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
“……!”
“제가 거래처 직원 명단을 드릴 테니 하나씩 써주세요. 안 그러면 저 그 사람들 등살에 못살아요. 아셨죠?”
“참! 나도 그것 때문에 왔는데……. 은정 씨, A4 용지 두 묶음 더 가져오세요. 이실리프 상사 직원 및 가족들도 사인해 달라고 난리거든요.”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고, 민주영과 이은정은 그런 현수를 보며 환히 웃는다.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김수진과 이지혜가 들어선다.
“어머! 사장님! 우와아! 우리 사장님, 너무 멋져요!”
“사장님! 진짜 최곱니다. 저 감동 먹었어요.”
둘의 손에는 각기 500장 들이 A4 용지 한 묶음씩이 들려 있다. 그걸 보는 순간 현수의 안색이 시커메졌다.
오늘 이곳에서 사인 2,500번을 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때문이다.
10장 마법은 이래서 편해!
“설마… 그거…….”
“사장님, 사인 부탁해요. 우리 과 선후배들의 전화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일을 못할 지경이에요.”
“저도요. 고등학교 동창은 물론이고 중학교 동창들까지 사장님 사인 받아달래요. 여기 명단 있어요. 꼭 좀 부탁드려요?”
“끄으으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앞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때 전화기가 진동을 한다.
부우우웅―! 부우우우우웅―!
번호를 보니 강연희이다.
“아! 연희 씨!”
“현수 씨, 어쩜 그럴 수 있어요?”
“네? 왜요?”
전화를 받자마자 타박하는 듯하기에 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민채린하고 찍은 사진이요. 다정하던데요?”
현수는 갑작스레 등에서 돋는 식은땀을 느꼈다.
“아, 그거요? 그건 녹화 현장에서 장난을 치다가…….”
현수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호호! 농담이구요.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회사에서도 난리예요.”
“그, 그래요?”
“네. 근데 지금 어디세요? 회사에 들어오셔야겠어요.”
“사장님 호출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천지건설 직원 모두 전무님 사인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끄으으응!”
현수는 또 한 번 침음을 냈다. 최소 A4 용지 네 묶음은 더 사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인사부에서 직원 명단 가져다 놓았대요. 시간 나실 때 들어오셔서 사인해 주세요. 특별히 제 건 큰 종이에 해주실 거죠?”
“네? 아, 네.”
“이따 봬요. 전 6시쯤에 회사로 들어갈게요.”
“네.”
전화를 끊은 현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에 사인 4,500번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암담했던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 내 것부터 해라.”
“어머! 민 실장님, 새치기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말씀드렸거든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먼저 디미는 놈이 임자지.”
“쳇! 계속해서 이럴 거예요? 그럼 알죠?”
“…깨갱! 소인, 찌그러졌습니다요.
이은정의 한마디에 민주영이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현수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다.
“아무튼 받아라. 하긴 해야 할 것 같다.”
민주영이 건넨 A4 용지를 받자 이은정과 김수진, 그리고 이지혜가 차례로 그 위에 얹는다.
맨 마지막으로 올려진 것은 매직펜 마흔 자루다.
현수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들고 있었다. 그러자 각자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 와중에도 민주영과 이은정은 닭살 윙크를 주고받으면서 애정 표현을 했다.
이때 전화가 또 울린다.
부우우웅―!
“네, 어머니.”
“오늘 좀 일찍 들어오너라.”
“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무슨 일은 아니고, 신부님이랑 수녀님, 그리고 신자들이 사인해 달라고 난리를 쳐서…….”
“……!”
설상가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이란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일찍 와! 한 500장 정도면 될 거야. 알았지?”
“끄응!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다시 울린다.
예감은 무섭다. 그리고 조금 전의 생각이 그대로 진행된다.
“아, 지현 씨.”
“현수 씨, 부탁드릴 게 있는데 어쩌죠?”
“말씀하세요. 뭐죠?”
지현이 하는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 부모님이 알게 되면 경을 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어, 죄송한 말씀인데… 사인 500장만 해주실 수 있어요?”
“사인 500장이요?”
“네, 지청 식구들이 하도 부탁을 해서요.”
“알았습니다. 해드려야죠.”
“고마워요. 사인해 주실 분들 성함은 조금 있다가 이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현수와 지현이 사귄다는 소식은 이미 서울중앙지검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이다.
지현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미스 최의 수다 덕분이다.
전에는 결혼 안 한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대시가 끊이지 않았다. 하여 지현이 근무하는 사무실에는 늘 싱싱한 꽃바구니가 하나쯤은 있었다.
남자친구가 있다지만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 아니기에 그런 시도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현수가 국민전무가 된 이후 모든 구애 행위가 단번에 사라졌다.
판사, 검사, 변호사에게도 현수는 아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로 비춰진 때문이다.
아무튼 지현의 애인이 국민전무라는 게 새삼스럽게 알려지자 사인을 부탁하는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구지청에선 직원 명단을 팩시밀리로 보내오기도 했다. 심지어 대구동부경찰서 소속 최장혁 경사도 사인을 부탁했다.
전화를 끊고 현수는 이를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루에 5,500장이나 되는 사인을 하려면 팔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낯빛이 하얗다.
끝도 없이 사인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던 것이다.
“끄으응! 할 수 없지.”
A4 용지를 들고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이거 언제 다 해? 내가 무슨 유명한 한류 스타도 아닌데.”
현수는 사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랴. 전 국민적 유명세는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다.
“휴우! 할 수 없지. 거절하지 못했으니… 하긴 해야 하는데 그냥 하려면 팔이 엄청 아프겠지?”
현수는 먼저 A4 용지 하나에 정성스런 문구를 써 넣고 사인까지 멋지게 해서 넣었다.
그리곤 그 위에 5,500장을 일렬로 쌓았다.
“퍼펙트 카피!”
뿜어져 나간 마나는 A4 용지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맨 위의 A4 용지에 문구와 사인이 나타난다.
후루룩 종이를 넘겨보니 모두 똑같다.
“마법은 이럴 때 정말 편해. 후후후.”
기분이 좋아진 현수는 이은정 실장 등으로부터 받은 명단을 펼쳤다. 그리곤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름 세 글자 곱하기 5,500을 하면 16,500자이다. 200자 원고지 82.5장을 빼곡하게 채워 넣을 분량이다.
글을 안 쓰는 사람에겐 끔찍하게 많은 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자세 잡고 명단 확인 후 이름 쓰기를 시작한 현수는 빠른 속도로 할 일을 마쳐 갔다.
명단이 없는 성당 식구들 것은 집에 가서 쓰면 될 것이다.
사인지 5,000장을 모두 완성시킨 현수가 사장실 밖으로 나가자 이은정과 민주영, 그리고 김수진과 이지혜는 얼른 고개를 숙인다.
각기 500∼1,000장씩 부탁했지만 모으고 나니 졸지에 엄청난 과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이, 민 실장! 왜 아직도 안 가고 여기 있어? 한가해?”
“아, 아니! 근데 사인지는 어떻게 됐냐? 내 거 먼저 해주면 안 될까? 직원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이구, 한심도 하셔라. 겨우 사인지 받으려고 천하의 민주영이 여기서 이렇게 개기는 거야?”
“……!”
“너, 솔직히 말해봐. 이은정 실장님하고 같이 있으려고 핑계 대고 온 거지?”
“아, 아냐!”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진짜 아니야.”
“좋아, 그럼 내가 사인 다 해주면 곧장 갈 거야?”
“그, 그래! 그야 물론이지.”
민주영이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와서 가져가.”
“정말? 벌써 다 했어?”
“속고만 살았냐? 하여간 사인 다 해놨으니까 들어와서 가져가세요, 모두들!”
“헉! 설마 우리 것까지 전부 다 하신 거예요?”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많은 걸 다 했다고요?”
“내 말이! 사장님은 무슨 슈퍼맨이라도 되세요?”
“말도 안 돼!”
각기 한마디씩 하는 걸 기다려 준 현수가 입을 연다.
“다시는 이런 부탁 받지 마세요. 아셨죠? 저 팔 떨어질 뻔했어요. 너무 아파서. 그리고 문구는 모두 똑같이 써놓았으니까 그런 줄 아세요.”
“어머! 진짠가 봐.”
“그러게. 그럼 한번 가볼까?”
“그래.”
남자 하나에 여자 셋이 우르르 사장실로 들어간다.
현수의 책상 위에는 부탁 받은 사람 별로 사인한 종이가 가지런히 쌓여 있다. 위에는 명단이 놓여 있다.
“헐! 진짜네.”
“뭐야?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쓰셨지?”
“그러게 말이야. 복사한 거 같아.”
“복사한 거 맞아. 근데 어떻게 하셨지? 사장님 방에는 복사기가 없잖아? 안 그래?”
“어머! 진짜 그러네. 그럼 복사한 건 아니라는 얘긴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쓰실 수 있지?”
“이건 뭐, 완전 인간 복사기네. 헐! 사인해 놓으신 것 좀 봐. 한 치도 틀리지 않아. 세상에!”
여직원들의 이야기에 현수는 뜨끔한 마음이 들었지만 부러 태연한 척했다.
“현수야, 고맙다. 이제 직원들한테 면이 좀 서겠다.”
어느새 자신이 가져갈 것을 들고 있는 민주영의 말이다. 아무래도 남자라 그런지 세세한 부분까지는 보지 않았나 보다.
“어서 가라. 가서 일 열심히 해라.”
“그래, 알았다.”
“참, 벌목 장비 수배 다 끝나서 발송한 거 맞냐?”
“그래, 보냈어. 신세계마리타임에 확인해 봐라.”
“알았다. 앞으로도 그런 일 잦을 거다. 요청 들어가면 재깍 처리해 줘. 나처럼.”
“알았어. 그럼 나 간다.”
민주영이 가자 이은정 실장 및 김수진과 이지혜는 사인지를 발송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에구, 괜히 출연해서는.’
속으로 투덜댄 현수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부재중 착신 전화가 있었고, 문자가 와 있다.
착신 전화부터 확인해 보니 강연희 대리이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권지현과의 일을 어찌 말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문자 역시 강연희 대리가 보낸 것이다.
긴급! 이틀 후 고속도로 공사 계약 체결식 거행. 내일 출국하셔야 한대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근데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예상치 못한 글에 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연희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한국을 잠시 떠나 있고 싶어서요. 비용은 제가 부담할 테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같이 출국하죠. 준비해 주세요. 비자 문제는 제가 해결할게요.
현수는 연희가 왜 떠나 있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쉽게 동반 출국을 결정한 것은 박 과장 때문이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연희에게 찝쩍대는 꼴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연희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수는 곧바로 콩고민주공화국 대사관에 전화를 넣었다.
“네에, 콩고민주공화국 대사관 민원실 김나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