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
이강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는 간도 쓸개도 빼줄 듯 살살거린다. 그러다 얻을 것을 모두 얻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다.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던 것이다.
이강혁에게 있어 강진숙은 한때 갖고 놀던 여러 여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당연히 강연희의 존재를 몰랐다.
이강혁은 얼마 전 꽃을 사러 갔다. 근처 보석상에서 결혼기념일 선물을 산 뒤의 일이다.
그곳에서 연희와 통화 중인 강진숙과 조우했다. 눈에 익은 손등의 상처, 그리고 나이는 들었지만 빼어났던 미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통화 내용은 남자친구인 현수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큰 공을 세워 과장으로 특별 진급했다는 것이다.
강진숙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있던 이강혁은 김현수를 안다. 그룹 동향을 보고하는 서류에서 이름을 보았던 것이다.
옆에 있던 알바 처녀에게 장미꽃 다발을 부탁한 이강혁은 연희라는 딸이 있음을 알고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 길로 귀사한 이강혁은 천지건설 인사부에 전화를 걸어 연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원이 있는가를 문의했다.
천지건설엔 최연희, 김연희, 강연희, 고연희가 있다. 처음엔 이연희가 없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면 다른 성씨를 가질 수 있음에 강연희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나머지 연희들은 자신과 강진숙이 교제하던 때에 출생하지 않았으나 강연희만은 딱 그때이다.
다음 날 슬그머니 다가온 누군가가 연희의 머리카락 몇 올을 챙겨갔다.
그리곤 곧장 DNA 분석에 들어갔다. 친자 감별 결과 강연희는 이강혁의 친딸임이 밝혀졌다.
충격을 받은 이강혁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모든 서류를 불태웠다. 이걸로 끝이라면 각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때 발생되었다.
이강혁에게 친자 감별 결과서를 가져다준 비서는 이수린의 모친이 심어놓은 사람이다. 젊은 시절 이강혁의 바람기 때문에 여러 번 싸운 결과이다.
상황을 알게 된 이수린의 모친은 은밀히 강진숙을 찾았다.
그리곤 향후 발생될 이강혁의 유산에 대해 일체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각서 작성을 요구했다. 강진숙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에 순순히 각서를 써주었다.
그런데 이수린의 모친은 한술 더 떠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사 갈 것과 강연희로 하여금 천지건설에서 퇴사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놓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돈을 주었다면, 어쩌면 그 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보장 없이 그냥 멀리 떠나라는 말을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강진숙은 단호히 거절했다.
다음날, 강진숙은 건물 주인으로부터 퇴거 요청을 받았다. 몇 푼 안 되는 보증금을 빼줄 테니 이사 가라는 것이다.
뼈 빠지는 노력 끝에 간신히 장만한 꽃 가게는 권리금이란 것을 주고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권리금은커녕 이사 비용도 못 준다는 것이다. 항의했더니 계약서를 들이민다. 공교롭게도 계약 만료 3일 전이다.
강진숙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 저렴한 보증금이었기에 다른 가게를 얻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강진숙이 그러고 있을 때 연희는 이수린의 모친과 모처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룹 계열사 사장 부인이 보자는 말에 거절을 못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연희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야 했다.
즉각적인 퇴사와 더불어 서울에서 최소 200㎞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가라고 했던 것이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천지건설은 물론 연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생아였음을 소문내겠다고 협박했다.
분노한 연희는 그래 보라고 했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앞으로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할 것이며 얼굴은 들고 다닐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했다.
그리곤 야멸찬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집에 돌아온 연희는 몸져누워 있는 강진숙을 보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날 밤, 연희의 집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다음날 강진숙은 헤어지고 처음으로 이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강혁은 전화를 거절했다.
비서를 통해 딸이 있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 이상 볼일이 없으므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았을 뿐이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수린의 모친이 보낸 사람이 왔다.
앞으로 7일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안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소문을 내서 다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하겠다는 으름장을 들고 온 것이다.
연희는 분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이강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수린의 모친과 한패라 생각한 것이다.
어쨌거나 강진숙, 강연희 모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언어적 수모까지 당했다.
강진숙은 돈만 바라보고 있는 놈 곁에 빌붙으려다 실패한 인생으로 묘사되었고, 강연희는 친부에게 다가가 몰래 한 재산 빼돌리려고 일부러 천지건설에 입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가친척이라곤 하나도 없기에 모녀는 눈물만 흘렸을 뿐이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연희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흐흑! 우리 엄마와 저, 그곳에서 살게 해줄 수 있나요?”
연희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배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흐른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가 알아봐 줄게요.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요.”
“흐흑! 고마워요.”
연희의 교구가 현수의 품으로 무너졌다. 현수는 말없이 토닥이기만 했을 뿐이다.
* * *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
인구 1천만이 넘는 거대 도시의 한곳에는 레드 마피아 노보로시스크 지부장인 지르코프가 현수에게 선사한 저택이 있다.
그곳 근처에 당도한 현수는 빙긋 웃음 지었다.
“연희 씨, 저 집 어때요?”
생소한 곳에 왔는지라 두리번거리던 연희는 저택을 보자 탄성을 터뜨린다.
“우와, 크다! 대단한 저택이네요.”
“그죠? 방이 서른두 개, 화장실은 열일곱 개, 그리고 자쿠지 딸린 욕실만 여덟 개예요. 창고도 여러 개 있습니다.”
“……!”
“뿐만 아니라 대형 거실과 주방, 그리고 식당과 서재가 있죠. 참, 수영장도 두 개나 있어요. 차고도 당연히 있구요.”
“세상에! 정말 큰 집이군요. 근데 현수 씨가 어떻게 이곳을 알죠?”
연희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택을 바라보고 있다.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게 아니라 구경이나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표정이다.
“들어가서 구경 한번 해볼래요?”
“그, 그래도 돼요?”
“그럼요. 제가 아주 잘 아는 사람 집이거든요.”
“그럼 구경 한번 시켜주세요.”
영국에서 온갖 정원을 촬영하며 돌아다닌 연희이다. 그곳에서 많은 저택을 접했다.
그 많은 저택 중에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큰 것은 드물다. 그리고 그런 저택의 내부는 구경조차 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얼른 보여 달라고 한 것이다.
“자, 안으로 들어가요.”
현수가 정문을 밀고 들어가자 연희가 얼른 붙잡는다.
“허락도 안 받고 들어가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들어와요.”
“현수 씨……!”
연희가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손을 잡아당겼다.
“괜찮아요. 들어가요.”
“아, 알았어요.”
못 이기는 척하며 발을 들여놓은 연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초록색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 있는 잔디밭 곳곳에 온갖 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열매가 열려 있는 것도 있고, 꽃이 활짝 핀 것도 있다. 그중엔 바나나와 파인애플, 그리고 야자수도 있다.
곳곳에 손질 잘된 관목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고, 조형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도 있다.
정말 손질 잘된 정원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집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정말 정성스럽게 가꾸는 모양이에요.”
“그래요? 자, 그럼 이제 안쪽으로 가볼까요?”
빠드득! 빠득! 빠드득! 빠득!
잔디밭 사이에 굵은 모래로 조성된 길을 걷기에 나는 소리이다. 자동차를 위한 일종의 도로이다.
“집이 정말 커요. 관리도 정말 잘되어 있구요. 아! 나도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그럼 한번 살아보실래요?”
“네? 호호, 그럼 좋죠. 근데 제가 어떻게 이런 집에서 살아요? 그냥 희망사항이 그렇다는 거죠.”
연희는 어느새 밝은 성격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파리행 비행기에서 속사정을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안에도 들어가 봅시다.”
“네.”
말을 마친 현수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 있던 누군가가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다.
“아! 어서 오십시오.”
경호1팀장인 피터스 가가바이다.
“오래간만이네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이제 돌아오신 겁니까?”
“아니에요. 또 출국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경호팀을 가동시키겠습니다.”
“그러세요.”
연희는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기만 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도 알아들은 건 없다. 콩고어로 대화를 한 때문이다.
“저분이 집 주인인 거예요?”
“아뇨. 이 집 주인의 경호팀장이에요.”
“아!”
연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온다. 저택 하녀 알리사이다.
현수를 본 알리사가 반색하며 묻는다.
“어머, 주인님! 언제 오셨어요?”
이번에도 콩고어이다. 연희는 못 알아들었다. 그럼에도 반가워한다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알리사! 잘 있었지?”
“네, 주인님.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이야. 귀찮겠지만 차려줄래?”
“네. 근데 곁에 계신 분은……?”
“귀빈이야. 2층에 방 있지?”
“네, 그럼요. 좌측 방이 비어 있어요. 우측 방은 이리냐 사모님이 쓰시던 방이구요.”
“이리냐 사모님? 이리냐가 왜 사모님이야?”
어째 호칭이 이상타 싶어 약간 소리를 높였다. 알리사는 여전히 차분한 음색으로 대답한다.
“사모님이라고 하시던데요?”
이제 겨우 스무 살쯤 된 알리사는 뭐가 잘못된 거냐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는 지금 이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그렇기에 얼른 말을 돌렸다.
“아무튼 식사 준비 부탁하고 옆에 있는 연희 씨가 머물 방도 마련해 줘.”
“네, 주인님.”
알리사가 공손히 절을 하고 물러서자 연희가 묻는다.
“누구예요?”
“시중 들어주는 하녀예요.”
“네? 하녀요?”
한국엔 없는 표현이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렇게 놀라지 말아요.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요.”
“……!”
“이제 방 구경 좀 해볼까요?”
“네.”
현수는 연희를 데리고 아래위 층을 모두 구경시켜 주었다.
저택은 층고가 높은 3층짜리 건축물이다. 하지만 실제 높이는 6층에 버금간다.
한국 아파트 천장고는 평균 2.3m로 지어진다. 저택의 1층 천장고는 6m 가까이 된다. 2층과 3층 역시 상당히 높다.
더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희가 느끼기엔 상당히 큰 집이다.
“여긴 내가 쓰는 방이에요.”
“어머, 여기에 현수 씨 방도 있어요?”
고풍스런 문의 손잡이로 문을 열자 실내 전경이 드러난다.
벽 쪽은 거의 전부가 창이다. 아주 부드러운 느낌의 실크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며 하늘거린다.
한쪽엔 큼지막한 침대가 있다. 킹사이즈 정도로 보인다. 파스텔 톤 보라색 침대 커버 세트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양쪽엔 앤티크 탁자가 있고, 각각엔 스탠드가 있다. 그 앞엔 침대 커버와 같은 톤의 고풍스런 의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