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 때문에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요.”
꿀꺽―!
몹시 긴장한 듯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먼저 연희 씨에게 물을게요. 진짜 한국을 떠나고 싶어요?”
“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도 그런 생각이신가요?”
“그래요. 떠날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할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제 이리냐에게 물을게. 졸업은 한 거야?”
“아뇨. 아직요.”
“그런데 왜 여기에 있지?”
“학교에선 제가 취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수업은 참여하지 않아도 학점을 주기로 했습니다.”
“CF 출연 때문인가?”
“네. 지도교수님께 쉐리엔 두 병을 드렸더니 마음껏 활동하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건 알겠고, 내가 만일 이리냐를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네?”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이리냐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금방 샘솟는다. 말없이 눈물 흘리는 여인을 보았는가!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 담긴 원망과 슬픔, 그리고 비통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현수는 금방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리냐에게 자기야는 하늘이에요. 그 하늘이 사라지면 사람이 어떻게 살죠?”
완전한 한국말이다. 그렇기에 연희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다. 방금 전까지 둘 사이의 대화는 러시아어였다.
그런데 이리냐가 이런 말을 했음은 현수는 이리냐를 거부하려는 표정인 것 같다. 마음 한편으론 안도되면서도 같은 여자로서 이리냐가 불쌍했다.
하여 한마디 하려 입술을 떼었다.
“혀, 현수 씨!”
“버림받으면 이리냐는… 이리냐는… 흐흑! 어엉! 어어엉!”
마스카라가 번지든 말든, 연희가 보든 말든 이리냐는 대성통곡한다.
“……!”
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거쳐서라도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리냐의 순정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을 품은 것은 부모님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합을 반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어엉! 어어어엉!”
펑펑 울던 이리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더니 자기 방으로 향했다. 현수는 여전히 말이 없다. 하지만 연희는 이리냐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온다.
“아악! 현수 씨!”
깜짝 놀란 현수가 얼른 이리냐의 방으로 뛰어갔다.
침대 위엔 두 여인이 뒤엉켜 있다. 연희가 이리냐를 깔아뭉갠 자세이다. 그리곤 서로의 팔을 잡고 힘을 쓰는 듯하다.
“헐!”
연적끼리 머리채를 잡으려는 것으로 보였다. 이때 연희가 또 한 번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른다.
“아악! 현수 씨!”
타앙―!
“헉!”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무도 깜짝 놀란 탓이다. 그런데 연희가 이리냐의 위로 힘없이 쓰러진다.
“여, 연희 씨!”
연희의 어깨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이리냐!”
현수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이리냐가 또 운다. 현수는 얼른 이리냐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내놓는다.
“……!”
멍한 표정인 이리냐를 버려둔 현수가 연희를 일으켰다.
“혀, 현수 씨!”
“연희 씨, 상처 좀 봐요.”
찌이이익―!
현수가 연희의 블라우스를 찢어냈다. 흰색 브래지어가 드러났지만 현수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다. 상처이다. 총알이 어깨를 뚫고 나간 듯 등에서도 선혈이 솟고 있다.
“컴플리트 힐!”
샤르르르릉―!
푸른 빛깔 마나가 연희의 어깨로 스며들자 상처가 스르르 아물기 시작한다.
“이, 이게 뭐예요?”
“보스!”
상처가 신속하게 아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연희의 경악성에 이어 피터스 가가바가 방으로 들어선다.
“가가바, 오발 사고예요. 여긴 괜찮으니 나가 있어요.”
“네, 보스! 근데 병원에 안 가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스친 것뿐이니까.”
가가바는 상처를 볼 수 없는 각도에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뒤로 물러난다. 실내 상황을 보니 왜 총성이 울렸는지 짐작된 때문이다.
연희의 말에 놀란 이리냐의 울음은 어느새 그쳐 있다.
그리고 이리냐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혈이 샘솟던 상처가 아물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리냐가 젖은 수건을 가져와 연희의 상처 부위를 닦아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화장실에서 수건을 적셔서 꺼내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여 초이다. 그런데 그새 상처가 완전하게 아물었다.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리냐, 가서 블라우스 하나 가져와.”
“네.”
이리냐가 자리를 뜨자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 씨, 아프지 않아요?”
“괜찮아요. 그리고 이리냐 혼내지 말아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까요.”
“……?”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리냐가 자살하려 했어요. 그걸 말리려다가 사고가 난 거예요.”
“자살을?”
“당신을 너무 사랑하나 봐요, 현수 씨. 그냥 같이 살아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나나 지현 씨를 택하면 이리냐는 틀림없이 자살할 거예요. 그렇게 해서 당신을 얻은들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그러니 우리 중에 고르지 말아요. 그냥 다 같이 살아요.”
“연희 씨!”
“흐흑! 흐흐흐흑! 언니!”
어느새 블라우스를 꺼내온 이리냐가 또 눈물을 터뜨린다. 연희의 말을 들은 것이다.
“이리냐!”
“미안해요. 당신을 잃는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세상이 까매졌어요. 행복도 미래도 없는 암흑뿐인 세상을 제가 어떻게 살아요? 그래서 죽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언니가 말려서……. 잘못했어요. 언니를 죽일 뻔했어요. 흐흑!”
어눌하지만 분명한 한국어이다.
익히기 어렵기로 이름난 한국어를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뜻이다.
“언니, 제가 포기할게요. 자기야랑 행복하게 살아요. 흐흑!”
말을 마친 이리냐가 뛰어간다.
“현수 씨, 이리냐를 잡아요. 지금 감정이 너무 격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가서 잡아요. 네?”
“근데 몸은 괜찮은 거요?”
“네, 괜찮아요. 어서요.”
“알았소.”
말을 마친 현수가 밖으로 나갔다. 복도 끝에 있던 피터스 가가바가 손가락으로 이리냐가 있는 방을 가리킨다.
청소 도구 등을 두는 작은 창고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캄캄했던 어둠이 단번에 밀려간다. 이리냐는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흐흑! 흐흐흐흑! 흐흐흑!”
들썩이는 어깨를 보니 애처롭다는 느낌이다.
“이리냐…….”
“흐흑! 전 괜찮아요. 버리셔도 돼요. 흐흑! 이리냐, 자살 안 할게요. 흐흑! 가세요. 언니랑 행복하세요. 흐흑!”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독백처럼 이야기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때 연희의 음성이 들린다. 따라온 것이다.
“이리냐, 계속 이럼 언니한테 혼나는 거 알지? 이리냐와 나는 앞으로 한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살아야 해.”
“……?”
“언니 말 안 들으면 국물도 없어. 국물도 없다는 말이 뭔지 알지? 언니랑 같이 살기 싫어?”
“어, 언니…….”
눈물 젖은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는 이리냐의 눈빛엔 고마운 마음이 담뿍 담겨 있다.
“일어나. 우리 남편이 될 현수 씨 마음이 불편하잖아.”
“어, 언니……!”
“계속 이럼 혼난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하게 할 게 있어. 앞으로 쭈욱 내가 언니야. 알았어?”
“어, 언니…….”
현수는 알아서 서열을 정하고 있음에도 할 말이 없기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뭐해요? 어서 데리고 가요. 경호원들 보잖아요.”
“알았소.”
현수의 말투는 어느새 변해 있었다.
현수가 앞장서고 이리냐는 고개를 숙인 채 그 뒤를 따른다. 연희는 맨 뒤에 서서 이리냐가 똑바로 가도록 조정했다.
셋은 다시 현수의 방에 앉았다.
“치잇! 좋겠어요. 부인이 셋이라…….”
“……!”
연희의 말에 현수는 할 말이 없었다.
“권지현이란 분은 어떤 사람이죠? 나이는 몇 살이에요?”
현수는 지현의 프로필을 설명했다. 이리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지현 언니가 나보다 한 살 많으니 언니군요. 알았어요. 이리냐, 권지현이란 분이 큰언니야. 알았어?”
“네.”
이리냐는 끼워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현 언니와는 한국에서 결혼식 올리세요. 우리 둘과는 여기서 하고요.”
“그래도 되겠소?”
“치이, 속으론 되게 좋으면서. 현수 씨, 원래부터 이렇게 엉큼했어요?”
“연희 씨, 고마워요.”
“고마운 줄 알았으면 평생 잘해요. 그럴 거죠?”
“그럼요.”
“근데 말투 좀 바꿔요. 아깐 좋던데. 그러니까 우리 사이가 좀 먼 거 같잖아요. 이리냐한텐 잘하면서 왜 내게만 그래요?”
“그, 그래요?”
“‘그래요?’가 아니라 아까처럼 ‘그래’로 바꾸세요.”
“알았어요. 아니, 알았어.”
현수는 눈빛으로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토록 고심했던 문제가 너무나 쉽게 해결된 듯해서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권지현이다.
그녀에게 이들 둘을 어찌 설명할 것인지가 난제이다. 하여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언니한테 전화해서 이리로 오라고 하세요.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
“알아서 둘째, 셋째로 찌그러진다는 데도 못 온다고 하진 않겠죠? 어서 전화 하세요.”
“아, 알았어.”
“치이, 너무 좋아하신다. 그래도 현수 씰 사랑해요. 우리 실망시키지 말아요. 아셨죠?”
“그, 그럼! 걱정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희가 예쁘고 상냥한 웃음을 짓는다. 이리냐 역시 언제 울었느냐는 듯 환히 웃는다.
“이런 날 축배가 없으면 안 되겠죠? 이리냐, 알리사더러 와인 좀 가져오라고 해줄래?”
“네, 언니.”
인터컴을 누르려던 이리냐가 동작을 멈춘다.
“아니에요. 제가 가져올게요. 제가 좋은 와인 봐둔 게 있거든요. 와인 저장고에 갔다 오려면 10분쯤 걸릴 거예요.”
말을 마친 이리냐가 살짝 윙크를 한다.
현수는 의미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리냐가 나간 후 현수는 왠지 머쓱해졌다. 하여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수 씨, 아니, 이제부턴 자기라고 부를게요. 자기야!”
“으, 응? 왜?”
“날 사랑하긴 한 거예요?”
“무슨 소리야? 당연히 사랑했지. 아니, 사랑하지.”
“근데 왜 한 번도 안 안아줬어요?”
“아, 안아줘?”
“저, 아빠 없이 자란 거 알죠? 그래서 한 번도 남자 품에 안겨본 적이 없어요.”
“……!”
“한 번 안아줘요. 이리냐 없을 때.”
“아, 알았어.”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이 있다.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다.
현수는 얼른 연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와락 껴안았다. 풋풋한 머리카락 냄새와 연희의 그윽한 향취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부드럽고 탄력 넘치는 여체가 주는 촉감은 현수가 저도 모르게 더듬도록 했다.
“흐으음!”
깊숙이 연희의 냄새를 빨아들였다. 신체의 한 부분이 신속하게 뻐근해지는 느낌이다. 하여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 순간 부드럽고 달콤하며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무엇인가가 현수의 입술을 덮었다.
『전능의 팔찌』 제16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