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
그와 동시에 경계의 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적어도 현수에게는 애완견에 버금갈 정도로 순둥이가 된 것이다.
“어디 보자.”
다시 한 번 상처를 꼼꼼하게 살핀 현수는 괜찮음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녀석의 배가 홀쭉함을 보게 되었다.
“배가 고프냐?”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린다.
“사람은 공격하면 안 된다. 알았지? 사람이 기르는 짐승도 가급적이면 잡아먹지 말고.”
현수의 말이 끝나자 눈만 껌벅인다.
“알아들었겠지. 아공간 오픈!”
현수는 손질된 닭고기를 꺼내주었다. 몹시 굶주렸는지 잘도 먹는다. 다섯 마리를 먹는 데 불과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많이도 먹는군. 더 주랴?”
이번엔 가만히 있다. 배가 부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동굴 안에 노린내가 진동하는구나. 워싱! 클린! 워싱! 클린! 에어 퓨리파잉!”
워낙 냄새가 심했기에 세척과 청결 마법을 반복해서 적용시켰다. 그리곤 노린내를 없애기 위한 공기 정화 마법을 펼쳤다.
현수의 손에서 뿜어지는 마나가 보이기라도 하는지 녀석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린다.
“나는 할 일이 있으니 나가서 놀아.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과 사람이 기르는 가축은 해치지 마라. 알았지?”
늑대는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밖으로 나간다.
“지겨운 일을 또 해야 하네. 앱솔루트 배리어, 타임 딜레이!”
결계를 치고 안에 들어가 마나 집적진 위에 앉았다. 그리곤 소모된 마나를 채워 넣었다.
전능의 팔찌의 마나석은 스스로 알아서 마나를 충진시키기에 남는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책을 읽었다.
“매직 캔슬!”
앱솔루트 배리어가 사라졌다.
“엉? 안 나갔어? 근데 그건 뭐냐? 헐!”
늑대 녀석이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 꼬리만 살랑거린다. 그런데 녀석의 앞에 시커먼 것이 있다.
뭔가 싶어 살펴보니 멧돼지다. 다 큰 놈은 아니고 이제 막 새끼 티를 벗은 놈이다.
“뭐야? 너 혹시 늑대였냐? 그리고 이거 나 먹으라고 잡아온 거야?”
현수는 이제야 눈앞의 동물이 늑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 녀석이 나직한 소리를 낸다.
크르르릉―!
맞는다는 듯하다.
“헐! 늑대구나. 그나저나 팔자에도 없는 멧돼지 고기를 먹게 생겼네. 지금은 배 안 고프니 나중에 먹자. 아공간 오픈.”
시커먼 아공간의 입구가 열리자 늑대가 움찔거린다. 놀란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멧돼지의 사체를 집어넣었다.
“이따가 줄게. 그나저나 지금 몇 시지?”
밖으로 나가보니 한밤중인 듯하다.
“할 수 없군.”
동굴로 되돌아온 현수는 AT―16의 런처를 어찌 얻을 것인가를 고심했다. 그러는 동안 늑대는 현수의 곁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시선만 주고 있다.
아무튼 문제점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게 해결되어야 갈 수 있는데…….”
라수스 협곡을 지나야 최종 목적지인 아드리안 공국까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스승인 멀린이 부여한 임무는 공국이 처한 위기를 해소시키는 것이다.
대륙 유일의 8써클 대마법사가 되었으니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전쟁 억지력을 갖게 될 것이다.
8써클 헬 파이어 한 방이면 웬만한 전장은 곧바로 정리된다.
라이세뮤리안의 화염의 브레스 못지않은 대량 살상 마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러 실린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300파운드짜리 활이 더해지면 감히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어떤 마법사도 2㎞ 이상 떨어진 곳의 적을 공격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수의 오러 실린 화살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면 기꺼이 체이탁을 쓸 것이다. 물론 적의 수뇌부만 골라서 저격하면 된다.
그래도 안 된다면 K―6까지는 꺼내서 쓸 생각이다.
웬만한 기사단쯤은 단숨에 걸레로 만들 엄청난 위력을 지녔다. 딱 한 번이라도 실제 사용이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의 도발은 없을 것이다. 죽기 싫은 건 누구나 같기 때문이다.
소드 마스터가 덤벼들어도 문제될 것 없다.
본인 역시 소드 마스터이다. 게다가 28명이나 되는 드래고니안과 대결하면서 엄청난 경험까지 쌓았다.
따라서 상대가 없어 경지가 정체되어 있는 웬만한 소드 마스터는 단숨에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라이세뮤리안만 어쩌면 공국으로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여겨진다.
“흐음, 아직 시간은 있겠지.”
멀린이 말하길 최하 1년은 버틴다 했다.
아르센 대륙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스승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지 이제 여덟 달 정도 된다. 아직 4개월 여유가 있다.
“흐음, 어떻게든 미사일 런처를 구하는 게 급선무이구나. 근데 어디서 구하지?”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여전히 답이 없다.
“난 간다. 넌 여기 있을 거야?”
늑대는 대답이 없다. 눈만 멀뚱멀뚱 뜰 뿐이다.
“조만간 다시 올 테니 이 근처에 머물고 있어라. 그리고 이건 네가 먹어.”
상할까 싶어 아공간에 넣어둔 멧돼지 사체를 꺼내주었다. 그리곤 곧장 텔레포트를 했다.
“비가 왔나?”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이실리프 무역상사 건물 옥상에 나타난 현수가 중얼거린 말이다.
“사장님, 대박이에요, 대박!”
“……!”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이 마주친 이은정 실장이 벌떡 일어난다. 그리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
“사장님, 대박이라고요.”
“대박? 뭐가요?”
“사장님이 출연하신 신화창조의 티저 영상 말이에요. 지금 그것 때문에 온통 난리가 아니에요.”
“그래요?”
현수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이은정은 애가 닳는지 후다닥 달려온다. 그리곤 곁에 있는 컴퓨터의 마우스를 잡고 몇 번 클릭한다.
국민전무는 연기자로 전직하라!
천지건설 김현수 전무이사가 신화창조에서 선보인 탁월한 연기력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극찬 받고 있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탁월한 맹인 연기를 보여준 알 파치노(Alfredo James Pacino)는 김현수 전무에게서 뿜어지는 아우라에 숨이 막혔다며 감탄했다.
영화 ‘레드 라이트’에서 심령술사를 연기한 대배우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로버트 드 니로는 김현수 전무를 만나면 연기자로의 전직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고 했다.
명배우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은 100년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한 연기력을 지녔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고 한다.
안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와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 잭 니콜슨(John Joseph Nicholson)과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 역시 비슷한 언급을 했다.
한편, 방송가와 영화계에서는 김현수 전무를 주연급으로 캐스팅하기 위한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기사는 엄청 길다. 인터뷰 요청 거절이 일종의 신비주의 전략이 되어버렸기에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내용이 시시콜콜 쓰인 때문이다.
“보세요. 정말 대박이에요, 사장님!”
“에구, 이 실장님, 그건 감독님이 잘 찍고 잘 편집해서 그런 거예요. 다시 말해, 만들어진 이미지란 뜻이에요.”
“어머! 아니에요. 여기, 여기 보면 신화창조의 이인철 PD님이 남긴 소감이 있어요. 한번 보세요.”
이은정이 스크롤바를 내려 뭔가를 클릭하자 화면이 바뀐다.
KBC 방송국 연예 프로그램 중 하나인 ‘방송가 요즘’이란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내용이다.
클릭만 하면 재생시킬 수 있는 화면이 있고, 아래엔 대담 내용이 쓰여 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이인철 PD님,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셨습니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먼저 천지건설의 김현수 전무님과의 인연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김현수 전무는 제가 복무를 했던 부대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김 전무는…….”
―중략―
“김현수 전무님의 연기력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네, 그날은 저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큐―!’ 사인이 들어감과 동시에 드라마 속의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삽시간에 바뀌더군요. 그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압도당했던 것 같습니다. 카메라 감독도 그랬다고 합니다. 저희 둘이 가만히 있는 동안 모든 장면이 녹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연출자로서 김현수 전무님의 연기를 칭찬하시는 건가요?”
“아뇨. 그냥 칭찬이 아닙니다. 김 전무의 연기력은 제 상상 이상입니다. 저와 함께 작업했던 다른 배우와 탤런트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김현수 전무의 연기력이 훨씬 더 뛰어납니다.”
“네에, 다른 배우들이 조금 언짢겠군요.”
“미안하죠. 하지만 제 솔직한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참, 김현수 전무의 외국어 연기는 어땠습니까?”
“그때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녹화된 것은 롱 테이크 장면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중간에 녹화를 멈추거나 그러지 않고 한 번에 찍은 겁니다.”
“아, 그래요?”
“네, 김현수 전무의 외국어는 이젠 다들 아시지만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불어나 독일어,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저도 ‘아! 지금 진짜 외국어를 말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컷―!’을 외치지 않은 겁니다.”
“그렇군요. 끝으로 김현수 전무님에 대한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방송사 사장이라면 김현수 전무를 전속 배우로 즉각 스카우트하겠습니다. 계약금 200억에 연봉 100억이라면 움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탐나는 배우입니다.”
이 말 아래에도 많은 글이 보였다.
“보셨죠? 보셨죠?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세요? 그런데 편집의 힘이라니요?”
“……!”
“전 사장님 연기하신 거 보고 울었어요. ‘이렇게 멋진 사람과 함께 근무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뻤거든요.”
“에구, 그만해요.”
은정이 살짝 흥분한 듯싶어 현수는 새삼 남세스러웠다.
“근데 김수진 씨와 이지혜 씨는 어디 있어요? 오늘도 외근 나간 겁니까?”
“네? 그, 그게…….”
이은정 실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민주영이 들어선다.
“아이고, 이거 누구야? 국민배우 김 전무!”
“뭐야? 너까지 날 놀리는 거야?”
“놀리긴, 나 진짜 감탄했다.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냐?”
민주영은 진심이라는 듯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끄으응!”
“암튼 대박이더라. 요즘 모든 신문이 네 얘기로 완전히 도배되고 있어. 너 밖에 나다니지 마라.”
“왜?”
“한번 사람들 눈에 뜨이면 최하 사인 1,000장은 해야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그, 그 정도냐?”
“그래, 완전히 네 얘기뿐이야. 너 나오는 티저 영상, 방송국 홈피에 올라온 지 오늘로 딱 3일째다. 그런데 조회수가 벌써 7,000만을 넘었어. 지금은 시간당 100만씩 늘고 있을걸.”
“그러냐?”
현수의 얼굴에 어둠이 내렸다. 앞으로 사회생활하기 어려워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아무튼 축하한다. 국민배우 김현수! 참, 나도 사인 하나 해주라. 본사 건물에 걸어놓게.”
“어머! 저도요, 사장님. 우리 할머니와 엄마도 사인 꼭 받아오라고 하셨어요.”
말을 마친 이은정은 아예 A4 용지 500장과 매직펜 열 자루를 들고 온다. 그리곤 쫑알거린다.
“그제와 어제 하루 종일 거래처에서 사장님 사인 받아달라는 전화가 빗발쳤어요. 보세요. 지금은 아예 전화길 내려놨어요. 벨 소리 때문에 업무를 못 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