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363화 (363/1,307)

# 363

“그래. 나 좀 도와줘라. 요즘 시청률 때문에 매일 국장한테 깨진다. 국민전무 김현수가 카메오 출연을 해봐. 그럼 우리 드라마에 대한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할 거야.”

“……!”

“현수야, 오랜만에 만나서 기껏 이런 부탁이나 해야 하는 내가 참 원망스럽다. 근데 어떻게 하냐? 시청률 못 올리면 나 잘린다. 그러니 사정 좀 봐줘라.”

이인철 PD의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을 보고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입은 은혜도 있는데.

현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죠. 제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저, 정말?”

이인철 PD는 현수의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 보도국에 있는 동기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그렇게 번호를 알게 되었지만 전화를 걸기까지 정말 한참을 망설였다.

군에 있을 때 만난 작은 인연을 빌미로 카메오를 부탁하려는 자신이 가증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어찌할까 싶어 고심하며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마시던 이인철 PD의 귀로 누군가의 통화 내용이 들린 것이다.

“그래, 그동안 잘 있었지?”

음성을 들어보니 드라마국 국장이다.

“그래, 새로 런칭되었지. 그래, 신화창조! 시청률이 너무 저조해. 그거? 이인철이라고 이번이 첫 연출인 친구야. 그럼, 조연출 경력은 꽤 되지.”

이인철은 본인의 이름이 거론되었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누가 통화의 상대인지 가늠할 길 없는 내용이다.

“물론 M본부에서 동시간에 방영되는 것 때문이기도 해. 그런데 악재들이 겹쳐서……. 아무튼 시청률이 꽝이야.”

이인철은 칸막이 너머 국장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릴까 싶어 얼른 몸을 수그린 채 귀만 기울였다.

“그래, 그 친구 쓸 만하다 싶었는데, 2회 정도 더 두고 봤다가 시원치 않으면 연출자를 바꿔볼까도 생각해.”

이 대목에서 이인철은 식은땀이 흘렀다.

선배 PD 가운데 몇이 드라마를 찍다가 중간에 교체되었다. 그 이후 둘이 맡은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하찮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 출셋길이 딱 끊겨 버린 것이다.

“누구? 그래, 그 친구 괜찮지. 그래, 그래. 알았어. 2회만 더 두고 보자고. 그래, 시청률 떨어지면……. 그래, 한잔해. 알았어, 알았어! 글쎄, 나만 믿으라니까. 우리가 남이야? 오케이!”

통화하던 드라마 국장이 이동하는지 음성이 점점 멀어진다.

그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이인철은 현수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연락하게 된 것이다.

“그럼 제가 할 역할은 뭔가요?”

“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주인공이 우주로부터 쏘아져 오는 대전미립자들을 포집하여 차량용 배터리를 만들어.”

“그래서요?”

“그거 하나면 연료 보급 없이 1년 정도 운행이 가능하지.”

“우와! 대단하군요.”

현수는 아직 이 부분까지 읽지 못했기에 탄성을 냈다. 그리고 리터당 100㎞ 이상의 연비를 꿈꾸기에 눈을 번쩍 떴다. 기발한 아이디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태양으로부터 쏘아져 오는 대전미립자는 무료이고 무한히 얻을 수 있는 자원이다. 그걸 이용하여 연료 전지를 만든다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그래, 그걸 군용차에 적용해. 트럭 이외에도 장갑차 뭐 이런 것에. 그리고 외국으로 수출도 하지.”

“연료를 넣지 않아도 되는 차라면 수요가 엄청나겠군요.”

“그렇지. 자네가 맡을 역은 외국 장성들에게 대전미립전지가 적용된 장갑차를 소개하는 역할이야.”

“일반 직장인인가요?”

“아니. 중공업의 핵심인 전무이사 역할이지.”

“크크, 또 전무군요.”

“그래. 그래서 국민전무인 네가 맡기에 딱인 역할이야. 카리스마 넘치게 해줘야 하는데 잘해줄 수 있지?”

이인철 PD의 표정은 어느새 많이 풀어져 있었다. 출연을 승낙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쉰 결과이다.

“최선을 다해보죠. 근데 한 컷만 나오는 건가요?”

“아냐. 브리핑이 끝나고 리셉션을 하는 장면이 있어. 그때 외국 장성들과 대화하는 것도 있어.”

“외국어를 해야 하는 거군요?”

“그냥 대본에 있는 대로 입만 벙긋거려 주면 돼. 원어민 데려다 나중에 더빙할 거니까. 그러니 외국어는 걱정하지 마.”

“알았습니다. 녹화는 언제죠?”

“언제든 김 전무 편한 시간에 하자고. 이건 한참 뒤에나 방영될 장면이니까.”

“근데 나중에 나올 걸 왜 벌써 찍어요?”

“일종의 티저(Teaser) 전략이야.”

“티저요? 티저라면 상품 이름을 비롯한 관련 정보를 거의 알려주지 않아 호기심을 갖게 만들어 다음 광고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기법이잖아요.”

“그래. 요즘 화제의 중심인 김현수 국민전무가 나온다. 그런데 언제 나올진 모른다. 흥미로운가? 그럼 계속 본방 사수해라. 뭐, 이런 의미가 되겠지.”

“하하, 일종의 꼼수군요. 알았습니다. 전 오늘도 괜찮아요. 이 중위님 편한 시간에…….”

“근데 그 이 중위란 말 안 하면 안 돼? 예편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조금 그렇잖아.”

“아, 그렇죠? 그럼 이 PD님이라고 부를까요?”

“그건 아니지. 그냥 형이라고 불러.”

“형이요? 알았어요, 형. 이렇게 하면 되죠?”

현수는 오래전부터 이인철 PD를 형이라 부르고 싶었다. 그렇기에 두말없이 형이라고 한 것이다.

“하하! 그래, 아무튼 고맙다, 아우야! 너 같은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거든.”

“그래서 군에 있을 때 잘해준 거예요?”

“어쩌면……. 괜히 너한테 관심이 가더라. 그래서…….”

“그땐 정말 고마웠습니다. 많이 외롭던 시절이거든요.”

“그래, 고마워해 주니 기분 좋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녹화 준비하고 너한테 연락할게. 맘 변하기 없기다?”

“알았어요, 형. 근데 복장은 뭐로 준비하죠?”

“양복! 그냥 깔끔한 양복만 입으면 돼.”

“알았어요. 그럼 준비되는 대로 연락 주세요.”

“그래. 바쁜데 불러내서 이런 부탁이나 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형. 미안하긴요. 우리 사이에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형이 필요하다고 하면 카메오 아니라 엑스트라라도 할게요. 언제든 불러요.”

“고맙다. 나중에 한턱낼게.”

긴 말이 뭐 필요하겠는가. 서로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눈빛을 마주치고 있으니 이심전심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사는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연습해 올게요.”

“그래, 고맙다.”

헤어져 돌아오면서도 현수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인철 PD가 해줬던 것에 대한 보답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당도해 보니 벌써 이메일이 당도해 있다. 열어보고는 대사를 읽어보았다.

다음이 대사 내용이다.

“대전미립전지가 적용된 이 장갑차의 외부 장갑은 첨단 기술의 산물인 나노 수준에서 형성된 연금속 사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적의 포격으로부터 탑승자들을 완벽하게 보호합니다. 아울러 연료 보급 없이 작전을 펼칠 수 있으므로 운용 계획이나 작전 반경 또한 대폭 확대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은 후 시선을 들어 사람들을 둘러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곤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다음 대사를 시작하라는 지문이 있다.

“장성 여러분! 저희 중공업에서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국가에만 대전미립전지가 적용된 장갑차를 수출할 계획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국가만이 우리 대한민국의 우방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말을 마치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단상에서 내려서라고 쓰여 있다. 별로 어렵지 않다는 느낌이다.

이 대사에 앞서 대전미립전지가 적용된 장갑차의 제원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이 있다.

읽어보니 기술연구소에서 파견한 연구원이 등장인물이다.

몇 장을 넘겨보니 외국 장성들과 상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로 지문이 쓰여 있다.

원어민들이 더빙할 부분인 듯 괄호 치고 더빙이라 쓰여 있다.

세심히 읽어보았는데 몇몇 곳이 어색하다는 느낌이다. 하여 그걸 다듬었다.

이때 전화가 몸살을 앓는다.

부우우웅! 부우우우웅!

“어, 형!”

“대사 봤지? 너무 길면 말해. 줄여줄 수 있으니까.”

“아뇨.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내일 녹화할까?”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어요?”

“티저 영상이라도 뿌려야 하는 상황이라 그래. 너만 괜찮다면 내일 아침부터 찍고 싶은데 어때?”

“좋아요. 내일 어디로 가면 돼요?”

녹화 장소와 시간 등을 메모한 현수는 다시 한 번 대본을 읽어보았다. 이번엔 앞에서부터 꼼꼼하게 읽었다. 어떤 감정으로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7장 국민배우 김 전무!

“김현수 전무님이시죠? 어서 오십시오.”

“아, 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와서 아는 척을 한다.

“전 이 감독님을 보좌하는 조연출 강민호입니다.”

“아, 그래요? 반갑습니다.”

“감독님은 금방 오실 겁니다. 준비할 게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녹화장을 처음 보는 현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몇몇 시선이 쏠려 있다.

국민전무를 보려는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잠시 후에 녹화해야 하니 분장 먼저 하겠습니다. 절 따라와 주십시오.”

“그러죠.”

분장실로 안내된 현수는 곧 여러 여자에게 둘러싸였다. 어쩌겠는가! 얼굴을 맡기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창 볼터치를 하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민채린이에요.”

눈을 떠보니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생글생글 웃고 있다. 텔레비전을 잘 안 보는 현수이기에 누군가 싶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딘가를 떠올리고는 얼른 고개를 숙여줬다.

“아, 네. 김현수라 합니다.”

“저 아시죠?”

“네, 한누리 역할을 맡으신 주연배우시죠?”

찍었는데 맞은 듯하다. 민채린이 예쁜 웃음을 짓는다.

“어머! 아시는구나. 호호, 알아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김 전무님은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나으셔요.”

“그래요? 저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오늘 김 전무님 녹화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어요.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 오히려 제가 민채린 씨에게 사인을 부탁드려야죠.”

“제가 먼저 부탁드렸으니 여기에 사인 하나 해주세요.”

민채린이 매직펜과 작은 스케치북을 건넨다. 진짜 준비를 한 듯 새것이다.

현수는 국민전무가 된 이후 심심치 않게 사인을 했다. 그렇기에 능숙하게 지면을 채웠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민채린님께!

신화창조로 월드 스타가 되어 더 많은 영광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천지건설 전무이사 김현수.

현수가 스케치북을 건네자 민채린이 뒷장에 뭔가를 쓴다.

국민전무 김현수님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우리 자주 뵈어요.∧∧

―드라마 신화창조 한누리 역 민채린.

“감사합니다.”

현수가 종이를 받아 들자 민채린이 윙크를 한다.

“연기도 잘하실 것 같아요. 제가 지켜봐도 되죠?”

“하하, 네. ‘발연기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현수의 너스레에 민채린이 아름다운 웃음을 짓는다.

“호호! 호호호호!”

“어! 왔냐? 대사 다 외웠어?”

“어, 형. 다 외우긴 했는데 제대로 할진 모르겠네요.”

“마음 편히 먹어. 틀리면 다시 하면 되니까. 너무 긴장하지도 말고. 알았지? 마음 편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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