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
“그렇게 해야 이 사이에 낀 음식물로 인한 충치를 예방할 수 있는 거야. 그 칫솔은 만난 기념으로 줄 테니 써.”
현수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자 라세안이 칫솔을 자세히 살핀다.
재질이 뭔지 알 수는 없지만 고운 문양도 넣어 있다. 끄트머리엔 똑같은 굵기를 가진 털이 가지런히 돋아 있다.
“이건 대체 뭐로 만든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현수는 나신이 되었다. 이제 목욕을 하려는 것이다.
같은 사내가 보기에도 멋진 몸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풍덩―!
“아아, 시원해!”
개울의 깊이는 허리를 조금 넘는다. 그리고 물은 시원했다. 현수는 느긋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흘린 땀을 닦아냈다.
“안 씻을 거야?”
“씻어야 하는 거야?”
“그럼. 땀 흘려서 몸에서 냄새나잖아. 어여 들어와.”
“그, 그래.”
잠시 후 라세안도 개울물 속에 몸을 담갔다. 현수는 비누를 꺼내 샤워타월에 문지른 뒤 그걸로 비누칠을 했다.
손에 든 것은 노란색인데 거품은 흰색이다. 라세안은 ‘이건 또 뭐야?’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비누로 머리를 문질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몸에 남은 기름기와 때를 닦아내는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자네도 하게 해줄 테니.”
말을 마친 현수는 개울물로 비눗기를 닦아냈다. 그리곤 비누 쓰는 법을 알려주었다.
라세안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키는 대로 했다.
먼저 물 밖으로 나온 현수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곤 스킨로션을 발랐다.
“그건 또 뭔가?”
현수가 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던 라세안이 코를 벌름거린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를 느낀 때문이다.
“모공을 열거나 이완된 피부를 정상적인 상태로 수축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화장수네.”
“뭐? 모공 어쩌고?”
“그냥 발라. 피부에 좋은 거니까.”
말을 마친 현수는 젖은 수건을 펼쳐 의자에 걸쳐 두었다. 잘 말려서 내일 아침에 다시 쓰려는 것이다.
라세안은 현수가 하는 양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둘은 캠핑용 의자에 편안히 걸터앉아 있었다. 손에는 달콤한 맛을 내는 둥굴레차가 들려 있다.
현수는 한 잔 가지고 고사를 지냈지만 라세안은 벌써 몇 잔째 마신 건지 모른다. 맛이 있다면서 계속 마시는 것이다.
아무튼 의자는 몸을 반쯤 뉘일 수 있는 것이라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의 별빛이 아주 잘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 별이 아주 많네. 그치?”
“별? 아, 저거?”
“여기도 반짝이는 별들마다 전설이 어려 있나?”
“전설? 별?”
“없나 보군. 내 고향의 별들엔 전설이 어려 있는데.”
“그런가?”
“하암, 조금 졸린 것 같은데 들어가서 잘까?”
“그, 그래. 내일 또 가야 하니까.”
라세안은 현수의 뒤를 따라 침대로 향했다.
“잘 자게.”
“그, 그래. 자네도.”
침대에 누운 현수는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라세안은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수의 숨소리가 가지런해지자 라세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간다.
그리곤 저녁 식사에 사용되었던 주방 기구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뿐만 아니라 치약, 칫솔, 비누, 샤워타월 등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간간이 현수 쪽을 바라보며 눈빛을 빛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조차 없는 물건들 천지다. 아늑함을 느끼게 해주는 텐트를 살펴보니 보통 공들여 만든 것이 아니다.
바느질 간격이 1㎜도 안 되는데 아주 고르다.
혹시 마법으로 만든 건가 싶어 살펴봤지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나의 향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식사를 하고 둥굴레차를 만들기 위해 꺼낸 생수병은 대체 어떤 재질로 만들어진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프라이팬 등은 드워프가 만든 것보다도 더 정교했다. 게다가 가스레인지는 어떤 원리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라세안은 날이 새도록 현수의 물건들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편, 잠든 척했던 현수 역시 라세안을 살피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라세안의 정체는 의심스러웠다. 드래고니안이라고 했지만 그 마을에서 본 적이 없다.
전능의 팔찌 안쪽엔 착용자의 두뇌를 점점 좋게 만들어주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브레인 리프레시 마법이다.
그 덕에 현재 현수의 지능은 200에 육박한다. 당연히 예전에 비해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진 상태이다.
책을 보면 단숨에 암기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관찰력도 상승되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숨은그림찾기라도 현수에겐 아이들 장난처럼 쉬운 문제가 된다.
아무튼 드래고니안 마을에서 보았던 모든 인물을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드래고니안의 후손이 사는 마을 사람들도 모두 기억한다.
하지만 라세안은 그 안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몸에서 느껴진 마나의 양이 평범한 드래고니안이 아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소주를 마시는 동안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알아낸 사실이다.
그건 레뮈를 비롯한 많은 드래고니안과 대결을 벌이는 동안 느꼈던 마나의 양을 훨씬 상회했다.
5장 설거지하는 드래곤
게다가 이름이 라세안이다. 이곳 라수스의 독재자인 붉은 드래곤의 이름 라이세뮤리안에서 몇 글자 빠진 것이다.
하여 상대가 레드 드래곤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그럼에도 도발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든 텔레포트할 준비는 하고 있다. 하지만 차원이동은 불가능하다. 아르센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부러 지구의 물건들을 잔뜩 꺼내 놓았다.
마법사와 드래곤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부러 너스레를 떨어 라세안과 말을 텄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함이다.
날이 새도록 현수는 잠을 못 잤고, 라세안 역시 꼴딱 샜다. 오뚜기식품에서 만든 참기름 병의 오묘한 곡선에 감탄하기에도 바빴던 때문이다.
“흐아암! 잘 잤다.”
“이제 일어났나?”
“그래, 자네도 잘 잤어?”
“그런대로.”
“세수 좀 하고 아침부터 해먹자.”
“좋지. 아침 메뉴는 뭔가?”
“어제 술을 마셨으니 해장되게 북어국이나 끓일까?”
“북어 뭐?”
라세안이 또 눈빛을 빛낸다.
“이따 먹어보면 알아. 하아, 나 먼저 세수한다.”
“그, 그래.”
현수가 개울가로 멀어져 가자 라세안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체 저 녀석의 정체는 뭐지? 마나의 양을 가늠해 보면 소드 마스터에 최소 8써클 마법사 정도는 되는데, 우리 일족은 아닌 것 같고.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이 어떻게……?”
나직이 중얼거린 라세안은 얼른 현수의 뒤를 쫓았다. 뭔가 또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사이에 세수를 마친 현수는 그릇에 북어를 찢어 넣고 있었다.
“그게 뭔가?”
“이거? 북어.”
“북어?”
“그래. 명태라는 물고기를 말린 거야.”
“명태는 또 뭐야?”
“너무 궁금해하지 마. 알려면 머리 아파지니까.”
“난 괜찮아.”
“그래? 내 고향의 동쪽 바다엔 명태라는 물고기가 사네. 이걸 생태라고도 하지. 반쯤 말린 건 코다리, 완전히 말린 건 북어라 한다네. 겨우내 얼렸다 말렸다 한 걸 황태라 하고, 꽝꽝 얼린 건 동태, 그리고 이 녀석의 새끼는 노가리라 하지. 이 녀석 알로 만든 젓갈은 명란젓이라 하고.”
“……!”
현수의 빠른 설명에 넋이라도 나갔는지 라세안은 멍한 표정이다.
“어때? 이해가 돼?”
“뭔 놈의 물고기에 그렇게 많은 이름이 붙어 있나? 자네 고향엔 물고기가 그거 한 종류뿐인가?”
“아니. 종류는 많지. 꽁치, 갈치, 복어, 민어, 도다리, 숭어, 우럭, 광어, 고래, 상어, 고등어, 다랑어 등등 대략 17,000여 가지가 있네.”
“헐!”
라세안이 입을 딱 벌린다.
17,000가지가 각각의 상태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면 그걸 알아내는 데만 평생은 걸리겠다 싶은 것이다.
“명태의 이름이 이토록 다양한 건 각각의 조리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지. 생태는 주로 찌개를 끓이고, 북어는 국, 동태도 찌개감이지. 황태는 구이가 많고, 노가리는 주로 구워 먹네.”
“그럼 맛이 다른가?”
“당연히 다르지. 아무튼 오늘 아침 메뉴는 북어국이네. 술 마신 다음 날 속을 아주 편하게 해주는 것이네. 참, 자네도 좀 거들게.”
“거들어? 내가 뭘?”
“거기 어제 삼겹살 익혔던 프라이팬 있지? 그거 설거지 좀 하게.”
“설거지?”
“그래. 여기 퐁퐁이란 거 보이지 이걸 이렇게 짜낸 다음에 이 수세미로 이렇게……. 거품 보이지? 이게 기름기를 닦아내네. 그러니 이걸 이렇게 하면…….”
현수가 손수 시범을 보인 건 기름기 번들거리던 접시다. 주방세제로 닦아낸 뒤 개울물로 헹궈내자 기름기 하나 없는 상태가 된다.
“자, 봤지? 이렇게 하면 되네. 나는 아침 준비할 테니 자넨 설거지를 하게.”
“아, 알았네.”
라세안은 엉거주춤한 폼으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르센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설거지하는 드래곤이 탄생되는 시점이다.
북어국을 끓이는 것은 쉽다.
감자 몇 알 잘라 넣고 반쯤 익었을 때 손질한 북어포를 넣는다. 팔팔 끓으면 북어를 건져 낸 뒤 밀가루를 묻힌다.
다음엔 계란 푼 것에 이걸 넣어 하나씩 다시 넣어준다.
다시 끓기 시작하면 대파를 적당히 썰어 넣고 국간장, 후추, 참기름을 넣은 뒤 불을 끄면 된다.
북어국을 조리하는 동안 압력밥솥에 쌀을 씻어 넣었다. 다음엔 포기김치를 쭉쭉 찢어 접시에 올려놓았다. 이것만으론 부족할 것 같아 스팸을 꺼내 노릇노릇하게 익혀냈다.
아침 준비가 다 되었을 즈음 라세안이 와서 기웃거린다. 냄새만으로도 침이 줄줄 흐를 지경이 된 때문이다.
“아직 다 안 된 건가?”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그전에 식탁 좀 정리해 주겠나?”
“알겠네.”
라세안은 곧 있을 아침 식사가 기대된다는 듯 분주한 손으로 식탁을 정리했다.
“자아! 이제 먹자구. 먼저 북어국 한 모금을 맛을 봐. 이렇게. 캬아아―! 좋아!”
현수가 숟가락으로 시범을 보이자 라세안이 얼른 따라 한다.
“으으읍! 후와아아!”
뜨거운 음식이 거의 없는 아르센 대륙이기에 북어국의 뜨거움에 적응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현수는 피식 웃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숟가락과 젓가락을 쓴다. 라세안은 그런대로 숟가락질은 하지만 젓가락질은 어림도 없다.
김치와 스팸을 먹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자 입술을 꾹 다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즐거운 아침 식사를 했다.
“난 이빨을 닦으러 갈 테니 그거 다 먹고 설거지를 하게.”
“알겠네.”
라세안이 자꾸 떨어지는 스팸을 놓치지 않으려 젓가락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뚝 잘려 떨어진다.
이때 현수가 몸을 돌리자 얼른 손으로 주워 먹는다. 지금껏 체면 때문에 참았던 것이다.
현수는 피식 웃고는 치약과 칫솔을 챙겼다.
“자네 고향은 어딘가?”
“내 고향? 여기서 엄청 멀지. 넓고 넓은 바다를 건너고 또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야.”
라세안이 설거지를 마칠 즈음 현수는 텐트와 침대, 그리고 식탁과 의자 등을 아공간에 넣고 기다렸다.
그리곤 곧장 출발했다. 둘은 의기투합한 지기마냥 이런저런 이야길 하며 걸었다.
당연히 어떠한 몬스터도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벌써 멀찌감치 다들 도망갔다.
라수스의 지배자인 라이세뮤리안을 상대할 몬스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얼마나 멀기에? 거긴 여기완 다른 세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