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백회, 곡빈, 견정, 풍시, 현종, 삼리, 곡지, 중완, 기해, 관원혈에 해당하는 곳이다.
가느다란 침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겁내는 표정이더니 네 번째부터는 편안한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궁금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효능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현수는 침을 놓으면서 이곳에 침을 놓으면 어떤 효능이 있는지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곡빈혈에 침을 놓을 때는 몸 옆면을 흐르는 담 경락을 활성화시키고, 편두에도 음전기를 생성시켜 준다는 말을 했다.
물론 못 알아듣는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후 침을 뽑았다. 그리곤 강전호를 바라보았다.
“강 과장님.”
“네, 전무님.”
현수가 아주 능숙한 한의사처럼 시침하고 회침하였기에 전호는 새롭다는 느낌으로 바라본다.
“태백조선소에서 무슈 세바스티앙에게 방한 선물을 선사할 예정이지요?”
“그렇습니다.”
굳이 감출 비밀이 아니기에 전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처방전을 하나 써드리겠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게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그러겠습니까?”
“네, 그러지요.”
현수와 전호는 부러 프랑스어로 대화를 했기에 세바스티앙은 고맙다는 뜻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현수는 A4 용지를 꺼내 중풍에 좋은 처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약재의 명칭과 용량 등을 자세히 기록하곤 그걸 건넸다.
“이건 한 번 쓰고 버리지 마시고 복사해 두세요. 약 한 번 먹는다고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병이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무슈 세바스티앙, 한의학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전통 의학으로 국내에선 이미 검증이 된 겁니다. 그리고 한약은 100% 천연물을 조합하여 조제하는 겁니다. 약을 복용하는 동안 지켜야 할 사항이 있으니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현수는 꼼꼼하게 주의사항을 기록하였다. 이번엔 불어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걸 베아트리체에게 넘겼다.
“부회장님은 이걸 모두 지켜야 합니다. 아셨죠?”
“물론이에요.”
“그럼 이제 난 괜찮아지는 건가?”
“아마도요. 그리고 규칙적인 운동과 식이요법도 병행하여야 합니다. 백 살까지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래, 그러겠네.”
현수의 농담에 굳었던 세바스티앙의 얼굴이 비로소 펴
진다.
“마드모아젤도 진맥 한번 해볼까요?”
“정말요?”
베아트리체가 손목을 내민다. 이번에도 눈을 지그시 감고 맥진을 하였다.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는 생리 불순이군요.”
“어머! 그걸 어떻게……?”
베아트리체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다. 하긴 손목만 잡아보고 정확히 짚어내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 그래요. 자궁을 포함한 하복부에 많은 열이 몰리게 되면 열기로 인해 수분이 말라붙듯이 자궁 내 환경이 척박하게 변하고 어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생성된 어혈로 인해 자궁 기능에 이상이 온 거지요.”
“크, 큰 병인가요?”
불안한 표정이다.
“큰 병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문제는 베아트리체 양이 태양인이라는 겁니다. 아! 이건 사상 의학으로 볼 때…….”
현수는 태음, 태양, 소음, 소양인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했다.
“그래서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얼마 전 베아트리체는 정기 검진을 받았다. 그때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들었는데 뭔가 이상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자궁 기능 부전으로 인해 난임 될 확률이 높습니다.”
“난임이 뭐죠?”
“임신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겁니다.”
“……! 얼마나 어려운데요?”
“정확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굳는다.
유난히도 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결혼만 하면 최소한 셋은 낳으리라 마음먹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영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확률이 높다니 어찌 마음이 좋겠는가!
곁에 있던 강전호 역시 표정이 좋지 않다. 베아트리체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침 좀 맞고 한약을 달여 먹으면 나아질 겁니다.”
사실은 상당히 안 좋은 상태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서 좋을 게 무어 있겠는가! 마음이 무거우면 질병이 쉬이 낫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에 부러 중하지 않다 한 것이다.
“그럼 나아질까요?”
걱정스런 표정이다. 하여 현수는 싱긋 웃어주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한데 여기선 침을 놓기에 조금 그렇습니다. 일단 호텔로 가죠.”
일행은 그 즉시 머물던 호텔로 되돌아갔다. 현수는 베아트리체로 하여금 소파에 눕게 하고는 침통을 열었다.
전호와 세바스티앙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침을 했다. 이번에도 수지침이다. 하지만 세바스티앙을 시침할 때엔 약간 다르다.
침을 통해 마나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단번에 생리 불순을 제거할 정도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렇듯 야박하게 한 것은 생명에 위험을 주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함이고, 전호와의 연락이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시침을 하고는 처방전을 적어 전호에게 건넸다. 베아트리체에겐 불어로 된 복약 설명서와 주의할 점들을 기록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베아트리체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뾰족한 침으로 몇 번 찔린다 하여 뭐가 달라질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침만 맞았음에도 몸이 훨씬 편안하다. 여기에 정성 들여 달인 한약까지 먹으면 정말로 많이 좋아질 것 같다.
그래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다.
“베아트리체 양, 약은 꼭 시간 맞춰 먹어야 하는 거 알죠?”
“네.”
“많이 쓸 거예요. 너무 쓰면 약을 먹은 후 사탕을 먹어도 돼요.”
“알았어요.”
베아트리체가 환히 웃자 세바스티앙이 눈짓으로 묻는다. 이에 자신이 느낀 바를 설명하니 놀라는 표정이다.
“혹시 난 효과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닌가?”
“하하, 그럴 리가요. 베아트리체 양과 증상이 다르니 느끼는 바도 다른 겁니다.”
“그렇다면 안심이네.”
세바스티앙이 이제야 마음 놓인다는 듯 푸근한 웃음을 짓는다.
“무슈 세바스티앙, 베아트리체 양이 한약 짓는 곳을 직접 견학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직접?”
“어떻게 만드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야 그럴 것이오.”
세바스티앙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수는 강전호를 바라보았다.
“강 과장님, 베아트리체 양과 한약을 주문하러 다녀오시지요.”
“지금이요?”
저녁 식사까지 마친 시간이다. 당연히 거의 모든 한약방이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반문한 것이다.
“태백조선소가 능력을 발휘하면 문을 연 한약방이 있지 않을까요?”
전호는 고대하던 신호가 왔음을 느꼈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 한약방 구경을 가보겠습니까?”
“저야 좋지요. 부회장님, 다녀와도 되나요?”
“물론이야. 어떤 약을 어떻게 만드는지 잘 보고 와.”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둘은 금방 자리를 떴다. 이래야 더 정확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전에 약속한 것이다.
둘이 사라지자 잠시 한담을 나눴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말만 하게.”
“아까 낮에 봤던 사람, 일본인 같던데 맞습니까?”
“오호, 한국인은 그런 걸 눈썰미만으로도 구별하나?”
“그럼요. 유럽 사람들이 볼 때는 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우리끼리는 눈으로 구별합니다.”
“그렇군. 맞네. 오시마조선소의 전무일세.”
“배는 태백조선소에 주문하셨는데 왜……?”
“스위스의 MSC라는 컨테이너선사가 있네. 그 회사 CEO가 배를 주문하러 한국에 들어와 있지.”
“그런데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한국의 조선소에서 싸고돌아 접촉할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 궁여지책으로 내게 나서주기를 당부했네. 저걸 들고 와서…….”
세바스티앙이 가리키는 곳엔 큼지막한 와인 한 병이 놓여 있다.
선물이라는 티를 내려는 듯 병목에 분홍 리본이 매어져 있다. 일반 와인 여덟 병에 해당하는 6리터짜리 임페리얼 병이다.
현수는 와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렇기에 겨우 포도주 한 병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 세바스티앙은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 병을 들고는 소중한 보물 다루듯 살살 쓰다듬는다.
“이걸 마시고 다리를 놓아줄까, 아니면 돌려줄까를 고심 중이네.”
“네?”
“워낙 비싼 거라 이걸 받으면 청을 들어줘야 하거든.”
“비싸요? 얼마나 하는데요?”
“샤또 슈발 블랑(Chateau Chevall Blanc)은 2010년 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등록되었네. 그때 22만 4천 유로에 경매되었지.”
“네에?”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와인 한 병 값이 한화로 3억 5천만 원이나 된다는 뜻이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걸 주면서 MSC 사의 지앙뤼지 아폰테 사장에게 오시마조선소 측 조건을 제시해 달라고 했네.”
“……!”
현수는 대꾸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래도 듣고 싶은 말은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컨테이너선도 진화하여 요즘은 첨단 기술들이 접목되고 있네. 오시마 측은 여러 첨단 기술이 적용된 컨테이너선을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수주하겠다는 오퍼를 냈네.”
이번에도 현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태백조선소와 계약하지 않았다면 혹할 만한 조건이지.”
현수는 조건을 묻지 않았다. 조선업계 사람이 아니기에 말해줘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걸 캐묻는 것도 상도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놈이 탐나서 아폰테 사장과 만나게 해주려 생각했었네,”
세바스티앙은 샤또 슈발 블랑을 또 쓰다듬는다.
“……!”
“그런데 자네가 침을 놓아주었네. 그래서 안 그럴 생각
이네.”
“그럼 제가 아주 비싼 침을 놔준 셈이군요.”
“하하! 그렇다네. 나와 베아트리체에게 침을 놔주었으니 일인당 11만 2천 유로씩 낸 셈이지.”
“헐!”
현수는 부러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에 세바스티앙이 손을 내저으며 환히 웃는다.
“사실은 아까 그런 결정을 했네. 내가 겨우 이깟 포도주 한 병에 휘둘릴 사람인가? 오시마는 나를 너무 얕잡아본
거지.”
“……?”
“여러 조선소와 거래를 했네. 태백은 이번이 처음이지. 그런데 사람들이 괜찮은 것 같네. 자네가 가장 마음에 들지만 강 과장도 실력이 있으면서 성실하지. 그밖의 다른 사람들도 진실되고 괜찮더군.”
“에구,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해 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아니네. 나는 자네 덕에 더 높은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아까 자네가 한 말을 듣고 뜨끔했네. 하지만 기분은 좋네. 된 사람이라는 말, 참 마음에 들었거든.”
“하하, 그랬습니까?”
“그랬네. 하하하!”
세바스티앙은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참, 내일 오전에 시간 좀 내주게.”
“네? 왜요?”
“내일 아폰테 사장과 만나기로 했네. 웬만하면 동석해 주게.”
“……!”
“아폰테 사장에게 자네를 소개하고 싶네.”
“…네, 그러지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사이에 호의는 무슨. 그나저나 이제 밤도 깊어가는데 라운지에 나가 술이나 한잔하세.”
“네, 그러지요.”
둘은 호텔 라운지로 가서 담소를 나눴다. 그런 현수와 세바스티앙을 바라보는 사내들이 있다.
둘이 있는 자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사내 셋이다.
바에 있으면서도 술은 별로 마시지 않는다. 대화도 별로 없다. 간혹 현수의 뒷머리만 힐끔힐끔 바라볼 뿐이다.
이들은 현수가 이 호텔에 들어설 때부터 감시하듯 바라보던 인물들이다. 간혹 자기들끼리 무어라 대화를 하며 현수를 째려본다.
『전능의 팔찌』 제1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