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
택시에서 내리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맨 앞에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각기 종이 한 장씩을 들고 있다. 암하라어로 쓴 ‘성자님을 환영합니다!’라는 내용이다.
암하라어를 모르기에 이 본부장이 대체 무어라 쓰여 있느냐고 리야에게 물었더니 번역해 주었다.
그리곤 촌장과 현수의 말을 거의 동시통역해 주었다.
이 본부장은 현수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 암하라어를 어찌 안단 말인가?
이 언어는 가르치는 학교는 단 한 곳도 없다. 그럼에도 거의 원주민 수준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
“끄으응! 대체 뭐지? 김 전무는 대체 어떤 사람인 거야?”
한국말로 혼자 중얼거린 걸 리야가 들은 모양이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 아닙니다. 나 혼자 한 말이에요.”
“아, 네.”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촌장은 현수를 코리안 빌리지 앞쪽의 너른 공터로 안내하였다.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 평지이다. 보아하니 아이들이 축구를 하던 곳인 듯싶다.
축구 경기장의 라인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사무실을 내십시오. 창고를 지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좋네요. 마을하고도 가깝고. 진입 도로와 가까우니 딱 좋습니다. 그런데 이 토지의 주인은 누구인지요?”
“제가 주인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토지 가격은 얼마나 쳐드려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성자님께서 필요하다 하시는데 그냥 드려야죠. 여기서 농사를 짓던 것도 아닙니다. 보다시피 버려둔 땅이니 그냥 쓰십시오.”
“아뇨. 그건 안 됩니다. 토지 가격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길 쓸 수가 없습니다.”
“아이고, 아니라니까요. 제가 어떻게 훌륭하신 성자님께 땅값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쓰십시오.”
촌장의 말에 곁에 서 있던 마을 원로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현수에게 입은 은혜를 생각해 보면 이게 맞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이 현수 생각이다.
결국 적정한 가격이 결정되었다. 워낙 땅이 넓은데다 상대적으로 인구는 적기에 땅값은 쌌다.
당연히 부담되지 않는다. 아무튼 구매한 대지는 한국 기준으로 보았을 때 약 3만여 평이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부지를 둘러보며 이 본부장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도매 약방에 대해선 그가 더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혹시 있을지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토지엔 담장을 두르기로 했다. 담장이라 하여 철조망이 아니다.
입구와 시야를 위한 몇 곳을 제외한 곳에 건축물을 짓는다. 담장 대신인 것이다.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 고용해야 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이다. 그들에게 쾌적한 주택을 제공할 생각이다.
따라서 담장 대신 연립주택이 들어선다. 이 밖에도 코리안 빌리지 사람들을 위한 작은 규모의 슈퍼마켓도 지을 계획이다.
고강철 등 관리자가 될 한국인들이 사용할 숙소는 안전을 위해 내부에 짓기로 했다.
이 밖에 창고와 차고, 그리고 업무를 위한 사무동 등을 배치할 계획이다.
이 본부장은 필요한 건물과 규모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한국의 건축설계사에게 넘겨질 것이다.
이곳의 건축가에겐 약간의 돈을 주고 도장만 받아 허가를 낼 생각이다. 본인의 의도를 100%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한국에서 설계할 생각을 한 것이다.
굵직굵직한 것이 결정되자 다시 힐튼호텔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기오르기스 대통령에게서 받았던 명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담판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아직 컬러링이라는 것이 보급되지 않은 듯 착신음이 울린다.
“네, 비아니 아자한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직통 전화라 비서실 직원이 아닌 실장이 받는 모양이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에서 온 김현수라 합니다.”
“네? 누구라고요?”
유창한 암하라어건만 잘 못 들었는지 반문한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온 김현수라 합니다. 기로르기스 대통령님과 통화를 하고 싶은데 가능한지요?”
“방금 대한민국에서 온 김현수 씨라고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바꿔 드리겠습니다.”
예상보다 편한 응대였기에 현수는 말없이 기다렸다.
딸까닥―!
“오오, 미스터 킴? 반갑습니다. 기르마 올데 기오르기스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네, 저는 힐튼호텔에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조금만 기다리시오.”
“네?”
딸깍―!
현수는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전화가 끊긴 때문이다. 전화가 고장 났나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못사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이다. 그런 사람이 쓰는 전화가 쉽게 고장 날 리 없다.
만일 그렇다면 호텔로 전화가 올 것이다. 하여 기다렸지만 벨은 울리지 않았다.
“왜 그러는데? 뭐가 잘못되었나?”
이춘만 본부장의 말에 대답할 말이 옹색하다. 큰소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디스아바바에 천지약품 지사 설치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갑자기 전화가 끊겨서…….”
“흐음, 여기서 사업하기 힘든 거 아닐까?”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사태를 금방 파악한다.
“아뇨. 전엔 정말 진지하게 말씀하셨거든요.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님과 직접 통화해서 우리 천지약품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기까지 했던 분이에요.”
“그런데 왜?”
“모르죠. 전화가 고장 났을 수도 있고, 갑작스레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끄으응! 이거야 원, 뭐가 어찌 되려고.”
이 본부장은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침음을 낸다.
“기다려 보죠. 제가 여기에 온 건 대통령님이 아시니까요.”
“그래야지 우리가 뭐 별수 있겠어?”
코리안 빌리지 사람들을 안다는 것을 빼곤 아무런 기반도 없는 곳이다. 이 본부장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벌렁 드러눕는다. 현수 역시 딱히 할 일이 없기에 그 곁에 누웠다.
“뭐, 일이 잘 안 되면 여기서 며칠 푹 쉬었다 가는 셈 치면 되죠. 안 그래요?”
“하긴 뭐, 휴가 중이니 에티오피아 관광 온 셈 치자.”
“하하, 네에.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네요.”
잠시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을 때다.
똑, 똑, 똑!
“누구십니까?”
“김현수님 안에 계십니까?”
“네,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저는 비아니 아자한 에티오피아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네?”
현수와 이 본부장은 화들짝 놀라며 튀어 올랐다. 그리곤 쏜살같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
50대 건장한 흑인이 서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공부깨나 한 듯한 얼굴이다.
“반갑습니다. 비아니 아자한입니다.”
“네, 김현수입니다. 이쪽은 제 사업 파트너인 이춘만 씨라고 합니다.”
현수의 영어는 여전히 유창하다.
“반갑습니다. 이춘만입니다.”
“아! 이분이 킨샤사 천지약품 사장님이시군요.”
“저를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대통령님께서 에티오피아에도 천지약품 같은 양심적인 기업이 있어야 한다면서 여러 번 말씀하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비아니 아자한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아, 네에.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춘만입니다.”
둘은 악수를 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대통령님께서 한시바삐 만나야겠다면서 저를 보냈습니다. 스케줄이 비어 있으면 동행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기꺼이 동행하죠.”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이 본부장이 상의를 가져왔다. 본인 것뿐만 아니라 현수의 것도 같이.
잠시 후 일행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차를 타고 대통령궁으로 이동했다.
“오오! 어서 오시오, 미스터 킴!”
“네, 반갑습니다, 대통령님.”
기오르기스 대통령이 격하게 현수를 끌어안는다. 그러고 보니 몰라보게 날씬해졌다. 쉐리엔 분말 덕분일 것이다.
“대통령님, 요즘 운동하시는 거죠?”
“그럼. 미스터 킴의 충고를 받아들여 매일 한 시간씩 운동을 하네. 그땐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에구, 제가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요.”
“대단한 일을 했지. 실례되는 줄 알지만 자네가 떠난 후 코리안 빌리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았네.”
“네? 그러셨어요?”
“대체 어떤 병들을 치료했는지 궁금했네. 무례를 이해하게.”
“무례라고까지 할 게 뭐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고맙네. 이해해 줘서. 아무튼 진짜 별의별 병을 다 치료해 줬더구만. 놀랍네. 한국의 의술이 그 정도인지 처음 알았네.”
기오르기스 대통령은 진짜 대단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네에, 그러셨군요. 대한민국의 의술은 이제 세계적 수준에 근접해 있지요.”
현수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의술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의료 선진국에서도 의료 관광을 올 지경이다.
현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통령이 말을 잇는다.
“요즘 나는 우리나라 인재들을 한국에 유학시키는 일을 추진하고 있네. 자네가 가교 역할을 해주시게.”
“네?”
이게 무슨 잠자다 남의 다리 긁는 소리란 말인가?
현수의 반문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컸다.
“놀랐는가? 사실은 내가 더 놀랐네.”
“뭐, 뭐가요?”
“침으로 모든 질병을 고치는 기술이 있다는 걸 여태 몰랐네. 비싼 약을 먹고 수술해야 할 것들도 침 하나로 척척 고쳐 냈다면서? 그 얘기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끄응!”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라니!
오로지 현수만이 보유하고 있는 회복 포션과 리커버리를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여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통령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인재들을 한국에 유학시키면 자네와 같은 기술을 익히지 않겠는가?”
“헐!”
이 대목에서 현수는 할 말을 잃었다. 기오르기스 대통령이 진짜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잘 부탁하네. 참, 몇 년 전 자네 나라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었네. 아직 잘 계신가?”
“전임이 되셨습니다. 올해 새 대통령이 취임하셨지요.”
“아, 그런가? 그럼 내가 친필 편지를 써주겠네. 물론 우리 대사관에도 연락을 넣을 것이네.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의료 유학이 가능하도록 힘 좀 써주게.”
“대통령님, 저는 그냥 일개 샐러리맨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나라도 콩고민주공화국처럼 자네에게 준외교관 신분을 부여할 생각이네. 그러면 할 수 있을 것이네.”
“끄응!”
점입가경이기에 현수는 침음만 삼켰다.
“참, 이번에 입국한 건 전에 내가 말했던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함인 건가?”
대통령은 눈빛을 빛내며 현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천지약품 아디스아바바 지사를 낼 생각으로 왔습니다.”
“호오, 그래? 그거 잘되었네. 이봐, 비서실장!”
“네, 대통령님!”
“의무장관 좀 보자고 하게.”
“네, 알겠습니다.”
비아니 아자한 대통령 비서실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이때 대통령은 뭔가를 기록했다.
현수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하기 이전엔 기오르기스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다.
1991년 혁명에 성공한 이후 지금까지 총리인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총리는 지난해에 질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