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5
“그럼. 여기 와서 제일 크게 놀란 게 뭔지 아나?”
“뭔데?”
“아직도 드래곤이 있다는 거야.”
“뭐어?”
라세안이 눈에 뜨이게 움찔거렸지만 현수는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내 고향엔 드래곤이 아주 오래전에 멸종당했네.”
“멸종? 드래곤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그래. 그래서 드래곤을 그냥 예전에 살았던 파충류로 분류하네.”
“파충류?”
“여기 와서 본 파충류 가운데 엘리터라는 놈이 있더군.”
“드래곤이 하등동물인 엘리터과 같은 종류로 분류된다고?”
콧구멍과 귓구멍에서 연기가 나올 소리라 여겼는지 흥분된 표정이 역력하다.
“그거 말고 다른 파충류는 못 보았네. 여기선.”
“……!”
라세안은 분노했는지 씩씩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이놈을 어찌 약 올릴까를 고심했다. 그러던 중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참, 내 아공간에 드래곤 새끼가 하나 있네.”
“뭐어? 해츨링의 사체가 있다고?”
라세안의 눈이 커진다. 해츨링을 죽이는 자는 모든 드래곤의 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인 건 아니고 누군가가 오래전에 죽인 건데 표본용으로 보관하는 게 있네. 내가 저쪽 세상에선 나름 학자거든.”
“학자? 좋아, 보여주게.”
“그러지. 그런데 꺼내 놓으면 금방 부패가 시작되니 나오는 대로 아이스 계열 마법으로 얼려주게. 마법은 할 줄 알지?”
“그럼. 꺼내기만 하게. 곧바로 얼릴 테니.”
아공간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뜻이다. 이 속에선 어떤 생명체도 목숨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은 거라면 얼려도 상관없다 생각한 것이다.
“아공간 오픈!”
현수는 아공간을 열어 모켈레 무벰베의 사체를 꺼냈다.
“허억!”
진짜 드래곤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 라세안의 눈이 잠시 커진다.
“얼른 얼려주게.”
“알았네. 블리자드!”
쒜에에에에엑―!
주변의 공기까지 차갑게 냉각되자 모켈레 무벰베의 사체는 얇은 얼음 속에 갇히게 되었다.
라세안은 안광을 빛내며 모켈레 무벰베를 살폈다.
“이건… 이건 드래곤이 아니네.”
“아니긴, 내가 여기 와서 본 도감에도 드래곤이 이렇게 생겼다고 되어 있던데.”
“아냐. 이놈은 드래곤이 아냐. 첫째, 날개가 없어.”
“그래? 우리 고향에선 이걸 드래곤이라 부르네.”
현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아닐세. 드래곤은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 수 있네. 게다가 마법을 쓸 수도 있고.”
현수는 라세안의 말을 잘랐다.
“이것도 마법을 쓸 수 있었다고 하네.”
“마법을? 마나가 하나도 안 느껴지는데?”
“글쎄? 그건 죽은 지 오래되어서 그런 거 아닐까?”
“얼마나 오래된 건데?”
“흐음, 이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샘플이네.”
“대대로? 그럼 어느 정도나?”
현수는 라이세뮤리안 놀려먹기에 재미를 붙였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최소 3,000년은 넘었네. 어쩌면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고.”
“자네 집안… 대단한가 보군.”
“대단하지는 않네. 겨우 백작이거든.”
“자네가?”
“안 믿겨지나? 이래 봬도 코리아 제국의 백작 맞네.”
“자, 자네 영지의 인구는 얼마나 되는데?”
라세안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정확히는 모르네. 하도 많아서. 내가 떠나올 때 1,000만이 조금 넘었네.”
“뭐어? 처, 천만? 자, 자네 집안의 유서는 어떤데?”
심히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라세안이다.
“가문의 시조는 단군이라는 분이시네. 4,346년 전에 우리 가문을 일으키셨지.”
“뭐어? 자네 가문이 4,346년이나 되었다고?”
“그래. 그리고 여기 있는 이것은 우리 조상 가운데 한 분이 잡은 거라 기록되어 있네. 한 3,000년쯤 된 걸로 아네.”
“……!”
현수의 뻥은 점점 능수능란해지고 있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드래곤을 놀려먹는 중이다.
라세안은 입을 딱 벌렸다. 아르센 대륙에서도 4,000년 이상 지속된 가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마나가 다 새어 나간 모양이네. 기록에 보면 이 드래곤은 10써클 절대 마법인 리절렉션을 여러 번 썼다고 하네.”
내친김에 치는 뻥이다. 이 뻥에 순진한 드래곤 라세안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리, 리, 리절렉션이라고?”
10써클 마스터가 되어야 시전할 수 있는 부활 마법은 드래곤 로드조차 쓰지 못한다.
그런데 현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니 화들짝 놀란 것이다.
“그래. 그러니 마법을 쓴 거 아닌가? 참, 날개가 없다고 했는데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른 건가? 그건 잘 모르겠네.”
현수가 짐짓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때 라세안이 묻는다.
“내, 내가 보니 자네 고향은 문물이 참 발달한 것 같데. 그래서 묻는 말인데, 만일 이곳의 드래곤이 자네 고향에 나타난다면 어찌 되겠나?”
“글쎄? 인간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개입하려 하면 아마 사냥을 당할 거네.”
“드래곤이 사냥을 당해?”
“그렇다네. 기사까지 갈 것도 없이 병사 몇 명만 있어도 잡히거나 죽을 거야.”
“……!”
“이곳엔 없지만 내 고향엔 총이라는 것이 있네. 금속을 쏘는 기구지. 그걸로 집중 사격을 당하게 되면 드래곤 아니라 드래곤의 할애비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네.”
“드래곤이 브레스를 쏴도 그러나?”
라세안은 지극히 도전적인 눈빛이다.
“전차라는 것이 있네. 그 안에 탑승한 채 공격하면 브레스로도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지. 그밖에도 미사일이라는 것이 있네. 그거 하나면 커다란 산도 단번에 박살 나지.”
“……!”
“뿐만 아니라 핵폭탄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금 규모가 큰 거 한 방이면 여기 라수스 협곡은 물론이고 미판테 왕국 전체의 생명체를 말살시킬 수도 있네.”
현수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허풍을 떨고 있다. 이 허풍에 놀아난 라세안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다.
“드, 드래곤은 하늘을 날 수 있는데?”
라세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비된 답변이 튀어 나간다.
“내 고향엔 전투기라는 게 있네. 번개와 같은 속도로 허공을 날아다니며 지상 또는 창공의 적들을 물리치지.”
“……!”
“기총 소사만으로도 웬만한 드래곤은 죽음에 이르네. 거기에 각종 미사일도 쏠 수 있네. 심지어 핵폭탄도 가능하지.”
“헐……!”
라세안은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드래곤을 쉽게 사냥하는 동네가 있다는 소리에 얼이 빠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수의 눈빛을 살핀다. 거짓인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함이다.
이에 현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머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 고향에선 총이 가장 약한 화기이네. 그러니 병사 몇 명만 있어도 드래곤 사냥이 가능하지.”
“끄으으응!”
라세안은 나직한 침음을 낸다. 현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현수를 보았을 때 공격하지 못한 것은 너무도 태연자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K―6에 당하던 날 이후 라이세뮤리안은 라수스 협곡 전체를 그야말로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현수가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때 현수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연희와 이리냐를 양쪽에 끼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튼 모든 드래고니안을 풀었고, 그들의 후손까지 동원하여 뒤지고 또 뒤졌지만 현수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수시로 손바닥을 살폈다. 본체로 있었음에도 K―6의 공격이 너무 강렬하여 상처를 입은 것이다.
큐어나 힐, 컴플리트 힐 같은 마법 한 방이면 능히 치료가 되겠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함이다.
소위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한 것이다.
이 말은 섶에 누워 쓸개를 씹는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딤을 이르는 말이다.
분노에 찬 나날이 흘렀지만 원흉은 나타나지 않았다.
8월 7일, 라이세뮤리안은 드래고니안들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기 위해 그 마을에 갔었다.
물론 현수를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하고는 나서는 길이다.
그러다 현수를 보게 되었다.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보았는지를 생각하던 것을 그렇게 오해한 것이다.
너무도 태연자약하였기에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지근거리에서 다시 한 번 K―6 같은 중화기에 공격을 당하면 당할 수도 있다는 뼈저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라세안이라는 가명을 대고 동행하는 동안 상대의 의심을 풀기 위해 부러 동갑이라고 했다. 그래서 하찮은 인간으로부터 지금껏 반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라이세뮤리안은 현수의 곁에서 극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다. 분명 마법을 쓰는 걸 보았다. 그런데 마나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알기에 현수는 슬쩍 마나를 흘렸다. 그렇기에 최소 소드 마스터에 8써클 마법사라는 걸 파악하기는 했다.
문제는 아공간이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K―6는 있을 것이다. 그게 어떤 원리로 어떻게 작동되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강력한 병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꺼내 놓는 물건마다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기에 가깝게 있으면서도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코리아 제국이라는 나라에 관한 이야길 들었다.
눈앞엔 날개가 없지만 분명 일족을 닮은 생명체의 사체가 있다. 리절렉션이란 고절한 마법까지 썼다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런 생명체를 고작 병사 몇이서 사냥한다니 기가 막히고 코까지 막힌다.
현수의 눈빛을 보니 전차, 전투기, 미사일, 핵폭탄이란 건 분명 존재하는 듯하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드넓은 미판테 왕국을 단숨에 말살시킬 수는 없다.
그런데 핵폭탄은 그러고도 남는다고 한다.
게다가 한번 터지고 나면 그 땅엔 아주 오래도록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땅이 된다고 한다. 이건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얼마나 지독하면 그렇게 될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아무튼 코리아 제국에 비하면 여긴 재미가 있어. 그쪽은 세상 사는 게 조금 빡빡하거든.”
“영지민을 1,000만이나 가져도 그런가?”
“그런 영지가 꽤 많거든. 내 영지는 아무것도 아니네. 카라치라는 영지는 영지민의 수효가 2,400만이 넘네. 상하이 영지는 2,300만을 조금 넘고.”
“뭐? 이, 이천사백만?”
상상도 되지 않는다는 듯 입을 딱 벌린다. 미판테 왕국의 국민을 다 합쳐도 그 정도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델리 영지는 2,200만, 상파울로 2,030만, 뭄바이 2,000만, 멕시코시티 1,950만 등등이네. 하여간 그쪽엔 나라도 많고 영지도 많다네.”
“헐! 자, 자네가 사는 세상의 인구는 얼마나 되나?”
“내가 알기론 70억 2천만 명 정도 되네.”
“뭐? 치, 칠십억 이천만?”
“그래. 아마 조금 더 늘었을 거야. 계속해서 인구가 느니까.”
라세안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현수는 내심 웃겼지만 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전방을 살폈다.
“그, 그쪽은 여기보다 문물이 발달했나?”
“당연하지. 수학을 예로 들자면 이쪽은 거기에 비하면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지.”
“이쪽 수학이 초보라고?”
“그래, 자네 수학은 좀 하나? 내가 문제 하나 내볼까?”
현수가 짐짓 낮춰본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발끈한 라세안이 도발적인 눈빛을 보낸다.
“내게.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보세.”
“좋아. 15의 제곱은?”
“225이네.”
“그럼 1부터 10만까지 모두 더한 값은?”
“뭐? 그, 그게 그러니까…….”
라세안은 머릿속으로 분주한 계산을 하면서 시간을 끈다. 그런데 현수는 문제를 내고 10초쯤 지난 뒤 답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