한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놈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놈들은 일어서려 애를
쓴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퍽! 퍼퍽! 퍼억!
“캑! 크악! 아악!”
“이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뭔가 말을 하려던 녀석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현수의 발길질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귓가로 현수의 음성이 들린다.
“니들이 누군진 내 알 바 아니지. 다만 남의 집에 와서 예의를 갖추지 않는 새끼들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수의 발길이 놈의 옆구리를 강력하게 가격한다.
퍼억―!
“커억!”
상상도 못했던 격통인지 눈을 크게 뜬다. 그러곤 뭔가 말을 하려는데 그게 안 되는 모양이다.
“다음부턴 남의 회사에 와서 주인을 건드리는 짓 따위는 하지 마라. 알았냐?”
현수는 가볍게 나머지도 처리했다. 죽였다는 게 아니라 한 방으로 기절시켰다는 뜻이다.
쓰러진 놈의 품을 뒤졌다. 신분을 알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짐작 가는 녀석이 있다.
“먼저 건드렸으니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박근홍 사장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땡―!
“누구냐?”
예상대로 앞을 가로막는 녀석이 둘 있다. 현수는 가볍게 응수했다.
“나? 이 회사의 대주주! 안에 들어가야겠어.”
“뭐? 어떻게 여길……? 밑에서 아무런 얘기 못 들었나?”
현수가 스물다섯 살로 보여서인지 대놓고 반말이다.
“들었지. 못 들어간다고 하더군.”
“그런데 어떻게 올라왔지?”
“이렇게!”
퍼억! 퍼억!
둘 다 관자놀이에 한 방씩 맞고 그대로 쓰러진다.
털썩! 털썩!
하나는 주먹에, 다른 하나는 발에 맞아 기절한 것이다.
똑똑!
벌컥―!
노크를 하곤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박근홍 사장이고 다른 하나는 예상대로 선진식 소령이다. 그런데 박 사장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자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인다.
아마도 선 소령의 상관일 것이다.
“아! 김 전무님, 어서 오십시오.”
심리적 압박 때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박근홍 사장은 현수의 출현에 반색한다.
“무슨 일입니까?”
“선 소령! 누구지?”
“네, 이 회사의 대주주인 김현수 씨입니다. 천지건설 전무이사이기도 하고요.”
“그래? 내가 분명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이지?”
상당히 고압적인 어투이고, 자신의 명령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짜증난다는 표정이다.
남의 집에 와서 주인 행세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기에 현수도 짜증난다는 음색으로 말을 했다.
12장 제조법 내놔!
“밖에 있던 놈들이라면 내가 다 재워놓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쪽 신분은 뭐지요?”
놈은 현수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선 소령을 바라본다.
“…확인해 봐.”
“확인하긴 뭘 확인합니까? 여긴 내가 대주주로 있는 회삽니다. 무슨 용무로 온 거지요? 그리고 신분부터 밝혀요.”
“뭐해? 어서 확인해!”
놈이 짜증내자 선 소령이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좋은 말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 사장님,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그, 그러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박근홍 사장은 주춤거리기만 할 뿐이다. 뭔가 협박을 당하거나 약점을 잡힌 모양이다.
“잠시만 비켜주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네, 알겠습니다.”
박 사장이 나갈 때까지 놈은 현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주 갈가리 찢으려는 기세이다.
쿵―!
사장실 문이 닫혔지만 놈은 여전히 노려보고만 있다.
“내가 조금 전에 신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없군요. 나보다 연장자인 것 같아 예를 갖췄습니다만 이제부턴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러니 순순히 신분을 밝히세요.”
“……!”
대답이 없자 현수는 핸드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구현시켰다.
“신분이 뭐라고? 왜 남의 사무실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은 거지? 대답 안 해?”
“…너 이러고도 편히 살 수 있을 거 같아?”
“어쭈! 권력이라도 쥐고 있나 보지? 얼마나 대단한 권력인데? 그리고 당신이 뭔데 협박하는 거지?”
“죽을 수도 있다.”
“오호! 이제 아예 목숨까지? 제대로 협박하는 거지, 지금? 그러니까 더 궁금하네. 넌 대체 뭐하는 자식이지? 뭘 얼마나 해먹고 싶어서 우리 회사에 온 거야?”
“……!”
갈아 마시고야 말겠다는 듯 표독한 눈빛이다.
“너 같은 새끼가 권력을 쥐고 있으면 안 되지. 안 그래? 괜히 애먼 사람 협박이나 하고 그러잖아. 그치?”
“너 이 새끼……!”
사내가 품속에 손을 넣는다. 아까부터 지켜봐서 알지만 지금 놈은 권총을 꺼내려는 것이다. 어찌 그냥 놔두겠는가!
놈의 품에서 권총이 나오기도 전에 현수가 당도했다.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에 당황한 표정이다. 그 순간 현수가 먼저 놈의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대체 품 속에 뭘 넣고 왔기에 그래? 어디 보자. 어쭈! 이거 권총이네. 지금 이 걸로 날 쏘려고 했던 거야?”
현수는 권총을 꺼내 실탄이 장전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곤 안전장치를 풀고 총구를 놈의 관자놀이에 댔다. 움찔하는 기색이다.
“이거만 당기면 내가 지옥에 가는 거였어?”
현수는 말을 하며 핸드폰의 녹음 기능이 구현되는 중이라는 걸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