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8
“그런데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되는지요?”
“말씀만 하세요. 저희 힘으로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할게요.”
루디 언니의 이 말은 진심이다. 죽어달라는 걸 빼면 정말 다 들어줄 생각이다.
심지어 마을의 모든 여인들로 하여금 현수의 애를 낳아달라고 해도 기꺼이 들어줄 것이다.
그렇기에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바라본다.
과도하게 라세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때문이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송구스럽군요. 제 부탁은 미혹의 숲을 지나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해주실 분이 있었으면 합니다.”
“아! 미혹의 숲…….”
루디가 뭘 우려하는지 약간 안색을 흐린다.
“어려운 일인가요?”
“아뇨. 길 안내는 어렵지 않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특별히 원하시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로 하여금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디는 다시 정색한 모습이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미혹의 숲만 지나갈 수 있으면 됩니다. 촌장님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러죠. 그럼 저희끼리 잠시 회의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물 펌프를 설치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루디 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봐, 라세안!”
“왜 그러나?”
“같이 갈 거지?”
“당연한 말을 뭐하러 하나? 근데 물 펌프라는 게 뭔가?”
“보면 알게 된다네. 그럼 따라오게.”
현수는 아공간에서 위그드라실의 잎을 꺼내 들었다. 라세안은 그게 무엇인지 안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그건……?”
“이곳에 와 인연을 맺은 엘프가 선물한 것이네. 어디에 수맥이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있어 아주 유용한 것이지.”
“아! 그런가?”
라세안은 현수가 아르센 대륙의 엘프 누군가와 혼약한 것으로 오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위그드라실의 잎은 순결한 처녀 엘프만 지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남성 엘프, 또는 유부녀 엘프가 소지하면 쉽게 잎이 말라 버린다.
처녀 엘프는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났을 때 위그드라실의 잎을 건넨다. 이것은 첫날밤은 보내는 침상 밑에 깔리게 된다.
건장과 장수, 그리고 다산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이다.
여성 엘프는 평생 딱 하나의 위그드라실 잎만 가질 수 있고, 그렇게 잎을 건넨 상대와 평생을 함께한다.
테세린에 있을 때 현수는 레이찰 토들레아로부터 위그드라실의 잎을 건네받았다. 이건 오빠로서 막내동생인 하일라 토들레아를 너의 반려로 주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현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의 하일라 토들레아는 현수를 사랑하지 않았다.
감옥 속에서 죽었어야 할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에 나머지 인생을 다 바쳐 은혜를 갚겠다는 뜻으로 준 것이다.
여성 엘프는 종신토록 혼자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에 위그드라실의 잎이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아무튼 문제는 그다음이다.
테세린을 떠날 때, 현수는 엘프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노자로 쓸 돈도 주었고, 가다가 다치면 쓰라고 포션도 주었다.
그리고 아공간에 있던 몇 벌의 의복도 주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입고 있던 것이 다 낡고 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준 것은 국산 아웃도어 브랜드인 K2와 블랙야크, 그리고 코오롱과 칸투칸 제품들이다.
산속을 누벼야 할 것이기에 기능성 등산복을 준 것이다.
부드러운 촉감과 산뜻한 착용감, 그리고 편안함은 셋을 놀라게 했다. 특히 등산화가 압권이다.
가볍고 너무나 편했다. 발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호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런 귀한 물건을 준 것은 셋에게 호감이 있어서라 판단했다. 특히 하일라 토들레아는 현수가 위그드라실의 잎을 받고 자신을 반려로 인정하여 주는 예물인 것으로 오인했다.
그렇기에 현재 현수를 그리며 살고 있다. 한 번 온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올 것이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엘프는 인간에 비해 훨씬 긴 수명을 가졌기에 50년 내로만 당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지구의 사내들에게 있어 엘프는 꿈속에서나 그려볼 절대 로망이다. 그런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현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거나 현수는 위그드라실의 잎을 가지고 수맥을 확인했다. 다행히 마을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잎사귀가 현저하게 아래로 휘어진다.
“여기가 좋겠군. 디그! 디그! 디그!”
마법을 구현시킬 때마다 포크레인으로 파낸 것처럼 흙이 푹푹 퍼진다. 수십 번의 마법을 구현시킨 결과 물이 보인다.
깊이는 대략 40여m 정도이다.
먼저 숯을 넉넉하게 넣고 자갈로 눌러놓았다. 다음엔 파이프를 넣고 물 펌프 설치를 시작했다.
몇 번 해봐서 그런지 아주 능숙한 솜씨다.
한편, 아공간에서 나온 펌프를 본 라세안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대체 뭐하는 건가 살피고 있다.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드래곤 체면에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알려지길 원치 않은 때문이다.
이윽고 모든 작업이 마쳐졌다. 제대로 설치되었는지를 점검한 현수는 마중물을 넣고 펌프를 작동시켰다.
원래의 물 펌프는 깊이가 10m를 넘으면 물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기압 때문이다. 하지만 흡입 마법진을 끝에 그려놓았기에 깊이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찌꺽, 퍼억! 찌꺽, 퍼억!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아!
“헉! 물……?”
물이 쏟아져 나오자 라세안의 눈이 커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펌프질을 했다.
찌그덕! 찌꺽! 찌그덕! 찌꺽!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아아!
라세안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쏟아지는 물에 손을 대본다.
“이, 이건 대체 뭔가?”
“뭐긴, 땅속에 있는 물을 끌어올려 주는 장치지.”
“…자네가 사는 곳엔 이런 게 많나?”
“그럼. 이런 건 집집마다 다 있네.”
라세안은 대꾸 대신 물 펌프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손잡이를 보는 눈에는 경탄의 빛이 어려 있다. 이건 드래곤의 레어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 아르센 대륙에선 물을 얻는 방법이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샘이나 개울에서 필요한 만큼 퍼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우물을 파는 것이다.
당연히 물이 귀하다. 그렇기에 잘 씻질 못한다.
그런데 현수는 틈만 나면 씻는다. 아침에도 씻고 저녁에도 씻는다. 그냥 손과 얼굴만 닦는 게 아니라 아예 목욕을 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물이 흔한 세상에 살아서인 모양이다.
펌프 설치가 끝낸 현수는 주변에서 구경하던 여인들을 불렀다. 다들 왜 부르나 하는 표정이다.
“지금부터 납작하고 편평한 돌들을 주워오세요. 개울가에 가면 많이 있을 겁니다.”
“……?”
이번엔 왜 돌을 가져오라고 하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기세라 할 수 없이 설명을 했다.
“물이 나오면 주변의 땅이 질퍽해지니까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7장 똥으로 만든 국
여인들이 우르르 몰려가자 현수는 아공간에서 삽을 꺼냈다. 그리곤 물이 흘러갈 길을 트기 시작했다. 작업이라곤 해본 적 없는 라세안이 거들 것이라곤 상상치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잠시 삽질하는 현수를 보던 라세안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다.
“나도 그걸 주게. 그럼 돕겠네.”
“이거 생각보다 힘이 들 수도 있어.”
“걱정 말고 주기나 하게.”
“그러지.”
현수가 삽을 꺼내 주자 라세안도 삽질을 한다.
그런데 글자 그대로 삽질이다. 물이 진창을 이루지 않고 흘러내려 가려면 적당한 경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깊이를 일정하게 파고 있으니 어찌 삽질이 아니겠는가!
“에구! 이보게, 친구!”
“응?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
현수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보기에 한 말이다.
“그렇게 파놓으면 웅덩이가 되지. 여기 습지 조성할 일 있어? 물이 흘러가게 하려면 구배를 줘야지.”
“구배? 구배가 뭔가?”
“구배(句配)란 수평을 기준으로 한 경사를 뜻하네. 이렇게 경사지게 해야 물이 저쪽으로 흘러내려 가네.”
“아! 알았네.”
“그럼 이쪽부터 저쪽까지 쭉 파. 여기서 흘러내린 물이 농토 근처를 흘러야 농사도 지을 수 있을 것이니.”
“알았네. 맡겨만 두게.”
드래곤 라이세뮤리안이 열심히 삽질하는 동안 현수는 시시콜콜 지시만 했다. 그럼에도 찍소리 않고 작업을 한다. 군대로 치면 뺀질이 중사가 어벙한 일병 데리고 작업 나온 듯하다.
이때 라세안의 입술이 달싹이는 걸 현수는 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작업하는 사이 회의를 마쳤는지 루디 촌장과 여인들이 우르르 나온다.
“어머, 벌써 다 만드신 거예요?”
“그럼요. 크게 힘들 일도 아니니까요.”
현수의 대답에 루디가 뒤에 있던 다프네를 앞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곤 다프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미혹의 숲은 이 아이가 안내하기로 했답니다.”
“아! 그래요? 잘 부탁드립니다.”
수고를 끼치게 될 것이기에 정중히 예를 갖췄다.
“네에.”
다프네는 뭐가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세안은 열심히 삽질 중이다.
그러던 중 여인들이 일제히 움찔거린다. 라세안으로부터 뭔가 지시를 받은 모양이다. 현수는 부러 모르는 척했다. 뭔가를 꾸미기는 하겠지만 해롭진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잠시 후, 다들 개울가로 납작한 돌을 가지러 출동했다.
여인들의 도움을 얻어 펌프장 인근 포장 공사를 마친 것은 이슥한 저녁나절이다.
예전처럼 마을 한복판에 마련된 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100% 채소로만 이뤄진 단출한 식단이다.
그런데 산속에 있어서 그런지 간이 맞지 않다. 상단이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기에 소금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째 심심하다 했더니 암염이 떨어져서 그렇다며 난색을 표한다. 라세안이 은밀히 음식 타박을 한 모양이다.
참 한심한 아비이다.
현수는 피식 웃고는 아공간에서 소금을 꺼내 주었다.
미혹의 숲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값이라 하니 다들 좋아한다. 그래도 맛이 별로이기에 마요네즈와 드레싱을 꺼내 줬다. 그제야 먹을 만해졌다.
물론 오묘한 맛과 고소함에 라세안을 비롯한 모든 여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음식을 먹고 현수는 라세안과 함께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여인들은 감히 범접할 생각조차 못하고 모두 물러났다.
더 이상 남은 실프의 눈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세안이 있으니 감히 무언가를 해볼 생각조차 못한 때문이다.
하여 모처럼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는 곧바로 출발했다.
“잘 다녀와.”
“걱정 마요, 언니.”
다프네는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마을 어귀까지 나온 여인들도 손을 흔든다.
“미혹의 숲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여기서 꼬박 사흘은 걸어야 해요.”
“흐음, 그래요? 그럼 거기까진 내가 앞장서죠.”
“네에.”
현수가 앞장서자 다프네와 라세안이 약간 뒤처져 따라왔다. 둘은 걷는 내내 뭔가를 소곤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현수가 앞장을 선 이유는 가는 동안 만드라고라와 같은 약초를 채집하기 위함이다.
어쨌거나 드래곤이 일행이기에 어떠한 몬스터도 감히 나타나지 않아 여정은 편했다.
“저어… 하인스님,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다프네의 말에 고개를 돌렸던 현수는 그 자리에 멈췄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걸었다. 일곱 시간이 넘는다. 그래서 그런지 다프네는 다소 지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