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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의 팔찌-361화 (361/1,307)

# 361

“호호! 네에, 고맙습니다.”

지현이 애교스런 웃음을 지으며 꽃게탕을 상 가운데에 놓았다. 그리곤 받쳐 들었던 쟁반을 상 밑에 밀어놓으려 할 때 아버지가 입을 여신다.

“허험,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 했는데…….”

잠시 말허리를 끊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내 나이 올해 60인데 아직 며느리를 못 봤지. 그런데 이렇게 예쁜 새아기가 우리 집에 들어오려 하는구나.”

“……!”

대체 뭔 소리를 하시려는 것인지 몰라 모두 대꾸 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우리 아들 현수가 태어난 지 이제 30년에 접어드는구나. 그동안 설날 말고는 큰절 받아본 적이 없구나.”

아버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어머니가 중간에 끼어든다.

“그래, 밥 먹기 전에 아버지께 둘이 큰절 한번 올리거라.”

“네에?”

현수의 말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나란히 서서 부모에게 올리는 큰절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현은 달랐다.

“네에, 아버님! 저도 그동안 아버님께 큰절 올리고 싶었는데 못해서 아쉬웠어요. 이제라도 올릴게요.”

“오냐!”

“어머니께도 따로 절을 올리겠어요.”

“아암, 그래야지. 그래, 나도 아들 내외 절 한번 받아보자.”

‘끄으으응!’

점입가경이다. 그리고 기호지세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아버지는 상 옆에 방석을 놓고 앉았고, 지현이 그 앞에 서 있다.

어머니는 예쁜 새아기 무릎 상할까 싶다면서 방석 두 개를 얼른 앞에 밀어 넣는다.

“아, 뭐해? 새아기 기다린다. 어여 곁에 서거라.”

“네? 아, 네에.”

현수는 떠밀리듯 지현의 곁에 섰다.

“아버님, 아버님처럼 좋은 분을 시아버지로 모시게 되어 정말 기뻐요. 앞으로 잘할게요. 예쁘게 봐주세요.”

“오냐. 나도 네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온다니 참으로 기쁘구나. 언제 날 잡아 잔치 한번 벌이자.”

“네, 아버님, 절 올릴게요.”

“잠깐!”

지현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는 순간 아버지의 시선이 현수에게로 향한다.

“이 녀석아, 너도 뭐라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네? 아, 네에. 아버지,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십시오.”

“뭐야? 지금이 설날인 줄 알아? 천지건설 전무이사 말주변이 뭐 이래? 새아기도 있으니 이런 땐 조금 멋있는 말을 해야 하는 거다. 한번 해봐.”

“킥킥킥.”

지현이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려 나직이 웃음 짓는다.

“끄으응! 알았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에라, 이 멋대가리 없는 놈아! 알았다! 어여 절이나 해봐.”

“아버님,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지현이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이마까지 들어 올린 후 천천히 내려앉으며 큰절을 한다. 현수는 할 수 없이 따라 했다.

마치 신혼여행을 다녀와 올리는 큰절 같다는 기분이다.

“호호, 이제 내가 절 받을 차례지? 호호호! 기분 좋다. 내가 이렇게 예쁜 며느리를 보게 될 줄이야. 현수야, 잘했다.”

“끄으응!”

“어머니, 절 너무나 예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 모실게요. 장담은 못 드리지만 식 올리고 1년 안에 꼭 손주를 안겨 드리겠습니다.”

“뭐어? 손주? 호호호!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래, 꼭 그렇게 해주렴. 더도 말고 딱 둘만 낳아주면 좋겠구나. 우리 집은 대대로 손이 귀하거든.”

“어머! 둘만 낳아서 되겠어요? 전 최소한 셋은 낳을 생각이에요. 넷도 좋고요. 그때 가서 애들 봐주기 힘들다고 그러지 마세요? 아셨죠?”

“오냐, 오냐. 셋이 아니라 삼십을 낳더라도 다 봐줄 테니 걱정 말고 순풍순풍 낳기만 해라.”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할 말이 아니기에 한마디 끼어들려다 말았다. 자칫 잘못되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는 걸 직감한 때문이다.

“어머니, 앞으로도 예쁘게 봐주세요.”

지현이 또 공손히 손을 모은다. 현수는 이번에도 할 수 없이 따라서 절을 올렸다.

“훌쩍, 이런 날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현수야, 잘했다. 그리고 새아가야, 고맙다.”

“……!”

갑자기 어머니가 훌쩍거려서 분위기가 싸해진다. 하여 어찌 대응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어머니의 말이 이어진다.

“우리 앞으로 사이좋게 잘 살아보자꾸나. 나도 장담은 못하지만 좋은 시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하마.”

“네에, 어머니. 저희도 잘 모실게요.”

기다렸다는 지현의 화답이 이어졌다.

“끄응!”

현수는 또 한 번 나직이 침음을 삼켰다.

모든 게 확실하게 결정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강연희와의 미래를 꿈꾸는데 집에선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여기다 대고 강연희가 있다고 하면 난리법석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지현은 상심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어머니와 아버진 난감하고 민망한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기분 좋아하는데 단숨에 판을 깰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현수는 난감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기호지세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연희에게 헤어져 달라고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끄응! 연희 씬 어쩌지? 이게 대체 뭐야? 나 참, 진짜 미치겠네. 어쩌지? 끄으응!’

현수의 뇌리로 온갖 상념이 스칠 때 지현이 말을 건다.

“현수 씨, 어디 불편해요? 안색이 안 좋아요.”

“그래. 나도 그래 보인다. 어디 아픈 게냐?”

아버지가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왜 그래요? 낯빛이 자꾸 바뀌어요.”

“그, 그랬어요? 난 괜찮은데.”

얼른 얼버무리고는 상 쪽으로 이동했다.

“아버지, 어머니, 애써 만든 음식 식겠어요. 진지 잡수세요. 지현 씨, 지현 씨도 이리 와서 같이 들어요.”

“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다가가 현수의 곁에 다소곳하게 앉는 지현이다. 왠지 내숭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현수의 곁에 앉는 것만으로도 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아버님! 그게 제가 발라 드릴게요.”

아버지의 젓가락이 굴비로 향하자 지현이 먼저 그것을 집어 든다. 그리곤 가시를 발라내 먹기 좋게 한쪽에 놓는다.

“고맙구나.”

“고맙기는요. 당연하죠. 아버님, 갈비찜도 드세요. 고기가 아주 연해요.”

“맞아요. 새아기가 사온 걸로 요릴 했는데 고기가 아주 연하고 맛있더군요. 양념도 잘 배어들었구요.”

“그래? 허험! 오늘 내 입이 호강하는구먼.”

어느새 지현이 갈비찜에서 고기 부분을 찢어내어 아버지 앞의 접시에 놓는다.

“아버님, 약주 한잔 올릴까요?”

“술? 그래,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하는 것도 괜찮지.”

“네. 그럼 올릴게요. 근데 조금 독할지 몰라요.”

지현이 주전자를 집어 드는데 어머니가 한 말씀 거든다.

“새아기가 한산 소곡주를 가져왔네요.”

“한산 소곡주? 한번 맛보면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맛있다고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는 불리는 그거?”

“네, 아버님. 오늘 여기 온다고 하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아버님 가져다 드리라고 주셨어요.”

“아, 그래? 아이구, 이거 황송해서 어쩌나? 고등법원장님이 보내신 술도 다 맛보고. 집에 가거든 아버님께 정말 고맙다고 말씀드려 다오.”

“네에, 아버님.”

말을 마친 지현이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따른다.

6장 어찌하리오!

쪼르르르륵―!

잔이 채워지자 지현의 시선이 바뀐다.

“어머니도 한잔하셔야죠?”

“아암! 내가 술은 즐기지 않지만 오늘은 한잔해야겠다.”

어머니의 잔에도 술이 따라졌다.

“현수 씨도 한잔하세요.”

“아이고, 아니다. 오늘 새아기 힘들었는데 이따 데려다 주려면 운전해야지.”

어머니가 만류하신다. 하지만 지현은 주전자를 내려놓지 않았다.

“어머니, 오늘 현수 씨 생일이에요. 그러니 딱 한 잔만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 금방 갈 거 아니니까 한 잔은 괜찮을 거예요.”

“그, 그러냐? 그래, 그럼 그래라.”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상 위의 잔을 들어 현수에게 건네곤 조신하게 술을 따른다.

쪼르르르륵―!

술을 따라주는데 뻘쭘하게 있는 게 뭐해서 한마디 했다.

“고마워요. 애써줘서.”

“고맙기는요. 당연한 일인 걸요. 헤헤, 그리고 저도 한잔 주셔야죠. 어머니, 아버지, 저도 한잔해도 되죠?”

“그럼, 그럼! 그래, 새아기에게도 한잔 따라주려무나.”

“네.”

모두의 잔이 채워지자 아버지가 잔을 든다.

“오늘 생일을 맞은 우리 아들 현수의 생일을 축하한다. 새아기가 있어 더욱 기쁘구나. 너희 둘을 위해 한잔 마시마.”

쭈우욱―!

아버지가 단숨에 잔을 비우자 어머니가 입을 연다.

“내년엔 손주 보기를 기대하며, 생일 축하해, 우리 아들! 그리고 예쁜 새아가야, 이 자리에 네가 있어 정말 즐겁구나. 그런 의미로 한잔 마시마.”

어머니도 잔을 비우자 지현이 잔을 부딪치며 한마디 한다.

“생일 축하해요.”

간결한 말이었지만 마주친 시선 속으로 무수한 메시지를 보낸다. 정감 어린 눈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싱긋 웃어주었다.

“고마워요.”

“자아,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보자꾸나.”

“호호, 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후식으로 차도 마시고, 잠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머니가 현수의 앨범을 들고 나온 때문이다.

“현수 씨, 이거…….”

설거지를 마치고 현수의 방으로 올라온 지현이 뭔가 내민다.

“뭐예요?”

“생일 선물이요.”

대꾸 대신 받아서 포장지를 뜯었다.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뜻밖에도 앨범이었다. 내용물은 하나도 없다.

갓 서른이 된 남자의 생일 선물로는 적합지 않다.

“현수 씨, 전무이사님 되면서 돈 많아진 거 알아요. 그래서 비싼 선물보다는 의미 있는 선물을 생각해 보았어요.”

지현이 말을 하는 사이에 앨범을 펼쳐 보았다. 마지막 장에 곱게 접은 쪽지 하나가 끼워져 있다.

이 앨범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담겼으면 좋겠어요. 늘 행복한 모습이길 바라구요.

갓 서른이 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저의 모든 마음을 담아 평생토록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쪼오옥―!∧∧♥―지현 드림.

“……!”

현수는 순간적인 전율을 느꼈다. 글 속에 담긴 진심이 그대로 전달된 때문이다.

이때 곁에서 같이 쪽지를 보던 지현이 살그머니 기대온다.

현수는 말없이 어깨를 보듬어 안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의 지고지순한 순정을 마다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수 씨…….”

“날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둘은 아무런 말도 없는 침묵 속에서 마음과 마음을 이었다.

* * *

2013년 9월 29일 일요일.

“흐음, 이거 때문에 그런 건가? 배기 과정이 원활하면 흡기 또한 나아지겠지? 그럼 그냥 나가는 것보다는 와류가 되어 나가는 게 더 깔끔하려나?”

오늘 새벽 현수는 일요일이지만 일찍 이실리프 무역상사로 출근했다. 부모님과의 대면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지현은 밤늦도록 현수의 방에 머물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어젯밤 지현은 현수가 차고에서 꺼낸 스피드를 보곤 탄성을 냈다. 유려한 디자인 때문이다.

타고 가면서도 좋다고 계속 칭찬이었다.

지현을 데려다주고 귀가한 현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마음의 갈피를 잡기 힘들었던 때문이다. 밤새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결론 내리는 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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