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2
“그래도 굳이 양을 한정 짓자면 얼마나 됩니까?”
“글쎄요? 그건 생각을 안 해봐서……. 현재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보면 하루에 컨테이너 하나쯤 사용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하루에 컨테이너 하나 정도씩 처리하는 걸로 알고 그만큼 채취하도록 하지요.”
알베제 마을 사람들은 작업의 도사이다. 그렇기에 이제 겨우 열 살 먹은 아이도 어마어마한 양을 채취한다.
150여 명 가운데 아직 어린 20여 명을 제외하면 130명 정도 된다. 열세 명이 컨테이너 하나를 담당한다면 하루에 열 개씩 채취 가능하다.
이때 문득 케이상단의 알론이 떠올랐다. 알베제 마을을 떠나 테리안 왕국의 올테른까지 동행했던 상인이다.
그곳을 떠나기 직전 현수는 알론과 케이상단 올테른 지부장인 말링코에게 만드라고라를 구해달라고 했다.
그리곤 깜박 잊고 그냥 떠나왔다. 5개월 이상 지났으니 어쩌면 구해둔 것을 처분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알베제 마을엔 쉐리엔이 눈길 가는 곳마다 수북하게 자생한다. 어쩌면 올테른 인근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쉐리엔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컨테이너를 대량 구입하여 아공간에 담아 간 뒤 거기에 담아달라면 일이 편해질 것이다.
물론 모든 컨테이너는 보존 마법이 걸리게 될 것이다.
현수의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민윤서 사장이 웃는다.
“일단 그 정도면 됩니다. 하지만 그 양을 조금씩 늘려주십시오. 소문이 나면 더 많이 팔릴 테니까요.”
민윤서 사장은 이 시점에서 쉐리엔의 시판 가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원료가 풍부하지 못하다면 품귀현상이 빚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적절한 가격 설정이 필요해진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많이 채취하도록 해보지요.”
“참, 쉐리엔은 내일부터 TV 광고가 시작됩니다.”
“그래요? 좋은 성과가 있길 바랍니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하하하!”
민윤서 사장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곁의 김지우 박사도 빙그레 미소 짓고 있다.
11장 연희의 시련
현수와 나란히 앉은 연희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수심이 잠긴 듯하다.
이곳은 서울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연희 씨, 어디 불편해요?”
“아뇨. 괜찮아요.”
“근데 왜 그래요? 무슨 근심 있어요?”
“…….”
연희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볼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현수는 보지 못했다. 시선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상치 않다 느꼈기에 말없이 기다렸다.
출국 전 공항에서 만났을 때에도 연희는 이전과 달랐다.
전에는 지저귀는 종달새처럼 밝고 쾌활하며 상큼하고 사랑스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음울해 보인다.
현수는 켕기는 구석이 있기에 왜 그러느냐고 묻지 못했다. 권지현이란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아닌가 싶었던 때문이다.
세상이 발달하다 보니 인터넷은 별의별 정보를 다 쏟아낸다. 그리고 누구나 카메라 하나씩은 들고 다니는 세상이다.
다시 말해 권지현과 만나고 있을 때 누군가 사진을 찍었을 수 있다. 이걸 인터넷에 올렸다면 아마 엄청난 속도로 번져 갔을 것이다.
현수는 돈도 엄청 많고 초고속으로 출세한 국민전무이다.
당연히 누가 현수의 여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도를 지나칠 정도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의 로망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수는 인터넷을 즐기지 않는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자 할 때에만 접속하는 편이다. 접속하더라도 가십 따위엔 시선을 주지 않는다.
궁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없기에 올림픽이 열리든 월드컵이 개최되든 그에 관한 것은 클릭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튼 권지현과의 다정한 한때가 인터넷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보장을 못한다. 연희 입장에서 보면 먼저 고백해 놓고 다른 여자와 놀아난 꼴이다.
그렇기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연희는 좀처럼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하여 막 말을 걸려던 찰나 누군가가 톡 친다.
“저어, 혹시…….”
“네?”
시선을 돌려보니 스튜어디스이다.
“혹시 천지건설의 김현수 전무님 아니신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왜요?”
“어머! 영광이에요.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죠.”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튜어디스가 얼른 종이와 펜을 내민다.
“성함이……?”
“민숙이에요. 박민숙!”
“네, 박민숙 씨.”
의례적인 문구를 쓰고는 쓱쓱 사인을 해서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김 전무님 팬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현수가 웃음 지으며 고개를 까닥이자 스튜어디스가 물러간다. 그리고 3분 뒤, 현수는 기내에서 사인회를 열고 있었다.
밀려드는 사인 요청을 거절치 못해 일일이 사인하면서도 강연희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창밖에 시선 고정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스튜어디스 박민숙이 고개 숙여 미안함을 표한다.
“아뇨. 괜찮습니다.”
“기장님께서 좌석을 업그레이드해 드리라고 했어요. 자리를 옮겨 드리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현수는 연희를 힐끔 바라보았다.
“일행이 있어서요.”
“아, 그러세요? 잠시만요.”
물러갔던 박민숙이 다시 온 것을 3분쯤 지난 후였다.
“두 분 모두 자리를 옮겨 드리겠어요.”
현수가 시선을 돌려 연희에게 의사를 물으려 할 때 연희가 먼저 입을 연다.
“옮길게요.”
“네, 그럼 모시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현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쳐다보는 것이 불편했다. 곁에 앉은 연희와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서이다. 개중엔 셀카를 찍는 척하면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그때마다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연희와 함께 찍힌 사진을 권지현이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파리까지 가려면 11시간 50분 동안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시간 내내 혹시 있을지 모를 촬영을 대비하려면 몹시 피곤할 것이다.
그렇기에 스튜어디스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 것이다.
자리를 옮기고 나니 시선이 어느 정도 차단되어 편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울한 강연희 때문에 현수는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날 무렵 스튜어디스가 새 음료수를 권하러 다가온다.
“전무님, 혹시 드시고 싶으신 음료수가 있으신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손님은 어떠신지요.”
연희에게 물은 말이다.
“그냥 물 한 잔만 주세요.”
비행기 탑승 후 두 시간 만에 듣는 음성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표가 확 난다.
현수는 체념했다. 권지현의 존재를 강연희가 알아차렸음을 눈치챈 것이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가 생수를 가져왔기에 그것을 건넸다.
“자, 여기…….”
“고마워요.”
살그머니 물 잔을 받은 연희는 그걸 천천히 음미하듯 양을 줄여간다. 현수는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에 조용히 기다렸다. 할 말이 정리되면 그때 입을 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더 흘렀다. 간간이 연희의 어깨가 들썩였지만 현수는 등을 토닥이는 등의 위로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프도록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휴우우우!”
강연희가 긴 한숨을 몰아쉰다. 그리곤 쥐고 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얌전히 내려놓는다.
‘아, 이제 말하려나 보다. 보나마나 헤어지자고 하겠지. 미안해요, 연희 씨. 나도 어쩔 수 없어서……. 미안해요.’
현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런 연희를 바라보았다. 이때 입술이 열린다.
“현수 씨.”
오랫동안 눈물을 흘려서인지 연희의 음성은 잠겨 있었다.
“네, 연희 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네.”
죄인 된 마음이니 긴말을 할 수 없어 짧게 대답하고는 연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 아는 분이 많으시죠?”
“네?”
의외의 말이었기에 현수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에 연희는 작심한 듯 말을 잇는다.
“저하고 어머니하고 거기서 살게 해줄 수 있어요?”
“네?”
이번에도 의외의 말이다.
“어머니와 절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요.”
“설마… 박진영 과장이 그러는 겁니까?”
현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박 과장이 뒤에서 몰래 연희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으로 생각한 까닭이다.
“아니에요. 박 과장님과는 상관없어요.”
“그럼 누가……?”
“흐흑! 흐흐흐흑!”
연희의 두 눈에서 솟은 굵은 눈물이 금방 두 뺨을 적신다. 이 순간 현수의 마음을 스치는 상념이 있다.
‘혹시 내가……?’
자신이 연희의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하였기에 멀리 떠나 버릴 생각을 한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여, 연희 씨.”
“흐흑! 흐흐흑!”
뒤쪽에 스튜어디스가 있기에 연희는 애써 소리를 죽이는 듯하다. 들썩이는 어깨와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본 현수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이렇듯 큰 아픔을 안겨준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어쨌거나 연희는 짧게 흐느껴 울었다. 현수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걸로 눈물을 닦아낸 연희가 고개를 든다.
“휴우우우!”
“이제 좀 나아졌어요?”
“네, 고마워요.”
“나 때문에 그래요?”
“아뇨. 현수 씬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럼 누가……?”
현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휴우우! 말하자면 좀 길어요.”
“파리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알았어요. 조금만 진정하고요.”
현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자신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략 5분쯤 지난 후 연희가 입을 연다.
다음은 연희가 한 말의 요약이다.
강연희의 모친인 강진숙은 젊은 시절 천지화학이 태동할 때 사장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그녀의 성장 과정은 6.25 전쟁 때 부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편모슬하가 되었는지라 몹시 어려웠다.
너무도 지독한 가난이었기에 강진숙은 일찍 철들었다. 가난을 벗어나는 길이 공부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강진숙은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최상위권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천지화학에 입사한 강진숙은 탁월한 업무 능력과 특유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사장 비서실에 배치되었다.
당시 천지화학의 사장은 이강혁이다.
그는 천지그룹 이연서 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현수가 소개받았던 이수린의 부친이다.
젊은 시절의 이강혁은 강진숙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버렸다. 곧이어 적극적인 대시가 이루어졌다.
강진숙은 친근하게 대해주면서도 자상했던 이강혁에게 몸과 마음을 허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잉태하게 되었다.
애써 감췄지만 임신 6개월 무렵 미혼인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번졌다. 자진해서 사표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강혁은 작은 아파트를 얻어주었고, 자주 들락거렸다.
그렇게 강진숙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그때 이강혁에겐 다른 여자가 생겼다.
당시 톱스타였던 은막의 여우에게 시선을 돌린 것이다.
나중에 이수린의 모친이 된 그녀는 천지화학의 업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관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이강혁은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강진숙을 차고 그녀와 결혼해 버렸다. 그러면서 낙태하라며 수술비를 건넸다.
강진숙은 언젠가는 이강혁의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숨어서 해산을 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이강혁의 실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