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
“하하, 네. 그런 의미에서 건배하시죠.”
“좋소. 한국과 러시아의 우정을 위해!”
“위하여!”
남아 있던 와인을 단숨에 비우자 바실리 스미르노프 합참부의장이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집어 든다.
“와인은 너무 맨송맨송하니 보드카로 한잔 더 합시다.”
“하하! 보드카, 좋습니다.”
현수가 웃자 술을 따라준다. 그리곤 자신의 잔도 채웠다.
“김 전무, 우리 러시아는 영토가 넓어 저런 장갑차가 많이 필요하다는 거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서 이번 수출 물량 가운데 러시아를 배려한 것도 있습니다.”
“오, 그래요? 그건 뭐죠?”
“겨울 기동 때 병사들이 춥지 않도록 난방 기능을 배가한 장갑차들이 따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아마 너무 더워서 러닝셔츠만 입고 있어야 할 겁니다.”
“하하! 그래요? 병사들의 사기가 진작되겠군요. 감사하오.”
“감사는요? 러시아는 대한민국의 우방입니다. 당연한 배려라 여겨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손님들이 많아서 이만……. 이따 묵으시는 호텔로 찾아뵙겠습니다.”
“좋습니다. 오늘 밤 남은 보드카를 다 마십시다.”
스미르노프 합창부의장은 ⅔쯤 남은 보드카 병을 들어 보이며 환히 웃었다. 러시아를 위해 별도의 버전을 준비한다니 긴말 필요 없기 때문이다.
대사를 마친 현수가 돌아섰다. 그리곤 카메라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 부분에서 클로즈업하기로 한 때문이다.
잠시 카메라가 돌았고, 이인철 PD가 외친다.
“컷―!”
“우와아아아!”
짝, 짝, 짝, 짝!
또 한 번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현수는 이제 연기가 끝났기에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때 이인철 PD가 다가왔다.
“야, 김현수.”
“왜요, 형?”
“너 영어, 불어, 독일어, 러시아어 회화 가능자였냐?”
“괜찮았어요? 어색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겨우 괜찮았냐고? 너 정말 대단했다.”
이인철 PD는 방금 전 컷을 외친 직후 뒤에 있던 작가들을 불렀다. 그리곤 현수의 외국어 발음에 대해 물었다.
아주 자연스럽다 느껴진 때문이다.
작가들은 더빙을 위해 자리에 있던 외국인들에게 다가가 현수의 발음에 대해 물었다. 그들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그리곤 자기들보다도 더 불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잘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들은 현수의 대사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써준 외국어 대사에 문법적 오류가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국어를 쓰는 사람보다도 더 문법적으로 정확했다는 뜻이다.
“형, 다시 안 찍어요?”
“그래. 어쩜 초짜가 NG를 한 번도 안 내냐? 그것도 롱 테이크7) 부분에서. 정말 잘했다.”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못해서 또 하고 또 하고 하면 어쩌나 했거든요.”
“근데 너 진짜 배우 해볼 마음 없냐?”
“에구, 형은…….”
이때 누군가가 끼어든다.
“김 전무님!”
“아, 민채린 씨. 아직 안 가셨어요?”
“가긴요. 전무님 연기하는 거 구경하느라 넋이 다 나갔어요. 책임져요. 저 정신없는 여자 만들었으니까요.”
“네?”
느닷없이 책임지라는 말에 현수의 말꼬리가 올라갔다. 이때 이인철 PD가 웃으며 끼어든다.
“호오, 그새 이렇게 친해진 거야? 책임질 정도로? 아까 휴식 시간에 둘이서 뭐했는데? 설마…….”
이인철 PD가 부러 눈을 가늘게 뜬다. 둘이서 어디 으슥한 데라도 가서 입맞춤이라도 했느냐는 표정이다.
이때 민채린이 발끈하며 항의한다.
“어머, 감독님! 그런 건 아니거든요! 감독님도 참…….”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욕심인데, 둘이 진짜 스캔들까지 났으면 좋겠다.”
“어머, 감독님! 왜요?”
“국민전무와 한누리 역의 민채린의 스캔들이라면 세간의 시선이 확 쏠리지 않겠어? 그럼 우리 드라마가 확 살잖아.”
“정말요? 그럼, 그래요! 감독님, 저 진짜로 김현수 전무님이랑 사귀고 싶어요. 같이 있으면 연기도 많이 늘 것 같아요.”
“헐!”
둘 다 농담일 것이다. 하지만 현수 입장에선 끔찍한 일이다.
두 여자 사이에서도 헤매는데 민채린 같은 톱스타까지 끼어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튼 민채린이 장난스럽게 현수의 팔에 팔짱을 끼며 환히 웃는다. 이때 어디선가 번쩍하는 플래시가 터졌다.
“……!”
누군가 싶어 셋의 시선이 움직였으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또한 녹화가 끝난 현장을 정리하느라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기에 누군지 찾을 수 없었다.
이날 저녁 신문에 대문짝만 한 사진 하나가 실린다.
현수와 팔짱을 낀 민채린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 밑엔 장문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국민전무 김현수, 신화창조의 히로인과 열애!
오늘 샐러리맨의 전설이자 천지건설 전무이사인 김현수 전무가 KBC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주말 드라마 ‘신화창조’에 카메오 출연을 했다.
김 전무가 맡은 역할은 나중에 등장할 중공업의 전무이사 역할이다. 녹화장의 김 전무는 발군의 연기력으로 단 한 번의 NG도 없이 촬영을 마쳤다.
촬영 장면 가운데에는 외국인과의 대화 장면이 있다.
현장에 있던 외국인들은 호주, 스위스, 러시아, 독일의 장성 역할이다.
후시 더빙을 위해 동원되었던 외국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 전무의 외국어는 완벽했다.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모두 모국어 수준이라는 후문이다.
한편, 현장에는 히로인 한누리 역할을 맡은 여배우 민채린이 있었다. 민채린은 김 전무의 완벽한 연기와 외국어에 매료된 듯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민채린은 김현수 전무와 팔짱까지 끼고 붙어 다녔으며 녹화 후엔 둘만의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편, 이 드라마의 연출을 맡은 이인철 PD는…….
기사는 지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장문이다.
인터뷰 요청을 극구 거절하는 김현수에 대한 국민들의 궁금증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이다.
기사 내용 가운데 일부는 추측 내지는 정정 보도 요청 대상이다. 민채린이 현수와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는 것 등이다. 여배우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입힐 수 있기에 즉각 소속사의 반발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어 기사를 쓴 기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은근히 불안했던 것이다.
아무튼 기사가 보도된 이후 세인들의 관심은 신화창조 티저 영상에 쏠린다.
당연히 드라마 홈페이지에 빨리 영상을 올려달라는 글들이 빗발친다. 이에 이인철 PD는 즉각 영상을 올린다.
손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기에 편집하는 데 걸린 시간이 불과 10분이니 가능한 일이다.
티저 영상을 올려놓고 불과 10분 만에 수천 개의 의견이 폭주한다. 한결같이 김현수 전무의 연기력 극찬이다.
외국어에 대한 의견도 엄청나게 많다. 물론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가 모국어 수준이라는 내용이다.
발음은 물론이고 억양까지 완벽한데 대체 어디서 이런 수준이 되도록 학습했는지 몹시 궁금해했다.
다음은 여자들이 올린 글 가운데 일부이다.
“아, 나 어떡해? 김현수 전무와 결혼하고 싶어졌어.”
“방금 애인에게 헤어지자고 전화했어. 너무 비교돼서 만나기도 싫어지네.”
“김현수 전무는 내 거니까 니들은 신경 꺼!”
“무슨 개소리! 나 드라마 보다가 방금 임신했어. 그러니까 김 전무님은 내 남자야.”
“근데 무슨 남자가 이렇게 멋있냐? 창피한 얘기지만 나 드라마 보다가 오줌 쌌어. 그래도 좋아!”
“헐! 미친뇬들! 나, 김현수 전무 마누라야. 왜 다들 내 거 넘봐? 썩 꺼지거랏!”
“아! 브리핑할 때 너무 멋졌어. 남자가 어쩜 그렇게 멋질 수 있지? 너무 좋아! 헤에, 나 정신 나갔음.∧∧”
“나 완죤히 미쳤어! 이제부터 김 전무는 내 사랑이야.”
8장 이놈 맛 좀 봐라
다음은 남자들이 남긴 게시물의 내용 가운데 일부이다.
“김 전무, 외국어 끝장이닷! 여기 러시아인데 러시아 사람보다 더 러시아어를 잘해.”
“여긴 프랑스야. 불어를 이렇게 잘하는 한국인은 처음 봐. 난 여기서 20년을 살았는데 김 전무는 대체 얼마나 산 거야?”
“여긴 독일! 독일어도 마더텅(Mother tongue) 수준이야.”
“김현수 전무는 대체 어디서 외국어를 배웠을까? 그 학원 가르쳐 주면 당장 내일 등록이닷!”
“이 다음에 취직하면 나도 저렇게 브리핑해야지.”
“연기력 끝내줌! 숨도 못 쉬고 보았음.”
“진짜 배우 해도 되겠다. 연기력 끝장! 주인공을 김 전무로 바꾸는 편이 훨 나을 듯!”
“맞아, 주인공 맡은 걔, 요즘 발연기의 제왕이잖아.”
“그건 분명한 미스캐스팅이지. 반면 김 전무의 티저는 울트라캡숑짱이야.”
“여친에게서 헤어지자는 전화를 받았음. 날 김 전무와 비교했단다. 미친……! 내가 어떻게 비교 대상이 되냐? 남자인 내가 봐도 끝장나게 멋있는데.”
“내 여친은 드라마 보다가 김현수 전무의 애를 임신했단다. 에구, 내 팔자야! 그래, 내가 키우마.”
“크크크! 김현수가 대세구나. 김현수를 국회로… 아니, 김현수를 청와대로!”
“청와대에 한 표! 무능한 현직 대통령보다 훨 나음.”
“민채린이랑 은근 어울림. 둘이 잘되었으면 좋겠음.”
“흐음, 김현수라면 민채린 양보할 수 있음. 난 경쟁 상대가 안 됨. 진짜 사나이! 멋진 사나이!”
올라온 글 가운데 악성은 거의 없다. 김현수 전무가 이룩해 낸 신화가 워낙 엄청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자들은 현수를 경쟁 상대에서 빼놓았다. 감히 바라보기 힘든 경지에 올라 있는 때문이다.
아무튼 소문은 번지고 또 번져서 티저 영상은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3억 회 이상 재생된다.
여자들이 보고 또 보고 하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힘입어 신화창조 3회의 시청률은 1.9%에서 수직 상승하여 26.8%가 된다.
이인철 PD가 기대했던 바로 그 효과이다.
이후로도 계속 시청률은 오른다. 워낙 흥미 있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 역할을 맡은 남자 탤런트가 갑자기 열연하기 시작한 때문이기도 하다.
현수의 완벽한 연기가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M본부에서 방영되던 드라마가 종영되자 또 한 번 시청률 수직 상승이 이루어진다.
이때는 무능하고 썩어빠진 국회의원들이 한누리호에 의해 납치되는 장면이 방영되던 날이다.
최종적으로 신화창조는 75.1%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다. 아울러 티저 영상 다시 보기 23억 5천만 회라는 엄청난 결과를 빚어낸다. 외국에서도 많이 본 결과이다.
참고로, 역대 최고 시청률은 M본부가 1991년에 방영한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이다. 59.6%를 기록했다.
2위 역시 M본부에서 1992년에 방영한 ‘아들과 딸’이다. 49.1%를 기록했다.
3위도 M본부에서 기록을 갖고 있다. 1999년에 방영된 드라마 ‘허준’이다. 48.3%였다.
그런데 ‘신화창조’는 역대 1위와의 차이를 엄청나게 벌려놓았다. 다시는 깨지지 않을 불후의 기록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세간의 예상과 달리 이 기록은 불과 1년 만에 깨진다.
회사에 엄청난 수익을 올려준 이인철 PD는 특별 진급과 더불어 차기작 선정을 보장 받는다.
이에 이인철은 ‘전능의 팔찌’라는 김현석 작가의 작품을 고른다. 지구와 아르센 대륙을 오가는 지구 유일의 마법사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