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
“그러지요. 쉬는 김에 점심이나 해 먹읍시다.”
말을 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마침 개울이 흐른다.
현수가 준비한 점심 메뉴는 카레라이스이다.
“이건 이름이 뭔가?”
라세안은 카레 가루를 풀어 넣은 물이 끓기 시작하자 궁금하다는 묻는다. 색깔은 똥물 비슷한데 톡 쏘는 냄새가 나서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다.
“이건 카레라 하지. 처음 먹을 땐 조금 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맛이 일품인 음식이야. 조금만 기다리게.”
“그래? 흐음, 맛이 어떨지 궁금하군.”
라세안이 뭐라고 또 물었지만 무시하고 당근, 감자, 고기 등을 넣었다. 한쪽에선 압력밥솥의 추가 돌기 시작한다.
찰락, 찰락, 찰락, 찰락―!
이때 다프네가 신기하다는 듯 압력밥솥에 손을 댔다가 깜짝 놀란다. 몹시 뜨거웠기 때문이다.
“앗, 뜨거!”
“아! 데었어요? 어디 봐요.”
화들짝 놀란 현수가 다프네의 손을 보니 빨갛게 되더니 금방 부풀어 오른다.
“이런…….”
현수는 얼른 수통의 물을 꺼내 뿌렸다. 그리곤 바세린 로션을 발랐다. 다음은 조심스럽게 거즈로 환부를 감쌌다.
비상약품 통에서 반창고를 꺼내 그걸 고정시켰다.
일련을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세안이 한마디 한다.
“자네 마법사 아니었나?”
왜 힐이나 큐어 마법으로 해결하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현수는 속으로 아차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의 습관이 저도 모르게 치료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실수를 인정하겠는가!
현수의 좋은 두뇌가 맹렬히 회전했다.
“마법이 좋기는 하지. 하지만 너무 남발하면 안 좋네. 인체가 가진 자연 치유력으로 자연스럽게 하는 게 가장 좋거든.”
“……!”
말을 마친 현수는 한 수 가르쳐 줬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말을 마치고 보니 봐선 안 될 것이 눈에 뜨인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다프네의 눈길이다.
그걸 피해 시선을 내리다가 엉성한 의복 때문에 보이는 두 개의 탐스러운 달덩이를 보게 되었다. 무협소설에선 이를 수밀도(水蜜桃)라 칭한다.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주룩 흐르는 아주 맛 좋은 복숭아라는 뜻이다. 물론 진짜 복숭아는 아니다.
“……!”
사람의 두뇌라는 게 평생 5% 미만만 쓰인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름 고성능이다. 그렇기에 어떤 건 한 번 본 걸 평생 잊지 못하기도 한다.
방금 전에 본 두 개의 달덩이도 그중 하나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순간적이지만 현수의 뇌리에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된 때문이다.
“허험!”
나직한 헛기침을 낸 현수는 얼른 몸을 돌려 몇 발짝 앞서갔다. 그런 그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있다.
라세안이다. 1,000분의 몇 초도 안 될 짧은 순간 동안 현수의 시선 변화를 보았던 때문이다.
현수의 눈에 탐스러운 두 개의 달덩이가 보이던 바로 그때 순간적으로 동공이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 심장의 박동수도 늘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라세안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그렇기에 의미심장한 괴소를 베어 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다프네는 손가락을 감싼 붕대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현수이다.
“점심 안 먹을 거야? 어여 와.”
“하하, 그래. 그래야지. 자아, 다프네 너도 먹자.”
“네.”
다프네는 자신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인 라세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걸음을 옮긴다.
현수는 분주한 손길로 밥 위에 카레를 얹었다.
식탁엔 카레라이스 외에도 김치와 단무지, 그리고 마요네즈로 드레싱한 샐러드가 있다. 물론 수저와 포크도 있다.
“먹자.”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수저를 들고 현수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둘은 금방 따라 한다. 쓱쓱 비벼서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라세안의 눈이 커진다.
불과 수초 후, 다프네의 눈도 커진다.
“우와앗! 매워! 후와아! 너무 매워!”
“이잉! 너무 매워요! 후와아!”
현수는 피식 웃고는 계속해서 식사를 했다.
처음 먹는 이에게는 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아까 이야기했으니 잘못한 것 없다는 표정이다.
“거기 샐러드 먹어. 그럼 덜 맵게 느껴질 테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샐러드를 먹는다.
그러더니 다시 카레라이스에 숟가락을 들이민다. 현수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때문이다.
“아! 그건 권하고 싶지 않네. 이것보다 더 맵거든.”
라세안의 포크가 김치로 향했을 때 한 말이다.
“매워봤자 얼마나 맵겠는가. 치약만큼 맵지는 않겠지.”
말을 마치고는 말리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날름 김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우우욱! 매, 매워! 후와아아! 매워! 으으으윽!”
라세안의 눈에서 눈물까지 찔끔 흘러나온다.
“거 봐. 내가 맵다고 했잖아.”
말을 마친 현수가 태연하게 김치를 집어 먹는다. 아주 잘 익어서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 하는 소리가 난다.
즙의 냄새와 뒷맛도 아주 일품이다. 너무 맛이 있어 입에 딱 맞기에 흐뭇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 라세안은 열심히 샐러드를 씹고 있다.
다프네는 김치는 감히 건드려 보지도 못한 채 밥과 샐러드만 먹는다.
현수는 웃음이 나왔지만 웃지 않았다.
점심 식사가 끝났을 때 밥은 남지 않았지만 카레는 상당히 남았다. 라세안과 다프네가 골라내고 먹은 탓이다.
“내 고향에는 불교라는 종교가 있네. 그 종교의 수도자 가운데 청담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지.”
“……?”
“그분은 북한산에 있는 도선사 주지 시절, 사람들이 수채 구멍에 버린 밥알을 주워 식사를 하셨네. 살아서 음식을 버리면 죽어 지옥에 가서 그걸 다 먹을 때까지 죄 갚음을 해야 한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지.”
“그건 왜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불교의 교리에 의문을 가진 라세안의 물음이다.
“모든 음식은 생명체로부터 나오네.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두 생명을 가졌으니까. 그 생명을 죽여 만든 게 음식이네. 근데 그걸 남겨서 버리게 되면 애먼 생명을 낭비한 셈이 되지. 그래서 지옥이라는 곳을 가게 되네.”
“흐음, 지옥이란 데는 대체 어떤 곳인가?”
“헬이라고 설명하면 알아듣겠나? 그곳과 비슷한 곳이네.”
“으음!”
라세안은 나직한 침음을 냈다. 드래곤이니 죽어도 지옥이란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나가 흩어지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수는 라세안의 내심을 짐작하기에 말을 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순간에 몸무게에 변화가 일어나네.”
“죽는 순간?”
“그래. 내 고향 의사들이 그걸 재봤다네.”
“그래서?”
라세안과 다프네는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평균적으로 21g의 몸무게가 줄었다네.”
“21g? 왜지?”
“그게 영혼의 무게이네. 영혼이 몸을 떠나면서 체중 감소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네. 그건 아마 드래곤도 그럴 것이네. 사람처럼 이성이 있는 생명체이니 말이네.”
“……!”
“하여간 죽으면 몸은 흩어지지만 영혼은 사라지지 않네. 그리고 그 영혼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천당에 가기도 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하지.”
“천당과 지옥?”
라세안이 궁금해했지만 현수는 말을 이었다.
“살면서 좋은 일 많이 하고 착하게 산 영혼은 천당으로 가고, 나쁜 짓을 많이 한 자들의 그것은 지옥으로 가지.”
“……!”
“음식을 남겨 버리게 되는 것 역시 죄이네. 그게 쌓이면 천당 갈 영혼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네.”
“……!”
“거기서 모든 죄를 갚으면 다시 태어나는데 죄질이 극악하면 오크나 트롤 같은 몬스터로 태어나고, 중간이면 사람, 그리고 착한 일을 많이 한 영혼은 드래곤으로 태어난다고 가르치네. 불교에서는.”
현수의 말이 끝나자 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다프네이다.
“저, 그거 주세요. 제 몫은 제가 먹을게요.”
“흐음, 나도 주게. 아무리 매워도 참아보겠네.”
현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웃지 않고 카레를 넘겼다.
둘은 연신 물을 마셔가며 남긴 것을 모두 해치웠다.
‘역시 겁을 줘야 해. 근데 드래곤도 겁을 먹네. 크크크!’
둘이 음식을 먹는 동안 인근 숲을 뒤지던 현수의 입가에 웃음이 밴다.
“큭큭! 크크크큭!”
조금은 사악한 미소이다.
어쨌거나 둘은 매운 카레를 다 먹었다. 그 결과 배가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 나왔다. 물을 많이 마신 때문이다.
현수는 서서히 길들여지는 라세안이 이런 걸 알까 싶어 웃은 것이다.
“라세안, 설거지는 자네가 할 거지?”
“내가? 다프네도 있는데?”
라세안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우물쭈물하는 다프네에게 다가갔다.
“지금 다프네와 잠깐 할 말이 있어서 그래.”
“그, 그래? 그럼 그래. 알았어. 내가 하지.”
라세안이 그릇들을 들고 개울로 향하자 현수는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다프네를 바라본다.
“다프네 양, 우리 전에 내기한 거 기억해요?”
“내기요? 아, 그거요? 그럼요.”
다프네는 현수와의 활쏘기 내기를 하던 장면을 기억해 내곤 표정을 바꾼다. 감히 활쏘기를 경시했다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다.
“그럼 지금부터 사흘간으로 하면 될까요?”
“좋아요. 사흘 드리죠. 그 뒤에 활쏘기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해요.”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현수는 심심한 여정이기에 다프네를 놀려먹으려 웃음 지었다. 하지만 다프네는 아닌 모양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지금부터 사흘간 활쏘기를 가르쳐 달라면 언제든 가르쳐 드릴 거예요. 사흘 후 이 시간에 이동 표적을 향해 화살 세 발을 쏘아 하인스님이 그중 하나라도 맞히면 이기는 걸로 해요.”
“표적의 크기와 표적까지의 거리는 어쩌죠?”
현수는 마냥 느긋한 표정이다. 이게 다프네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다프네는 발끈하는 표정이 되었다.
“흥! 자신만만하신 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군요. 설마 그동안 나 몰래 활쏘기 수련을 한 건 아니겠죠?”
“왜요?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
다프네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지난번 오크의 습격이 있었던 날짜는 7월 11일이다. 그리고 오늘은 8월 10일이다. 한 달이 지났을 뿐이다.
활쏘기는 10년은 수련을 해야 한다. 따라서 고작 한 달 동안 쏴봤자 얼마나 쐈겠나 싶은 생각을 했다.
“아뇨. 괜찮아요. 앞으로 사흘 후에 해요.”
“다프네 양은 지면 무엇을 요구할 생각입니까?”
“그건 제가 이겼을 때 말할 거예요. 그러는 하인스님은 내기에서 이기면 뭘 요구할 건가요?”
“후후, 나도 이기면 이야기하죠.”
“아무튼 좋아요. 내기 성립이에요?”
“그럽시다.”
이야길 마치고 돌아오니 라세안을 설거지한 그릇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나 없이 둘이서 뭘 하고 온 거지? 설마……?”
라세안은 짐짓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법으로 둘이 한 이야길 모두 들었으면서도 이러는 것이다.
여기에 당할 현수가 아니다.
“그 설마가 맞네. 우리 둘이 숲에서 뭘 했지. 궁금한가? 궁금하면 5실버!”
“…크으윽! 졌다.”
라세안은 현수의 익살스런 표정을 보고 두 손을 번쩍 든다.
“자, 이제 출발하자.”
“그래.”
서둘러 모든 것을 아공간에 담은 현수가 앞장섰다.
그렇게 사흘을 걸었다.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아 서로에 대해 조금은 더 아는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