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
“1,500m에서 조금 빠지는군요.”
처음에 예상했던 사거리이다. 이것은 사거리일 뿐 유효 살상거리는 아닐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표정엔 나타내지 않았다.
“아이고, 애는요. 덕분에 좋은 경험했습니다.”
활 구입 비용과 로빈훗이 애써준 것에 대한 대가는 이실리프 무역상사를 통해 이미 지불된 상태이다.
활을 다시 박스에 넣고는 택시를 타고 적당한 곳에서 내렸다. 그리곤 덕항산으로 텔레포트했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다.
계룡산보다 마나의 밀도가 약간 떨어지는 것이 흠이지만 전능의 팔찌를 주웠던 곳인지라 왠지 마음에 드는 곳이다.
“앱솔루트 배리어! 타임 딜레이!”
결계 안에서 마나를 모으는 것이 지겹게 느껴지긴 이번이 처음이다. 한시바삐 컴파운드 보우의 성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아무튼 길고 지루한 시간 끝에 마나석이 충진되었다.
그동안 현수는 화살마다 플라이와 헤이스트, 그리고 퍼펙트 트렌스페어런시와 오토믹 붐 마법진을 그렸다.
비거리와 속도를 늘리려는 목적이고, 놈이 눈치채기 어렵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적중되었을 때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함이다.
놈은 화염의 브레스로 자신을 불태워 죽이려 했다. 그러니 조금의 자비도 고려할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오러 실린 화살을 쏘는 심상 훈련을 했다. 시위를 당겼다가 놓으면 화살은 빨랫줄처럼 쏘아져 간다.
이 화살의 촉은 서늘한 푸른빛을 띤다. 오러가 입혀진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못 뚫을 것이 없는 막강한 무기가 된다.
라이세뮤리안이 본체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이것을 막아내기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현수의 생각이다.
“이제야! 끝났군. 좋아, 곧장 돌아간다. 트랜스퍼 디멘션!”
현수의 신형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동안 부드러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샤르르르르릉―!
* * *
“블링크!”
사물이 보이는 순간 현수의 입술이 달싹였다. 혹시 라이세뮤리안이 있을까 싶었던 때문이다.
“휴우∼! 없군!”
조심스레 사방을 살피는 현수의 얼굴엔 긴장감이 배어 있다. 최초로 패배를 안긴 강력한 상대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자아, 이제 활을 확인해 봐야지.”
현수는 컴파운드 보우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힘껏 당겼다.
빠드드드드드―!
너무도 강력한 장력에 활이 부르르 떤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끝까지 당겼다. 이 정도도 못 버티면 드래곤을 상대로 한 무기로선 불합격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버텨낸다. 잠시 조준을 하곤 이내 손을 뗐다.
쑤아아아아앙―!
강렬한 파공음을 내며 쏘아져 가는 화살은 예상대로 촉에서 푸른빛이 나고 있다. 그렇게 1,200여m를 날아간다.
시험용은 퍼펙트 트렌스페어런시 마법진이 그려지지 않은 것이라 눈에 보이는 것이다.
콰앙―!
노렸던 바위에 화살이 박혀들며 도저히 화살 박히는 소리라곤 할 수 없는 소리가 난다.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촉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곧이어 강력한 폭발음이 울려 퍼진다.
콰아아아앙―!
오토믹 붐 마법이 지연신관9)처럼 작용한 결과이다.
“어디 이번엔 조금 더 멀리!”
현수는 1,500여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를 겨냥했다.
시위가 당겨지자 활이 또 한 번 몸살을 앓는다. 아직 이런 장력이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결코 파괴되지는 않을 것이다.
활 본체에 튼튼함과 질김을 부여하기 위한 스트렝스와 페이션스 마법진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빠드드드드드―!
시위가 입술에 닿을 때까지 잡아당기는 동안 몸살을 앓을 것처럼 소리를 내던 활은 시위를 완전히 잡아당기자 신음을 멈춘다.
현수는 스코프를 통해 신중히 조준한 후 시위를 놓았다.
피잉―! 쒜에에에에에에엑―!
화살이 요동치며 쏘아져 가는 동안 예리한 파공음이 들린다.
퍼억―!
멀어서 그런지 바위에 박히는 소리가 아까보다는 작다.
쿠와아아앙―!
대략 3초가 흐른 후 화살이 박혔던 바위가 산산이 부서지며 먼지를 뿜어낸다.
“흐음, 일단 1,500m까지는 확실하군. 그럼 이번엔……!”
또 하나의 화살을 시위에 얹고는 힘껏 잡아당겼다.
빠드드드드드―!
피잉―! 쒜에에에에에에엑―!
퍼억―! 쿠와아아앙―!
이번에 겨냥한 것은 2,0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거목이다. 화살은 한가운데 박혔고, 잠시 후 산산조각 났다.
“얼마나 더 나가는지 확인해야지.”
두 번의 추가 시험 결과 2,200m가 넘어가면 화살의 위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흐음, 일단 2,000m까지가 안정적이란 뜻이군. 좋아, 이제 놈을 찾아볼까?”
현수는 와이드 센스 마법으로 주변을 살폈다. 8서클이 되면서 반경이 1㎞로 늘어난 대신 마나 소모량도 많아졌다.
하지만 무리되는 정도는 아니다. 아무튼 현수의 감각에 놈은 걸려들지 않았다. 근처에 없다는 뜻이다.
‘혹시, 그 마을 여자들에게 물어보면 알까?’
생각난 김에 전에 들렀던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책이 보이고, 그 사이로 에머랄드빛 눈동자가 보인다.
“누구냐? 어……! 하인스님. 아직 안 떠난 거예요?”
목책 위로 다프네의 얼굴이 올라온다.
“아! 다프네님, 길을 잃었어요.”
다프네가 피식 웃음 짓는다.
“거봐요. 미혹의 숲은 안 가본 사람은 절대 통과 못한다고 했잖아요. 제 말을 안 믿으셨군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튼 들어가게 해주세요.”
“그래요.”
삐이꺽―!
말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린다. 그런데 다프네는 현수가 아닌 뒤쪽을 계속해서 바라본다.
“왜요? 누가 와요?”
“아침에 오크들이 기웃거렸거든요.”
“또요?”
“네, 저번보다 숫자가 더 늘어날까 걱정돼요.”
다프네는 진짜 걱정되는지 살짝 아미를 찌푸린다.
“다들 활 솜씨 좋은데 왜 안 죽여요?”
“죽이지 말라고 했거든요.”
“네……? 누가요?”
“라수스 협곡엔 우리 말고도 두 개의 마을이 더 있어요. 하나는 드래고니안들이 사는 마을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자손이 모여 사는 곳이에요.”
“아! 그래요? 그래서요?”
현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그들의 주식이 오크예요. 우린 오크 고기를 안 먹고요.”
“……?”
현수는 무슨 소린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들의 먹이 숫자를 줄이지 말라고 강요해서 못 죽이는 거예요.”
“그럼, 저번처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오면요? 그럼 이 마을 사람들 다 잡아먹힐 텐데요? 그래도 죽이지 말래요?”
“그땐 대피소로 대피하면 돼요. 땅을 아주 깊숙이 파놓았거든요.”
“헐……!”
현수는 어이가 없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잡아먹힐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절대 오크를 죽이지 말라는 드래고니안의 횡포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또 놈들이 습격할 것 같아요.”
다프네는 불안감 어린 시선으로 숲 속을 살핀다. 이에 현수는 와이드 센스 마법으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없어요. 이 근처엔.”
“네?”
“마법으로 확인했어요, 적어도 이 근처엔 오크들이 없어요.”
“아! 네에. 휴우∼! 다행이에요.”
다프네는 가벼운 한숨을 쉰다. 안도의 한숨일 것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프네가 쫑알거린다.
“미혹의 숲을 어떻게 지나가느냐는 거요? 그거 말로는 설명이 어려워요. 제가 전에 그랬잖아요, 안내해 준다고……. 설마 나하고 활쏘기 내기한 거 때문에 몰래 간 건 아니죠?”
“아뇨, 그럴 리가요. 저 그렇게 약삭빠른 놈 아닙니다. 그거 말고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인 라이세뮤리안의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알아요?”
“네에……? 그건 왜요?”
“그럴 일이 있어요. 근데 알아요, 몰라요?”
“그야 다, 당연히 알죠. 여기 사는데…….”
“알려줄래요?”
“왜요? 뭐 때문에 거길 알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요. 궁금해서요. 대체 드래곤들은 어떤 데서 사나 궁금해서 그래요.”
현수는 짐짓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다프네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라이세뮤리안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거예요?”
“알아요. 하지만 궁금해서 그래요. 그러니 알려주세요. 한 2㎞쯤 떨어진 곳에서 보는 것도 위험할까요?”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 뭐가 보인다고요.”
“아무튼 그래요. 그 정도 떨어진 곳에서라도 보고 싶으니 알려줄 수 있어요?”
현수가 사라진 후 다프네가 사는 마을 여인들은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혹시 마을 밖으로 나갔다가 몬스터에게 당한 것은 아닌가 싶었던 때문이다. 하여 마을 바깥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럼에도 현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촌장인 루디는 동생들을 달달 볶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꼭 찾아오라는 것이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오크들 때문에 흙투성이가 된 음식에서 실프의 눈물 반 방울을 추출해 낸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럼 그토록 원하던 아기를 만들 수 있다.
그날 저녁 마을에선 현수로부터 씨를 받을 여인들을 제비뽑기로 선정했다. 그녀들 중에는 이 마을 막내 삼인방 중 에스더와 샬롯이 포함되어 있다.
아쉽게도 다프네는 당첨 심지를 뽑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현수가 제 발로 나타났다. 당연히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음식을 먹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실프의 눈물이 효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프네는 현수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어찌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라이세뮤리안의 레어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곧 떠나 버릴 것 같다.
“아, 알았어요. 가르쳐 줄게요. 아니, 내가 안내까지 해줄게요. 일단 마을로 들어가요. 언니가, 아니, 촌장님이 하인스님 사라졌다고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네……? 날 왜 찾았어요?”
왜 찾았느냐는 현수의 물음에 다프테는 잠시 머뭇거렸다. 금방 거짓말을 꾸며낼 정도로 노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인스님은 우리 마을을 찾은 손님이잖아요. 그리고 오크들의 습격을 막아준 은인이구요. 근데 말없이 사라졌다고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우리 마을은요…….”
다프테는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방책의 문을 닫고 현수를 잡아끈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 있어요. 레어까지 가려면 제법 거리가 머니까 내일, 내일 아침에 내가 안내해 줄게요. 근데 정말 딱 2㎞ 떨어진 곳까지만 안내할 거예요. 그 이상은 위험하거든요.”
“다프네님이 그걸 어떻게 알죠?”
“라이세뮤리안님은 반경 2㎞ 내의 움직임을 감지하시거든요. 그 거리 안에 들어갔다가 분노를 사면 소멸될 위험성이 너무 커요. 그러니까 더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 활의 사거리를 2,000m로 늘린 건 정말 잘한 일이군.’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프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들……! 하인스님 찾았어요.”
“뭐어? 어디서? 어떻게 찾았어?”
“하인스님은 말짱하셔?”
다프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두막의 문이 일제히 열린다. 그리곤 거의 속옷 차림인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헐……!”
현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했다. 하여 발등을 바라보았다.
‘이런 신발 갈아 신는 걸 깜박했네.’
현재 신고 있는 것은 국산 브랜드인 프로스펙스이다.
창은 노란색이고, 위쪽은 진청색이라 이곳 사람들의 눈에 확 뜨일 것이다. 하여 어찌하나 싶은데 다행히 현수의 발을 보는 여인들은 아무도 없다.
사지가 멀쩡한지,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없는지 살핀다. 특히 더 세심히 바라보는 여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