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
지금은 묶어놓았지만 침대는 영화에서만 보던, 천장부터 내려온 휘장으로 감쌀 수도 있게 되어 있다.
시선을 돌리니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비싸 보이는 소파 세트가 놓여 있다. 벽에는 LG전자에서 제작한 대형 HDTV가 설치되어 있다.
탁자 위엔 TV 리모컨 이외에 사탕이 들어 있는 유리병 등이 있다. 또 시선을 돌리니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밖에도 탁자와 의자, 그리고 예술 작품들이 눈에 뜨인다.
바닥은 우유 빛깔 석재로 마감되어 있어 깨끗하며 넓다는 느낌을 준다. 천장엔 샹들리에와 실링팬이 달려 있다.
이 밖에도 부속실이 여럿 있다.
화장실, 자쿠지 딸린 욕실, 드레스 룸, 전실 등이다.
널찍한 드레스 룸엔 갖가지 색깔의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다.
밝은 색 계통의 양복과 그에 맞는 구두도 진열되어 있다.
이 밖에 선글라스, 커프스 버튼, 시계, 향수, 서류 가방 등이 보인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새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두 상당히 고가 제품이다.
연희가 하나하나 눈여겨 살피는 동안 현수는 비어 있던 드레스 룸이 왜 가득 차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호의가 작용한 것이다.
지르코프가 아니라면 가에탄 카구지 내무장관일 확률이 매우 높다.
아무튼 가로와 세로 각각 1.8m가 한 평이다. 연희가 눈짐작으로 계산해 보니 현수의 공간은 대략 100여 평 정도 된다.
계단이나 복도 같은 공유 면적이 아닌 실제 면적이니 엄청나게 큰 셈이다.
바닥까지 내려온 창을 열고 나가니 곧장 수영장에 다다른다.
가로 10m, 세로 25m짜리이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매우 깨끗한 물이다.
“자, 이제 옆방 구경을 할까요?”
“네.”
이리냐가 쓰던 우측이 아닌 좌측 방의 문을 열자 또 하나의 광활한 공간이 보인다.
현수의 공간에 비하면 약간 작지만 그래도 80평은 된다.
커다란 침대와 소파, 그리고 탁자 등이 구비되어 있지만 사용자가 없어 그런지 휑한 느낌이다.
드레스 룸도 비어 있다.
“이 방은 연희 씨가 써요.”
“네?”
“사실 이 집은 내 집이에요.”
“네에? 뭐라고요?”
연희가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여기 앉아봐요.”
연희는 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는 표정으로 눈만 크게 뜬다.
“내가 이실리프 무역상사를 운영하고 있는 거 알죠?”
현수가 이실리프 무역상사와 이실리프 상사의 대표라는 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연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이 공간은 러시아 거래처에서 내게 선물한 거예요.”
“이 큰 걸요?”
“네. 좀 큼지막한 선물을 받은 거죠. 연희 씨,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죠?”
“……!”
“어머니 모시고 와서 여기서 살아요.”
“……!”
연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눈만 크게 뜨고 있다.
현수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린다.
12장 신나는 달밤이다
똑, 똑, 똑!
“주인님, 들어가도 되나요?”
“흐음, 들어와.”
둘의 시선이 문에 쏠리자 알리사가 들어선다.
“주인님,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그래? 알았어. 곧 내려가지.”
“참, 이리냐 사모님도 곧 당도하신다고 하는데 같은 식탁에 준비할까요?”
“뭐? 이리냐가 여길 온다고?”
현수의 눈이 커진다.
“네, 아까 백화점에 물건 보러 가신다고 나가셨는데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있었어요.”
“……!”
현수가 잠시 말을 끊자 알리사와 연희 모두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현수 씨, 왜 그래요?”
“끄으응!”
현수가 나지막한 침음을 낼 때 문이 활짝 열린다.
“미스트르 킴!”
“헉! 이리냐!”
“아아! 보고 싶었어요.”
환한 웃음을 지은 이리냐는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놓고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다.
그러자 금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그리곤 곧장 달려와 품에 안긴다.
“쪼오옥! 오랜만이에요.”
현수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이리냐의 입술이 현수의 것을 덮었다. 이걸 바라보던 연희의 눈이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이리냐!”
현수에게만 관심이 있었는지라 미처 연희를 보지 못한 이리냐가 화들짝 놀라면서 떨어져 나간다.
“어머! 손님이 계셨네요?”
“그, 그래. 이쪽은 강연희 씨야. 연희 씨, 이쪽은 이리냐예요.”
“이리냐 파블로비치 체홉? 설마 쉐리엔 CF의 그 이리냐인 거예요?”
강연희는 이리냐를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다이어트 보조식품 광고에서이다. 그때 정말 섹시한 여자라는 생각을 했었다.
몸매도 끝내주고 얼굴 또한 미인이다.
그런 여자가 눈앞에 있기에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리냐 파블로비치 체홉 맞아요.”
“아! 나도 만나서 반가워요.”
영어로 인사를 마친 둘의 시선이 동시에 현수에게 향했다. 방금 인사한 여인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냐는 눈빛이다.
“끄으응!”
잠시 할 말을 잃은 현수는 일단 화제를 돌렸다.
“이리냐, 그리고 연희 씨, 일단 밥부터 먹고 이야기합시다.”
“……!”
식당으로 내려와 현수는 두 여인이 앉도록 의자를 빼주었다. 둘 다 다소곳하게 앉는다.
현수도 자리에 앉자 하녀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한다. 음식을 보니 프랑스식 만찬인 모양이다.
하녀들의 시중을 들으며 식사하는 내내 이리냐와 연희는 서로 시선을 마주친다. 불꽃이 튄다.
말을 안 했지만 연적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한편, 현수는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해야 할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하여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식사를 마치고 우아하게 후식까지 먹었다. 셋은 현수의 방으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이제 먹을 것 다 먹었으니 저 여자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여자인지를 설명해 달라는 표정들이다.
현수는 좌측에 앉은 연희와 우측에 앉은 이리냐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우!”
이게 기폭제였다는 듯 둘의 입이 동시에 열린다.
“미스트르 킴!”
“현수 씨!”
동시에 입을 연 두 여인은 또 한 번 불꽃 튀는 강렬한 시선을 주고받는다. 결코 빼앗길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고 보니 하나는 동양의 대표 미인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의 대표 미인이다.
서로의 외모를 보고 만만치 않은 상대라 여겼는지 연희와 이리냐는 잔뜩 긴장한 상태이다.
현수는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할까 생각했다. 어펜시브 참 마법을 쓰면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같이하고 싶은 여자에게 어찌 마법을 쓰겠는가!
‘그래, 터놓고 이야기하자. 정공법이 가장 좋아. 안 돼서 둘 다 잃어도 할 수 없지. 아니, 셋이구나. 지현 씨 이야기도 하는 게 좋겠어. 그런데 어떻게 설명하지? 끄응!’
참으로 난감한 상황인지라 내심 침음을 냈다. 그러는 내내 두 여인은 기 싸움을 펼치고 있다.
현수는 탁자에 있는 인터컴의 1번을 길게 눌렀다.
“네, 주인님!”
“알리사, 커피 석 잔만 부탁해.”
“네, 주인님.”
인터컴을 내려놓자 두 여인의 시선이 다시 쏠린다.
“커피가 오면 그때 이야기할게. 서로 불편하게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둘 다에게 이야기해야 했기에 영어로 한 말이다.
“네, 미스트르 킴.”
“알았어요.”
둘 다 입을 다문다.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현수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법사라는 것을 뺀 나머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한 것이다.
알리사가 커피를 가져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제 말을 하라는 의미이다.
현수는 이리냐에게 먼저 연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러시아어이기에 연희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다.
다음엔 연희이다. 한국어로 이리냐에 관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둘 모두 심각한 표정이다. 현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영어이다.
권지현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우미내에 사시는 부모님에게 그녀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둘 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윽고 현수의 이야기가 끝났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걸 깬 사람은 연희이다.
영어로 묻는다.
“현수 씨, 권지현 씨와 이랴냐 씨, 그리고 나 중에 누굴 당신의 배우자로 선택하실 건가요?”
“……!”
어찌 쉽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현수의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이리냐가 먼저 말을 꺼낸다.
“미스트르 킴, 아니, 자기야, 난 자기야 없으면 못살아요.”
말을 마친 이리냐는 제발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애원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현수 씨! 나는요?”
연희 역시 초조한 눈빛을 빛낸다.
연희는 현수가 신입사원일 때 같이 등산을 다니면서 품성을 살폈다. 천지건설의 수많은 총각 사원들이 대시를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모두들 학벌, 재력, 집안 배경 등이 나무랄 데 없는 사내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배격한 건 인간적인 냄새가 풍기지 않아서이다. 모두들 계산적으로 사는 것 같아서 거절한 것이다.
현수는 가난하고 학벌도 비루하지만 인간성 하나는 좋았다. 자신처럼 예쁜 여자가 곁에 있음에도 탐욕에 찬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늑대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 사내가 대시하면 받아줘야지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커버렸다. 커도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 사내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권지현은 본 적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이리는 슈퍼모델 뺨치는 여자이다. 나이도 어려 보인다.
한국식 나이로 자신은 27세, 이리냐는 23세이다. 자신은 이제 시들기 시작하는 나이라면 이리냐는 피어오르는 꽃송이 같다.
너무 강력한 연적이다. 그렇기에 현수의 선처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왠지 처량하다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현수를 바라보는 연희의 눈길엔 처연함이 배어 있었다.
“……!”
현수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래도 여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잘못 꺼내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수는 다시 인터컴을 눌렀다.
“네, 보스!”
경호1팀장인 피터스 가가바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일부일처제 국가입니까, 아니면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국가입니까?”
“일부다처제 국가입니다.”
“내무장관께서 내게 준 것이 영주권10)입니까, 아니면 시민권11)입니까?”
“시민권을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스는 외국에서도 콩고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의 국내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탄력적 선택이 가능합니다.”
“흐음, 알겠소.”
콩고어로 대화를 마친 현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잠시 입을 닫았다.
둘은 여전히 말이 없다.
“연희 씨, 그리고 이리냐,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내 진심입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알았어요.”
“나는 연희 씨와 이리냐, 그리고 지현 씨 모두 좋아해요. 셋 중 하나와 결혼하라고 하면 아마 한참을 망설여야 할 거예요. 누굴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해서가 아니에요. 모두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