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8
2장 무면허라 안 돼요
“현수냐? 언제 들어왔어?”
“새벽에요.”
“왜 그렇게 늦었어? 술 마셨니?”
“아뇨. 회사 일이 많아서요.”
“에구, 전무가 된 게 다 좋은 게 아니구나. 새벽까지 일을 했는데 또 나가야 해?”
“네. 아침에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요.”
“그래, 아침밥이나 먹고 나가렴.”
“아니에요. 오늘은 임원들 조찬회동이 있어서 거기서 밥 먹어요.”
“그래? 그럼 그래라. 아무튼, 끼니 거르지 말고 다녀. 알았지?”
“네에, 걱정 마세요. 참, 이거요.”
“이게 뭐니?”
“제가 전무된 기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커플링 하나 샀어요.”
“커플링?”
어느새 어머닌 포장지를 뜯고 계셨다.
“네, 사랑하는 사람끼리 끼는 거요. 마음에 드세요?”
“그래.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버질 통해서 사지. 추 사장님 물건 사면 더 싸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거 별로 안 비싼 거예요. 아무튼,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래, 잘 끼마.”
“네, 꼭 끼고 다니세요. 이 아들이 사줬다고 자랑도 하시고요.”
“그래. 고맙구나.”
남편은 평생 귀금속을 다루는 공방에서 일을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손에는 흔한 금반지 하나 끼워져 있지 않다. 그런데 드디어 반지가 생겨서인지 몹시 흡족한 표정으로 이리 보고 저리 본다.
그러는 사이에 현수는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권지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또 곤혹스런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쁜 출근길을 재촉하는 샐러리맨들 틈에 낀 현수는 새삼 현 상황이 꿈만 같아 실소를 베어 물었다.
앞에 있던 청년이 누군진 몰라도 같은 회사 동료가 타고 있었던 듯하다. 둘은 가는 내내 김 과장이라는 사람을 씹고 또 씹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김 과장은 변태, 왕재수에 간신배이며, 비리나 저지르는 천하에 몹쓸 놈이다.
현수 역시 박진영 과장을 씹었었다. 그런데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 불과 2년 만에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깨달은 바가 있기에 직원들에게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얼른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흐음! 제법이군.’
장근평은 발가벗고도 잘 도주한 모양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법이 해제되도록 해놓았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원래 얼굴로 되돌아갔을 것이고, 출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어서 오게.”
“어서 오세요.
세바스티앙과 베아트리체가 환한 웃음을 짓는다.
“잘 주무셨습니까?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도…….”
“물론이네.”
“저도요.”
“자, 이만 가지.”
“네.”
세바스티앙이 앞장서고 베아트리체와 현수가 뒤를 따라간 곳은 호텔 후원의 작은 레스토랑이다.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주변을 에워싼 채 이동했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셋은 담소를 나누었다. 주로 한의학 관련이다. 언제 그만한 실력을 쌓았는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하여 몸이 아파 회사를 쉬는 동안 공부했다고 둘러댔다.
“무슈 세바스티앙! 어서 오십시오. 마드모아젤 베아트리체 곁의 분은 누구신지요?”
“아! 내가 잘 아는 사람일세.”
세바스티앙과 대화를 나눈 이는 MSC 사의 지앙뤼지 아폰테(Gianluigi Aponte) 회장 비서 알베르트라고 한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봐, 얼른 호텔 측에 연락하여 한 분 더 식사하신다고 전해.”
알베르트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얼른 무전기를 켠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제법 많은 사람이 보인다.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명품으로 보이는 비싼 수트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중에 동양인들이 눈에 뜨인 것이다.
“아마 지나의 롱셩(熔盛)중공업, 진하이(金海)중공업, 다롄(大連)조선에서 온 사람들일 거예요.”
“아! 그래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어떻게든 아폰테 사장과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 호텔에 투숙한 모양이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지 않았다면 경호원들이 쫓아냈을 것이다.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된 제법 큰 룸이다. 리셉션 등에 사용되는 걸 레스토랑 분위기가 나도록 꾸민 듯하다.
“어서 오시오. 세바스티앙 부회장.”
“네에, 반갑습니다. 사장님!”
세바스티앙과 70쯤 된 노인이 포옹한 채 서로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러고 보니 3년 전에 뵙고 처음이군요.”
“그렇지. 세월 참 빠르네, 안 그런가?”
“하하!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월도 사장님은 비껴간 모양입니다.”
“그래? 그거 듣기 좋은 소리이구만.”
둘은 아주 친한 듯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아폰테 사장의 시선이 베아트리체에게 향한다.
“오……! 베아트리체. 더 아름다워졌어. 마치 활짝 핀 꽃 같아. 대체 어떤 운 좋은 녀석이 베아트리체를 낚아챌까?”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러는 사장님은 더 정정해지셨어요. 보기에 참 좋네요. 머리 염색만 하시면 중후한 중년인처럼 보일 거예요.”
“하하, 그래? 그 거짓말 참말인가?”
아폰테 사장이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짓는다.
이 말에 참말이라고 대답하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되고, 아니라고 하면 참말이 아니라는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호호, 또 속을 줄 알고요? 거짓말 아니랍니다.”
베아트리체는 이미 여러 번 당한 모양이다. 말을 마치곤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혀까지 쏙 내밀었다 집어넣는다.
70 넘은 노인에게 20대 중반은 파릇파릇한 새싹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베아트리체를 보고 환히 웃는다.
“하하, 그래? 근데 이쪽은……? 처음 보는 사람이네.”
이번엔 세바스티앙에게 시선을 준다.
베아트리체의 한국인 애인이냐는 표정이다. 본인에게 물었다가 아니라면 실례이기에 세바스티앙에게 묻는 모양이다.
“아! 이 친구는 내게 큰 은혜를 준 김현수라 합니다.”
“은혜? 김현수?”
“네, 한국에서 가장 큰 건설회사의 임원입니다.”
“건설회사? CMA 오머런과 건설회사가 무슨……?”
어찌 된 인연이냐는 뜻인데 어찌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여간 우리 업계와는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그 얘기는 천천히 해드리죠.”
“그렇다면 뭐…….”
모두가 테이블로 향했다. 거기엔 곱게 늙은 여인이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다 알지?”
“그럼요! 사모님, 그동안 안녕하셨지요?”
세바스티앙이 호들갑 비슷하게 과장된 몸짓을 한다. 이에 귀부인은 환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세바스티앙은 여전히 장난꾸러기 같아요.”
“하하, 맞습니다. 장난꾸러기. 우리 베아트리체도 아시죠?”
“그럼, 유능해서 우리 그이 비서로 점찍었는데 세바스티앙이 날치기해 간 아가씨를 왜 몰라? 베아트리체, 그간 잘 있었지?”
“네, 사모님! 다시 뵙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참, 이쪽은 제가 잘 아는 한국인입니다.”
“김현수라 합니다.”
현수가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이에 엘리자베스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반가워요. 엘리자베스 아폰테예요. 저 고집 센 양반을 만나서 평생 고생만 한 부인이죠.”
“하여간 할망구가 못하는 말이 없어. 내가 고집이 세긴 뭐가 세?”
“세죠! 그럼 안 세요?”
“증거 대봐.”
“저기 밖에 있는 저 사람들, 중국 사람들이죠?”
“그래.”
“저 사람들이 줄기차게 만나달라는데 한 번도 만나준 적 없죠?”
“그야 당연하지. 저품질의 대명사 Made in China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니 만나줄 이유가 없지.”
“그것 봐요. 중국산이라면 무조건 품질을 믿을 수 없다는 그 고집!”
“그게 고집이야? 중국산이 후진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세바스티앙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 준다.
“맞습니다. 저도 중국산은 별롭니다.”
“미스터 킴이라고 했죠? 미스터 킴이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엘리자베스는 구원군으로 현수를 택한 듯하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현수는 지나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이 없다.
그렇기에 서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지나산은 별롭니다.”
“끄으응! 잘난 양반 좋겠네요. 처음 본 젊은 친구까지 구워삶다니 능력 하나는 인정해요. 치이……!”
엘리자베스가 약간 토라진 듯한 표정을 짓자 아폰테 사장이 얼른 얼굴을 바꾼다.
“아이구, 알았어! 나 고집 엄청 세. 그리고 당신 만나서 고생만 시켜줬어. 그래, 그거 인정해. 그래서 평생 벤츠와 BMW만 타고 다니게 해줬잖아.”
“흥, 그깟 차……!”
“으이그,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아침만 먹고 당신 가자는데 모두 갈 테니 이만 화 풀어. 알았지?”
“호호, 정말요?”
여자는 젊으나 늙으나 여우라는 말이 있는데 현수는 지금 그 현장을 눈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언제 토라진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엘리자베스는 환히 웃고 있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아폰테 사장이 털썩 주저앉는다.
“에구, 힘들어! 늙어서도 이 짓을 해야 하니…….”
“뭐라고욧?”
“아, 아냐. 그냥 나 혼자 중얼거린 거야.”
“크큭!”
“크크크큭!”
“호호호호!”
현수와 세바스티앙, 그리고 베아트리체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중을 들려 옆에 서 있던 웨이터들은 불어를 모르기에 멀뚱멀뚱했다.
“내 덕에 셋이 웃었으니 되었네. 자, 이제 식사를 하세. 웨이터! 이제 시작하지.”
“네, 손님!”
아폰테 사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웨이터들의 서빙이 시작되었다. 현수는 평생 처음 아침 정찬을 먹게 되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아폰테 사장과 세바스티앙은 상당히 많은 대화를 했다. 자신들 고유업종에 관한 이야기인지라 현수는 묵묵히 식사만 했다. 그러는 동안 엘리자베스와 베아트리체는 마치 할머니와 손녀처럼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쪽의 대화 주제는 아름다움과 어찌하면 노화를 늦출 수 있냐는 것이다. 확실히 남자와 여자는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대화 도중 잠시 말을 끊곤 한다.
그리곤 잠시 주먹을 말아 쥔다. 대화에 열중한 베아트리체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한 듯 말을 잇고 있었다.
그건 세바스티앙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폰테 사장은 달랐다. 대화를 하면서도 수시로 엘리자베스를 주시한다.
왜 그러나 싶어 관찰을 했다. 그리고 금방 그 이유를 알았다. 가끔씩 고통이 엄습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엘리자베스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다.
‘아! 항암치료를 받는 모양이구나.’
현수의 예상은 적중했다. 엘리자베스는 얼마 전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나이가 들면 암세포의 증식이 젊은이에 비해 느린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엘리자베스의 병세는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
아폰테 사장이 전용기를 띄워 한국까지 온 이유는 배를 사기 위함도 있지만, 한국만의 고유의술에 대한 소문을 들은 때문이기도 하다.
서양 사람들은 한의학하면 ‘漢醫學’을 생각하곤 한다.
이것은 지나로부터 발원된 동양의술을 총칭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동양의술의 근간이 되는 황제내경과 신농본초경, 상한경, 금궤요략 등이 지나인들의 손에 의해 저술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韓醫學’이란 것도 있다.
한반도에서 발달된 고대 의약이 지나 일본 등 한자문화권 지역의 의약과 교류되면서 연구, 전승되어 온 의학을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같은 것은 지나의 의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허준(許浚)이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지나에서 들여오는 의학서들을 보면 모두가 대수롭지 않고 오히려 호번1)하여 기준할 만한 것이 없어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