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
이인철 PD는 현수가 긴장하지 않도록 많은 말을 해줬다. 그러면서 어찌 녹화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스텝들의 부산한 움직임 끝에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현수는 호텔 세미나 룸 같이 꾸며진 세트의 단상에 올랐다. 투명 아크릴로 제작된 연단에는 마이크가 놓여 있다.
천장과 좌우에서 쏟아지는 조명 때문에 이 PD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잠시 기다렸다.
“큐―!”
드디어 사인이 떨어졌다. 그 순간 현수의 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사 역시 시작되었다.
“여러분! 대전미립전지가 적용된 이 장갑차의 외부 장갑은 나노 수준에서 형성된 연금속 사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적의 포격으로부터 탑승자들을 완벽하게 보호합니다.”
현수는 잠시 말을 끓었다. 참석자들의 집중을 유도하는 몸짓이다. 그리곤 침착한 표정으로 나머지 대사를 쳤다.
“아울러 연료 보급 없이 작전을 펼칠 수 있으므로 운용 계획이나 작전 반경이 대폭 확대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또 대사를 끊은 현수는 시선을 들어 세미나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둘러보는 몸짓을 했다. 자연스럽다.
그리곤 다시 대사를 시작했다.
“장성 여러분! 저희 중공업에서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의 국가에만 대전미립전지가 적용된 장갑차를 수출할 계획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국가만이 우리 대한민국의 우방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단상에서 내려섰다.
“컷―!”
짝, 짝, 짝, 짝!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친다.
“야, 현수 너! 전무 때려치우고 배우 해라! 어떻게 초짜가 NG 한 번 없이……! 대부분 굳어서 말도 못하는데……. 대단하다.”
“맞아요. 방금 너무 멋지셨어요.”
이인철 PD와 민채린의 말이다.
“다시 안 찍어요?”
“안 찍어! 완벽했어. 내가 기대했던 이상이야. 너 진짜 배우 해도 되겠다. 연기 한번 안 해보았을 텐데 어떻게…….”
“감독님, 우리 신화창조 남자 주인공 바꿔요. 네? 여기 계신 김 전무님이 맡으시면 될 것 같아요. 주인공이랑 이름도 똑같잖아요.”
“에구! 왜들 이러십니까?”
“아냐. 이제 겨우 2회 나갔어. 속 썩이는 주인공 낙마시키고 너로 바꿀까?”
“헐! 누구 잡을 일 있어요? 저 바빠서 드라마 못 찍어요.”
“하긴, 연봉이 60억이지. 게다가 60살까지 보직과 정년 보장이고. 배우보다 훨씬 낫다.”
“……!”
민채린이 한마디 거들 만한데 말이 없다. 눈빛만 빛내며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
“녹화, 이걸로 끝 아니죠? 리셉션 장면은…….”
“응! 그건 바로 옆 녹화장에서 찍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민채린 씨, 우리 아우 좀 잘 지켜줘요.”
“네에, 감독님! 걱정 말고 얼른 일보세요.”
“그럼 부탁합니다. 시간 여유 있으니 방송국 구경 한번 시켜주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이인철 PD가 사라지자 민채린이 예쁜 입술을 연다.
“전무님, 가셔요. 제가 방송국 안내해 드릴게요. 장비 다 옮기고 세팅하려면 어차피 한참 기다려야 하거든요.”
“네, 그럼 그러죠.”
남들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혼자 앉아 있으면 뻘쭘할 것이다. 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민채린은 현수를 이끌고 다니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줬다.
출연자 대기실도 보았고,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라디오 부스도 구경했다.
“아효! 다리 아파라. 우리 여기서 좀 쉬어요.”
“네, 그러죠.”
매점에서 사온 음료수를 건넨 민채린은 현수의 곁에 앉았다. 이곳은 방송국 바깥의 벤치이다.
“아깐 정말 연기 잘하셨어요. 해본 적이 없으실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 정말 놀랬어요.”
“에구, 제 직책이 전무입니다. 전무가 전무 역할을 하는 거니까 그런 거죠.”
“그래도 실제와 연기는 다르잖아요. 정말 대단하세요.”
“이렇게 자꾸 칭찬만 해주시면 저 불편합니다.”
“호호! 그래요? 그럼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혹시 애인 있으세요?”
“네에? 애인이요?”
민채린의 물음에 동시에 두 여자가 떠오른다. 강연희와 권지현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얼굴이 생각난다.
이리냐 파블로비치 체홉이다.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의 아름다운 얼굴도 떠올랐다.
현수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자 민채린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치며 다시 물었다.
“애인… 없어요?”
“네? 아, 아뇨. 애인 있습니다.”
“칫! 없으면 좋은데…….”
“네?”
민채린이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무님처럼 잘난 남자에게 애인이 없으면 이상한 거죠?”
“에구, 잘나기는요, 그저 운이 좋아 어쩌다 보니 전무가 된 거지요.”
“그래도요. 저 전무님이 마음에 들어 애인이 없다고 하면 확 사귀자고 말하려 했단 말이에요.”
“네?”
“솔직히 말해 저, 전무님에게 반했어요. 어쩜 그렇게 멋있으세요? 아깐 진짜 너무 멋있었어요. 아!”
현수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설마 부러울 것 없는 여배우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채린은 요즘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몸매, 그리고 상큼한 미소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다.
텔레비전을 잘 안 보기에 현수는 모르지만 하루에도 최소한 열두 번씩은 각 방송사 CF에 나오는 톱스타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연기력도 인정받아 장래가 촉망된다.
게다가 깨끗하고 예의 바른 행실로 거의 모든 선배 연기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여배우가 대시하려 했다니 멍한 것이다.
이는 조금 전 현수의 연기 때문이다.
불과 1∼2분 정도 되는 짧은 녹화였지만 현수에게서 뿜어지는 아우라는 대단했다.
기왕에 도움이 되려고 녹화를 하는 거라면 확실한 게 낫다 싶어 일부러 뿜어낸 아우라다.
하긴 8써클 대마법사가 마음먹고 뿜어내는 아우라가 어찌 평범하겠는가!
아직 방영되지 않았지만 현수가 등장하는 티저 영상은 수없이 반복 재생된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의 모든 여자들이 보고 또 본다.
현수에게서 뿜어지는 아우라가 분위기를 압도하는 그 느낌이 전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 전무님, 애인이랑 잘 안 되면 저한테 꼭 연락해 주세요. 아셨죠? 언제든 전화만 주시면 총알처럼 튀어나갈게요.”
“……!”
“제가 나중에 전화 드려도 되죠? 참, 아직은 안 되겠네요. 알았어요. 전화는 자제할게요.”
민채린은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인다. 이런 모습조차 귀엽고 섹시하다.
하지만 현수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지현과 연희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채린까지 추가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때 전화가 왔다. 이인철 PD다.
“김 전무, 녹화 준비 다 됐어. 녹화장으로 와. 채린 씨하고 같이 있지? 어딘지 모르면 물어봐.”
“네, 알았습니다.”
현수가 당도한 녹화장엔 파티 음식이 차려져 있고, 여러 외국인들이 군대 정복 차림으로 서성이고 있다.
“김 전무, 이번엔 움직이면서 녹화할 거야. 조연출이 동선을 알려줄 테니 잘 기억해. 알았지?”
“네, 알았습니다. 그리고 외국어 대사 말이에요.”
“참, 그거, 영어 대사는 읽을 줄 알 테니 대강대강 해. 불어와 독어, 그리고 러시아어는 대사 밑에 한글로 쓰여 있지? 그거 대강 얼버무려. 나중에 더빙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스탠바이가 되자 부산스럽던 녹화 현장이 고요해진다.
그와 동시에 실내악 4중주단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음률이 녹화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큐―!”
“로빈슨 장군님, 저희 장갑차를 보신 소감이 어떠셨습니까?”
와인 잔을 든 현수의 영어 물음에 50대 중반 백인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 기술연구소에서 설계하고 중공업에서 만든 겁니다. 모든 게 마음에 듭니다. 나는 이번 거래를 지극히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요?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연회를 즐기시길.”
말을 마친 현수가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스위스군 정복을 입은 흑인 장성이 잔을 들며 웃음 띤다.
이인철 PD는 이 부분에서 일단 ‘컷―!’을 외치려 했다.
이제부턴 불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 부분이기에 현수에게 대사를 확인시켜 주려는 배려이다.
하지만 현수는 자연스럽게 흑인 장성의 명찰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엔 ‘Carel Hubert de Villeneuve’라 쓰여 있다.
“빌르너브 장군님, 파티는 즐거우십니까?”
“오, 김 전무님, 불어가 매우 유창하십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스위스에 가급적 많은 장갑차를 배정해 줄 것을 요청하면 들어줄 것입니까?”
“하하, 네. 사정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배려해 드리겠습니다. 스위스는 대한민국의 우방이니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국과 스위스의 우정이 앞으로도 영원하길 바라겠습니다.”
“네, 파티를 즐기십시오.”
현수가 또 시선을 돌렸다. 이인철 PD는 ‘컷―!’을 외쳐야 하나 고심했다. 이번엔 독일어 회화이기 때문이다.
‘대사를 다 외웠나? 근데 조금 전 그 불어는 뭐야? 마치 프랑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제대로 된 불어인가?’
이인철 PD의 궁금함은 오래갈 수 없었다. 현수가 다음 대사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 장성의 가슴엔 ‘Christian Albert von LÖwenburg’라 쓰인 명찰이 붙어 있다.
“뢰벤부르크 장군님, 이 자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독일인이 말하는 것으로 들릴 정도로 유창한 독일어이다. 뢰벤부르크 중장은 현수의 독일어 발음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말씀을……. 초청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현수는 대본에 따라 다음 대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뢰벤부르크 중장 역할을 맡은 외국인이 순서에 없는 입을 연다.
“우리말이 아주 유창하시군요. 언제 공부하셨습니까?”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조금 익힌 겁니다. 칭찬해 주셔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우리 독일인만큼 유창합니다.”
여기까지는 소위 말하는 애드리브이다. 대본과 달라 ‘컷―!’을 외치려던 이인철 PD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느껴진 때문이다.
“이번에 많이 주문하십시오. 대전미립전지가 충분히 확보되기 전까지는 향후 수출 계획이 없으니까요.”
“오! 귀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 수 있는 한 최대한 구매하려 하고 있습니다.”
“네, 좋은 성과 있으시길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뢰벤부르크 중장이 환한 웃음을 짓는다.
현수는 그와 잔을 부딪친 뒤 와인을 조금 마셨다. 그리고 목례를 하고 뒤로 돌아선다.
거기에도 훤칠한 장성 하나가 있다.
Василий Смирнов(Vasily Smirnov) 러시아군 합참부의장이다. 현수는 자연스럽게 러시아어로 인사를 했다.
“스미르노프 장군님, 반갑습니다. 저희 회사 세미나와 리셉션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오! 우리말을 잘하는군요. 고맙소, 초청해 주어. 덕분에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네, 러시아와는 기술 협력 등으로 조금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리셉션이 끝나더라도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 배려해 주니 고맙구려. 알겠소. 남아서 한국과 러시아의 우정을 쌓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