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
그런데 결혼식 날짜 잡자고 할 것이 뻔한 아침 식사 자리가 어찌 편하겠는가! 하여 일찌감치 나선 것이다.
사무실에 와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골치가 아팠다. 그러다가 엔진을 분해한 것이다.
아무튼 책상 위의 엔진을 바라보는 현수의 눈빛은 진지했다. 비약적인 연비 향상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눈빛이다.
출근하면서 집중해서 들어본 소리를 떠올린 현수는 엔진의 메커니즘과 그것을 대입해 보았다.
배기가 원활하지 못한 것이 원인인 듯싶어 다양한 방법으로 엔진을 개조하는 중이다.
“일단 해보자.”
마음을 정한 현수는 판금 재료들을 꺼내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번 경험했기에 어디에 어떤 마법을 적용시켜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그렇기에 제법 능숙해진 솜씨다.
“흐음, 이제 다 되었네.”
첫 번째 엔진 조립을 마친 현수는 차례로 조금씩 마법의 강도와 구현 위치를 바꿔가며 조립했다.
“박 대표님, 김현수입니다.”
“네, 김 전무님.”
“제 사무실의 엔진 좀 가져가십시오.”
“헉! 벌써 손을 다 본 겁니까?”
“네. 이번 것엔 제가 번호를 매겨놓았으니 연비 테스트를 해보시고 번호별로 결과를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곧 사람을 보내지요.”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니 수출이든 내수든 판매되는 차에는 장착하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통화는 간결했다. 이게 남자들의 통화 방식이다. 여자들처럼 구구절절 주변상황까지 자세히 묘사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사람 모두 현수와 박 대표처럼 통화한다면 전화 요금 걱정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똑, 똑, 똑!
“사장님!”
“네, 들어오세요.”
들어선 이는 이은정 실장이다.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귀가하면서 현수가 출근한 걸 알고 부랴부랴 내려온 것이다.
“사장님, KBC 방송국에서 전화가 와 있습니다.”
방송국이라는 소리에 현수는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천지건설 전무가 된 이후 이실리프 상사와 이실리프 무역상사, 그리고 천지건설로 심심치 않게 전화가 걸려온다.
방송국, 신문사, 잡지사 등등에서 걸려오는 것이다. 100% 인터뷰 요청이다. 그때마다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엄청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오고, 그걸 받는 사람이 지칠 지경이다.
계속해서 거절을 하니 나중엔 두고 보자는 식의 협박도 한다. 그렇기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들, 사람 되게 귀찮게 구네요. 그죠?”
“……!”
이은정 실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것이 소원이다. 그래서 출연하려고 기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현수는 정도 이상으로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이 실장은 내심 인터뷰를 하길 바란다. 그러면 더 이상의 인터뷰 요청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김현수가 더욱 유명한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때 연모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사장님이다. 그러니 더욱 유명해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전화, 어떻게 할까요?”
“너무 바빠서 시간 내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현수가 다이어리를 펼치고 앉자 은정이 물러간다. 그렇게 2∼3분쯤 지났을 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똑, 똑, 똑!
“네에.”
“사장님, KBC 방송국의 이인철 PD라는 분이 사장님과 꼭 통화를 해야겠다고 자꾸 전화하시는데 어쩌죠?”
“네? 누구요? 방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현수를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인철 PD님이라고 해요.”
“이인철 PD라면…….”
“요즘 KBC에서 새로 방영되는 주말 드라마 ‘신화창조’ 혹시 보세요? 그거 연출을 담당하는 PD라고 하셨어요.”
“분명 이인철이라고 했죠?”
“네.”
“그렇다면 통화하겠습니다. 바꿔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은정 실장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분인지 환히 웃으며 물러갔다.
잠시 후, 현수가 전화기를 들자 낯익은 음성이 들린다.
“여보세요.”
“여어, 국민 김 전무! 나 이인철이야. 혹시 나 기억해?”
“설마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셨던 이 중위님인 겁니까?”
“하하! 기억하는군. 그래, 나 이인철이야.”
“충성! 오랜만입니다, 이 중위님.”
현수는 매우 반색하며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이인철 PD는 현수가 군복무를 할 때 국방과학연구소에 근무하던 학사장교 출신 간부였다.
행정장교였는데 신병일 때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현수가 상병이 될 때 예편되어 가면서 방송국에 취직했다는 말을 했다. 그 후론 연락이 끊겼던 사람이다.
“충성은 무슨, 이젠 예비역인데. 반갑다. 잘 지냈지?”
“그럼요. 이 중위님도 잘 지내셨지요?”
“그럼, 잘 지냈지. 요즘 드라마 찍느라 정신이 없어서 네가 국민전무가 된 걸 알면서도 전화 못했다. 늦었지만 축하해.”
“하하, 네에. 감사합니다.”
“내가 김 상병, 아니, 김 전무를 만났으면 싶은데 시간 내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휑하니 달려가겠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하는 소리다.
“달려오긴,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니 내가 가지.”
“아닙니다. 제가 가죠.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가야 하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아닙니다. 제가 갑니다. 어딘지 말씀만 하십시오.”
“고맙군. 그럼 오늘 점심때쯤 방송국으로 와. 우리 방송국 어디에 있는지 알지? 근처에 와서 전화하면 곧장 나갈게.”
“네, 조금 있다 나가겠습니다. 점심 같이하죠.”
“그래, 그러자. 조심해서 와라.”
“네.”
형제가 없는 현수에게 친형처럼 살갑게 이것저것을 챙겨주던 사람이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알고는 가끔 간식 사 먹으라고 돈도 찔러줬다.
외출이나 외박 기회가 있어도 집에 가면 부모님이 돈 쓰신다는 걸 알고 매번 사양해도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리곤 데리고 나가 저녁도 사주고, 술도 사줬다. 때론 당구도 쳤고, 볼링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인철 중위 덕에 현수는 테니스도 쳐 봤고, 기타 치는 법도 배웠다. 주말마다 불러내서 형제처럼 보낸 결과이다.
그렇기에 현수의 얼굴엔 반가운 빛이 가득했다.
“여깁니다.”
현수가 손을 번쩍 들자 두리번거리던 이인철 PD의 얼굴이 환해진다.
“아! 그래, 오랜만이야.”
이곳은 여의도 KBC 방송국 근처 레스토랑이다.
그리고 이인철 PD는 얼마나 바쁜지 수염도 못 깎아 텁수룩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잘 지내셨지요?”
“나야 뭐……. 국민전무된 거 다시 한 번 축하해. 조금 전에야 기사를 자세히 읽어봤어. 대단해. 나 제대한 다음에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점프하는 거 훈련했나?”
“에구,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세스나기에서 낙하산만 달랑 메고 뛰어내렸다는 내용이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땐 너무 정신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냥……. 하여간 그렇게 된 거예요. 운이 좋았던 거죠.”
“흐음, 그래! 그나저나 점심은 뭐로 할까?”
“맛있는 거 드십쇼. 제가 사겠습니다.”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사야지.”
“이 중위님, 저 돈 많은 거 모르십니까?”
“돈? 아, 그렇군. 보너스만 100억이라고 했지? 연봉은 60억이고. 그럼 내가 얻어먹어도 되겠군.”
이인철 PD는 짐짓 능청을 떤다. 그리곤 말을 잇는다.
“그럼, 국민전무가 사는 점심 한번 먹어볼까?”
“하하! 네에.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잠시 후 둘은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가 아니다.
차만 마시고 자리를 바꾼 둘은 얼큰한 순댓국에 소주 한잔을 기울였다. 이인철 PD의 식습관을 따른 것이다.
분명 뭔가 부탁할 게 있어 보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이인철은 별다른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잘되었다며 칭찬만 할 뿐이다. 하지만 현수는 채근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을 때가 되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순댓국을 모두 비운 둘은 서비스로 주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 걸을까?”
“그러죠.”
걷다 보니 여의도 공원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보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잠시 후, 조명이 켜지고 뭔가가 촬영된다.
“참, 요즘 드라마 찍는다면서요?”
“그래, ‘신화창조’라는 드라마야. 미래의 후손이 찌질했던 조상에게 타임머신을 보내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지.”
“우와! 그거 재미있겠군요.”
현수는 신화창조의 주인공 이름이 자신과 같은 김현수라는 것을 모른다. 물론 단 한 번도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참신한 발상이라 여겨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래,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 전율을 느낄 정도였지. 소재가 탁월한 소설이야.”
“그래요?”
“그래. 너도 한번 읽어봐.”
“흠, 이 중위님이 칭찬하시니 다시 봐야겠군요. 저도 그 소설 좋아하거든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알타이 산맥의 봉우리를 부수는 부분이야. 미래에서 온 비행 물체가 구름의 진로를 막고 있는 산봉우리들을 무너뜨리지. 그 결과 구름이 통과하는 바람에 몽골에 유사 이래 처음으로 홍수가 발생되지.”
현수는 금방 그 뜻을 이해했다. 읽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을 신화창조의 작가가 구상해 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작가, 대단한 분이지요.”
“그래. 그래서 신화창조를 드라마로 찍을 생각을 했어. 근데 문제가 있어.”
“뭐죠?”
“2회까지 방영되었는데 생각보다 시청률이 너무 낮아.”
“왜요?”
“동시간대에 방영되는 경쟁사 드라마가 워낙 인기가 있어서야. 그거 끝나는 타임을 잡았어야 하는데 시간이 안 맞았어.”
“흐음, 그랬군요.”
“게다가 그 드라마는 톱스타들이 줄줄이 포진해 있어서 웬만해선 시청률을 올리기 힘들 정도야.”
“그렇군요.”
“아무튼 우리 드라마의 소재는 삼빡해. 스토리도 굿이고.”
“근데요?”
“주인공 남자 배우의 연기력이 조금 그래. 전엔 잘했는데 요즘은 왠지 어색해. 그래서 지금은 발연기의 제왕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지.”
“……!”
“게다가 스캔들까지 일으켰어.”
“스캔들이요?”
“그래. 더블로 악재가 겹친 거야.”
시청률에 일희일비하는 PD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다.
“그렇군요.”
“문제야. 차라리 주인공끼리의 스캔들이면 시청률이 올라가. 근데 엉뚱한 유부녀를 만나고 있으니……. 휴우!”
“속상하시겠네요.”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 나갈까 싶어 고심을 했어. 이번이 내 첫 연출인데 시청률이 바닥이면 다음을 기약하기 힘들거든.”
이인철은 맥 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요?”
“회사에서도 시청률 낮은데 또 하게 해주겠어?”
“그렇담 해결책을 찾아야겠네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카메오(Cameo)야.”
이인철이 모처럼 눈빛을 빛낸다.
“카메오요?”
“그래. 직업 연기자가 아닌 유명인사가 잠시 얼굴을 비추거나 배우가 평소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단역을 잠시 맡는 거 말이야.”
이 PD의 표정을 본 현수는 금방 의도를 알아차렸다.
“설마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