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
현수는 어펜시브 참이라는 마법을 쓰지 않아도 됨을 다행스럽게 여기여 힐튼호텔로 되돌아왔다.
“본부장님, 일이 너무 잘되는 거 같지 않아요?”
“맞네. 이렇게 쉽게 해결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어. 하하! 그런 의미에서 한잔해야지?”
“으이그, 어제도 과음하셨는데. 이제 슬슬 건강 챙기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건강? 하하! 그럼 내가 왜 내 건강을 안 챙기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큰맘 먹고 천종산삼 하나 사서 먹었네. 그러니 괜찮을 거야. 안 그래?”
“……!”
현수는 어젯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다.
“아무튼 한잔하세. 그냥은 못 자! 알았지?”
“에구, 알았어요. 가요. 오늘도 가서 또 마십시다.”
“오케이!”
둘은 또 술을 마셨다. 하지만 둘 다 취하지 않았다.
현수는 원래 술이 세서 안 취한 것이고, 이 본부장은 건강을 챙긴다면서 자제한 때문이다.
다음날, 현수는 귀국길에 올랐다. 아디스아바바 지사의 건축설계를 의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본부장은 당분간 힐튼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의무부 공무원들과 선결해야 할 일들이 많은 때문이다.
“참, 리야가 커피에 대해 도산데…….”
반둔두 및 비날리아 지역에 조성할 커피 농장을 위한 실무자가 없는 상황이다.
바리스타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재배를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제안을 하면 와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귀국했다. 인천공항에 당도했을 때 현수의 다이어리엔 수십 페이지나 메모가 늘어 있었다.
* * *
“아이고, 이게 누구야? 어이, 김 전무! 높은 사람 되었는데 여긴 어쩐 일이야?”
현수를 반겨주는 이는 성당 다닐 때 알고 지내던 한창호라는 형이다. 현수보다 네 살 많다.
공부를 잘해 일류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고, 작년에 건축사 자격증을 땄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여 공항에 내리자마자 성당에 연락처를 물어 찾아온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형.”
“그래, 잘 있었지? 너 나온 신문 기사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대단해. 하하, 녀석. 그래,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형님이 보고 싶어서요.”
“날? 이 잘생긴 형님이 보고 싶었다는 말은 술이 고프다는 뜻? 좋아, 오늘은 내가 한잔 사지.”
역시 훈남이다. 환한 웃음을 짓는데 보기 좋다.
“형, 장가는 갔어요? 혼배미사 있다는 소릴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장가? 으이그, 너까지? 나 아직 총각이다. 노총각. 그것도 법무부 노총각이 아니라 보건복지부 노총각이다. 됐냐?”
나이 33에 아직 숫총각이란 뜻이다.
“아, 그랬구나. 그럼 제가 아는 괜찮은 아가씨 하나 있는데 소개해 줄까요?”
“아가씨? 에이, 관둬라. 벌이 시원찮다고 찰 텐데, 뭐.”
국내 경기가 불황 국면이 되면서 부동산 가격도 동반 하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한창호처럼 건축설계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사들의 일감이 대폭 감소했다.
이는 수입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안 좋아요?”
“그래. 데리고 있는 직원들 월급 주는 것도 힘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건축사 따려고 아등바등 안 해도 되는데. 차라리 건설회사에 취직했으면 더 나았을까?”
“……!”
현수가 대답할 말이 아니기에 입 다물고 있었다.
“아니다. 요즘 천지건설 빼고는 잘나가는 건설회사 없다. 그쪽으로 갔으면 언제 잘리나 걱정했을 거다.”
“……!”
“아무튼 요즘 형 벌이가 시원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하도 성화해서 여러 번 선을 봤는데 여자들이 다 딱지 놓더라. 그런데 또 한 번 채이라고?”
“정말 괜찮은 아가씨를 알아요. 미인이구요.”
현수는 비서실 조인경 대리를 떠올렸다.
몸매, 미모, 학벌, 성격, 뭐 하나 떨어지지 않은 여자다. 게다가 집안도 빵빵하다고 했다.
한창호도 조인경 대리와 같은 S대 출신이다. 키고 멀끔하고 생긴 것도 호감 가는 얼굴이다.
성격도 좋고 한창호 역시 집안이 좋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교수님이다.
어머니 또한 같은 대학 사범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니 이만하면 괜찮은 집안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둘을 엮어줄 생각을 한 것이다.
“미인이라고? 흐음, 그럼 조금 당기는걸.”
한창호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웃는다. 농담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수는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잘되면 좋고 밑져도 최하 본전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알았어요. 그럼 추진합니다?”
“나중에 봐서 미인 아니면 의절이다? 알았지? 그건 그렇고, 내 사무실에 웬일이야? 전무이사 돼서 집 지으려고 왔니?”
“네. 설계 의뢰를 하려구요.”
“진짜?”
한창호의 앉아 있던 자세가 달라진다. 요즘 일이 없어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됐다. 직원들 모두 컴퓨터로 게임이나 하고 있었는데. 그래, 주택이냐? 규모는?”
한창호의 이 말은 대지 100평에 건평 50평짜리 전원주택을 떠올리고 한 말이다.
현수는 즉답 대신 차분하게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리곤 메모된 내용을 읽어주었다.
“일단 대지 규모는 3만 평쯤 돼요. 거기에 사무용 건물 한 동을 지을 거예요. 각 층 바닥 면적은 200평 정도로 4층이면 돼요.”
“……!”
대지 규모부터 예상외다. 그렇기에 한창호의 눈이 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창고는 여섯 동을 지을 거예요. 각 500여 평은 되어야 해요. 그리고 25평형 연립주택 약 400가구, 300평짜리 슈퍼마켓 하나, 그리고…….”
한창호의 눈이 점점 커진다.
특히 25평짜리 연립주택 400가구라는 말에 넋 나간 표정이다. 요즘 같은 불황에 그야말로 대박 일감인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설명을 이어갔다.
코리안 빌리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실측한 대지를 그려주었다. 그리고 어떤 건물을 어떻게 앉힐 것인지를 설명했다.
그려놓고 보니 거대한 요새를 그린 것 같다.
“이거 진짜냐?”
“그럼요. 다만 이걸 우리나라에 짓는 건 아니에요.”
“그래? 어디냐?”
“아디스아바바. 에티오피아의 수도죠. 거기에 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모여 사는 코리안 빌리지라는 곳이 있어요. 그 근처에 지을 거예요.”
“흐음, 내가 현장엔 못 가본다는 얘기지?”
“네. 그래서 핸드폰으로 주변 풍경 등을 찍어왔어요.”
현수가 화면을 보여주자 확대해 보며 살핀다. 그런데 사실 이 화면은 필요가 없다. 그냥 편평한 대지이기 때문이다.
주변엔 아무런 건물도 없다.
사선 제한도 고도 제한도 없는 동네다. 여기에 조망권 내지 일조권도 100% 무시해도 된다.
건폐율과 용적률은 따질 필요 없다. 대지가 넓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가장 높은 건물이 4층이니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아쉬운 것은 사회 기반 시설이 없어 전기, 상하수도를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현수는 대지 실측을 할 때 이그드라실의 잎을 들고 수맥 탐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수량 풍부한 지하 수맥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의 흐름을 대강 표시해 왔다.
상수도는 해결된 셈이다.
생활하수는 배수로를 만들어 부지 밖으로 뺄 생각이다.
귀국하는 대로 인터넷을 검색해 본 결과 1994년에 요구르트 병을 이용하여 생활하수를 1급수로 완벽하게 정화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물학적 산소 요구량 BOD와 부유물질 SS를 거의 완벽하게 줄여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수질 정화 기술이다.
이를 적용하기 위한 침전분리조와 유량조정조 등 1차 시설 이외에 접촉폭기조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 밖에 분뇨 등 오수 처리를 위한 대형 정화조를 설치할 계획이다. 혐기성 박테리아의 도움을 얻어야 하기에 정화조는 땅속에 매설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설엔 특별히 정화 마법진을 그려 넣을 생각이다.
전기는 극동솔라파워 주윤우 사장에게 맡길 것이다.
태양광발전 시설 이외에도 난방을 위한 목재펠릿5)을 연료로 사용하는 보일러를 설치할 계획이다.
아디스아바바는 고원지대인지라 기온이 낮다. 밤이 되면 당연히 기온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적도 인근이지만 보일러를 고려한 것이다.
아무튼 현수는 한창호가 기사들을 불러 업무 지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형, 이거 가급적 빨리 설계해 줘야 해요. 끝나자마자 그쪽에서 건축 허가 받아서 시공해야 하거든요.”
“알았어. 밤샘을 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끝내줄게. 그리고 설계비도 싸게 받고.”
“고마워요. 대신 미인을 소개해 줄게요.”
“오냐. 고맙다. 그런데 오늘 술 마시자는 말 취소다. 이거 일하려면 꼼짝 않고 붙어 있어야 하거든.”
“네, 형만 믿을게요. 멋지게 설계해 주세요. 참, 도면과 시방서6)는 영어로 써주세요. 알았죠?”
“오냐.”
한창호 건축설계사무소를 나선 현수는 천지건설 전무이사실로 향했다. 당연히 아무도 없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책상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깍지 낀 팔을 뒤통수에 대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는 다음 수순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방탄복에 생각이 미쳤다.
즉시 아공간에서 디오나니아의 잎사귀 한 장을 꺼냈다.
“이베이퍼레이션(Evaporation)!”
마법이 구현되자 잎사귀에서 수분이 증발되어 쭈글쭈글해진다. 칼을 꺼내 껍질을 벗겨내곤 안을 살폈다.
예상대로 섬유질이 많은 것 같다.
껍질을 벗기자 실 같은 것들로 뒤덮여 있다. 하나를 잘라내서 살펴보니 야구공의 껍질을 벗기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얼마나 질긴지 커터 칼로 분리해 내는 데 애를 먹었다.
“이게 있어서 칼을 써도 잘 안 베어진 거겠지? 이걸 어떻게 시험한다?”
한국과 미국 방탄복의 차이점은 사용되는 재료가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은 듀퐁사에서 만든 방탄 재료 케블라(Kevlar)를 사용한다. 한국은 네덜란드에서 만든 다이니마(Dyneema)를 방탄 재료로 쓴다. 둘 다 착용하면 무겁고 뻣뻣하다는 단점이 있다.
아무튼 디오나니아의 잎사귀는 크기에 비해 무척 가볍다.
“흐음, 이걸 이용해 방탄복을 만들면 가볍다는 장점은 있겠네. 근데 어떻게 하지? 섬유질 추출부터 해야 하는데.”
한참을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다. 박근홍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그 역시 아는 바가 없다.
“참, 인사부 이준섭 차장님, 발이 넓다고 했지?”
언젠가 읽었던 사보에 기록되어 있기를, 재학 중 천지대학 총학생회장을 역임했고 졸업 후엔 동기회 회장을 맡았다고 되어 있다.
머리가 좋아져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사소한 내용이 떠오른 것이다.
“인사부 이준섭 차장님이시죠?”
“네, 김 전무님.”
음성이 깍듯하다.
“잠시 뵈었으면 하는데 제가 내려가도 될까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 당연히 제가 올라가서 뵈어야죠. 지금 출발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하면서 허둥지둥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네, 그럼 잠시 후에 뵙시다.”
이준섭 차장이 전무실로 온 것은 5분도 지나지 않아서이다.
“부르셨습니까?”
고개까지 깍듯하게 숙이니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조직의 위계질서를 파괴할 수 없는 입장이다.
“네, 자리에 앉으세요. 제가 이 차장님을 뵙자고 한 건 부탁드릴 게 있어섭니다.”
“말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