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
현수는 라세안이 소문처럼 흉포하고 색만 밝히는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세안이라는 이름으로 유희를 나갈 때마다 여자들이 먼저 들이대서 할 수 없이 거둔 게 대부분이라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라세안이 말하길 몇몇 여인은 본인이 대시를 해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다프네의 모친이다.
어떤 나라 공주였는데 너무 예뻐서 대놓고 들이댔다고 한다.
그때 그 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혜성처럼 등장한 라세안 덕분에 그걸 모면하게 되었다.
라세안의 활약에 반한 공주는 그의 대시를 받아주었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 공주 이외에도 여러 여인을 거느리고 있던 라세안은 정기적으로 그녀들을 찾았다. 그러던 중 공주는 출산을 하게 되었다. 예정보다 훨씬 빠른 조산이었다.
공주의 처소에 시녀들이 있었지만 과다 출혈로 인한 사망을 저지할 능력은 없다.
그렇기에 다프네가 태어나던 날 공주는 목숨을 잃었다.
수천 년을 살면서 라세안은 많은 여인들과 헤어짐을 경험했다. 그래서 레어 뒤쪽 양지 바른 동산에 무덤이 즐비한 것이다.
그들 대부분 노쇠하여 죽었다. 다시 말해 천수를 누렸다. 하긴 드래곤의 가호 속에서 살았는데 어찌 비명횡사했겠는가!
아무튼 라세안은 헤어짐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공주의 죽음을 확인하곤 시녀들에게 다프네의 양육을 맡기고 레어로 돌아갔다.
이후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의 인간 여인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래곤에 비해 너무나 연약하기에 작은 일로도 쉽게 목숨을 잃는 인간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아프기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라세안은 여기저기 떨어뜨려 놓았던 여인들을 레어로 불러들였다.
혹시라도 변고가 생겼을 때 즉각 대처를 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아방궁1)이 차려졌다.
한동안 그 안에서 환락을 누렸다. 그러다 현수의 공격을 받았고, 분기탱천하여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현수의 모든 것에 호기심이 돋아 하찮은 인간에게 반말을 듣고, 설거지나 하면서 동행하는 중이다.
다프네의 경우는 미혹의 숲을 안내하라는 명을 받고 따르는 중이다. 이 명령은 루디 촌장이 내린 것이 아니다.
라세안이 현수를 잡아두기 위한 미인계의 일환이다.
삽질을 하면서 은밀히 전음으로 말하길, 현수를 잡아야 하니 가장 젊고 예쁜 아이를 안내자로 선정하라 했던 것이다.
물 펌프 하나의 설치가 끝나도록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서로 맡으려 했던 것이다.
삽질을 하면서도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라세안은 노성을 터뜨렸다. 물론 전음이다.
그리곤 다프네를 골랐다. 마을에 와서 본 아이 가운데 가장 젊고 예쁘다고 느낀 것이다. 여기엔 보상심리도 작용되었다.
요절한 공주를 대신하여 기쁨을 누리라는 뜻이다. 현수의 여인이 되면 많은 것을 누리며 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우리 둘이 활쏘기 내기를 했네. 사흘 후 내가 이동하는 표적을 맞추기로 했는데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네.”
“그래? 그거 재미있겠군.”
라세안은 다프네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번 내기는 보나마나 딸의 패배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자신을 향해 쏘았던 화살들은 똑같은 궤적을 그리며 쇄도했었다.
이는 정밀 사격을 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동 표적을 맞추는 것은 쉬울 것이다.
“표적의 크기는 오크 머리통 정도구요, 50보 밖에서 오크가 움직이는 속도쯤으로 하면 될 거예요.”
다프네의 말에 현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아요. 오크가 있다면 그놈을 겨냥하면 되겠네요.”
“찬성!”
“흐음, 결과가 흥미롭겠군.”
셋은 다시 길을 떠났다. 현수와 라세안이 짝을 이루기도 했고, 라세안과 다프네가 짝을 이뤄 걷기도 했다.
밤이 되어 텐트를 치고 안에서 쉬었다. 물론 다프네에겐 별도의 텐트를 제공했다. 당연히 호기심 어린 손길로 텐트와 침대를 어루만지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다음날 아침 현수는 청국장을 준비했다.
“으윽! 이건 무슨 냄새야?”
텐트를 나서던 라세안이 코를 틀어막는다. 청국장 특유의 진한 냄새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서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을 보고는 대경실색한다. 색깔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으웩! 설마 자네가 싼 똥을 끓이는 거야?”
“네에? 그걸 어떻게 먹어요?”
볼일이 있다면서 숲 속에 들어갔다 온 다프네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먹을 게 궁해도 지금껏 똥에 물을 붓고 끓여서 먹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난 그걸 먹느니 차라리 굶겠네.”
“으윽! 저도요.”
“정말? 배 안 고파?”
“그래. 안 먹어.”
드래곤이 어찌 한낱 인간이 싼 똥을 먹겠는가!
라세안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다프네 역시 마찬가지다.
“저도 한 끼니쯤은 굶을 수 있어요. 식재료가 없으면 말씀하시지. 숲에 들어가면 많은데.”
다프네는 공연히 한 끼 굶게 되었다 생각하는지 눈을 흘긴다.
“그럼, 그래. 난 먹을 테니까.”
“이보게, 하인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먹나? 그것도 아침부터!”
“맞아요, 라세안님. 차라리 사냥하러 갈까요?”
“그럴까?”
라세안이 그럴 맘이 있다는 듯 몸을 돌리려는데 현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압력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펐다.
구수한 냄새가 풍기니 공연히 회가 동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국장을 떠놓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이를 본 라세안과 다프네가 거의 동시에 구역질을 한다.
“우욱!”
“우우욱!”
“남 밥 먹는데 그러지 말게.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말을 마친 현수는 연신 숟가락질을 하며 밥을 먹었다. 그런데 너무 맛있게 먹는다.
“근데 그거 재료가 뭔가? 자네가 싼 똥인가?”
“아니!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싼 똥을 먹어?”
“그럼 뭐야? 냄새가 아주 고약한데?”
라세안이 코를 틀어쥔다. 다분히 과장된 몸짓이다.
“이거? 이건 콩을 발효시켜 만든 거네. 건강에 매우 좋은 음식이지. 노화도 억제하고 변비에도 효과가 있지.”
현수는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서둘러 밥을 먹었다. 새로 지은 따끈따끈한 밥에 청국장을 넉넉히 비벼서 먹는 맛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다른 반찬이 있으면 라세안과 다프네도 자리에 앉았을 것이나 현재는 달랑 밥과 청국장뿐이다. 식탁이 이렇게 단출한 이유는 다른 반찬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현수가 너무나 맛있게 먹으니 입에서 침이 감도는 듯 라세안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다프네도 마찬가지이다.
“이거 정말 똥으로 만든 거 아니지?”
“나를 뭐로 보는가? 설마 내가 똥이나 먹는 사람 같아?”
“아니. 그건 아니지.”
유난히도 씻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떠올린 라세안은 청국장이 똥을 끓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좋아, 나도 그거 좀 주게.”
“어머, 라세안님! 설마 저걸…….”
다프네는 여전히 더럽다 생각하는 듯하다.
“좋아, 주지. 먹어봐. 얼마나 맛있는지.”
밥을 퍼주고, 국자로 청국장을 듬뿍 담아주었다.
여전히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라세안을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더니 살짝 한숨을 쉬곤 숟가락을 들었다.
‘이게 사람 똥을 끓인 거라면 드래곤 역사상 가장 더러운 놈으로 낙인찍히겠지? 설마 그러려고. 에라,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한 라세안이 청국장 비빈 밥을 입안에 넣었다.
“……!”
상상할 수도 없던 맛이다.
잠시 후, 라세안은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한편, 다프네는 라세안이 똥국 먹는 모습을 보고 이맛살을 찡그리고 있다.
잘 돌봐주지 않는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낳아준 사람, 아니, 드래곤이다. 그런데 인간의 똥을 먹으니 어찌 비위 상하지 않겠는가!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모독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하얀 건 뭔가?”
“그건 두부라는 거네. 그것도 콩으로 만든 거지.”
“두부? 그럼 이건 뭐지?”
라세안의 숟가락에 있는 정체 모를 것은 거무스름한 부분과 누르스름한 것이 섞여 있다.
“그건 우렁이라는 것이네. 더위를 쫓고 몸속의 열을 내리며, 눈을 맑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할 뿐만 아니라 갈증을 다스리는 효능이 있는 음식이지.”
“으음! 그런가?”
라세안은 우렁이를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었다. 약간 질긴 느낌 이외엔 별 맛이 없다.
“그럼 두부는 어떤 효능이 있나?”
“효능이 너무 많은 음식이지. 그냥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상당히 많이 가졌네. 그냥 먹게.”
말을 마친 현수가 두부를 먹자 라세안도 조심스런 표정으로 그걸 씹어보았다.
“으음! 엄청 부드럽군.”
둘이 먹는 모습을 보던 다프네는 긴장된 표정이다. 먹을까 말까 고심 중인 것이다.
8장 폭리란 이런 것이다!
“다프네 양, 설마 내가 못 먹을 걸 만들어주겠습니까? 그냥 먹어보세요. 절대 똥으로 만든 거 아니니까요.”
“저, 정말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느니’라는 말도 몰라요?”
“……?”
처음 듣는 말에 눈만 동그랗게 뜬다.
“일단 먹어봐요.”
말을 마친 현수가 밥과 청국장을 떠주었다. 그리곤 관심 끊었다는 듯 먹기 시작했다.
“……!”
잠시 후, 다프네는 숟가락으로 깨작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망설이는 것이다.
“흐음, 이게 맛이 상당히 고소하군. 좋아! 아주 좋아!”
라세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기에 용기를 낸 다프네가 청국장을 입에 떠 넣었다.
“흐으음!”
여전히 비위에 맞지 않았지만 다프네는 억지로 떠먹었다.
음식을 남기면 지옥에 간다는 말을 들었기에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자아, 설거지는 자네가 하게. 나는 가서 활쏘기 연습을 할 테니.”
“좋아, 다녀오라고.”
현수가 자리를 뜨자 라세안은 냄비 속의 청국장을 듬뿍 떠서 먹기 시작했다.
현수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마나 디텍션 마법을 구현시켰다. 예상대로 마나가 뭉쳐진 게 느껴진다.
텐트에서 자는 동안 풍겼던 진한 냄새의 근원지이다.
코를 벌름거리며 찾아간 곳엔 예상대로 만드라고라가 있다.
‘으읏! 심봤다!’
이 녀석은 분명 식물이다. 그런데 인간이 접근하면 도망가기도 한다. 뽑을 때 엄청난 소리를 질러 몹시 시끄럽기도 하다.
“홀드 퍼슨! 논 노이즈!”
마법부터 구현시켰다. 예상대로 도망치려던 놈이 멈춘다.
현수는 장갑부터 꺼내서 꼈다. 그리곤 조심스런 손길로 주변의 흙을 퍼내고 만드라고라를 뽑아냈다.
검은색이다. 암놈이라는 뜻이다. 가깝게 있는 것을 뽑아내니 하얗다. 이 녀석은 수놈이다.
근처를 보니 녀석들이 또 보인다. 현수는 한곳에서 모두 열두 뿌리를 뽑을 수 있었다. 크기를 보니 무척 오래된 듯하다. 산삼으로 치면 최소 500년은 됨 직하다.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앗싸! 이럴 줄 알았어!’
이곳 라수스 협곡은 인간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곳이다. 그렇기에 이런 보물들이 있을 것이란 예상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군데 몰려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사실 보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드래고니안 마을을 떠나 다프네가 사는 마을까지는 가는 길목,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이곳까지 오는 길 좌우에도 보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쉐리엔이 그것이다. 눈길이 가는 곳마다 수북하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워낙 번식력이 좋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채취하지는 않았다. 갈 길이 바쁘기도 하지만 혼자 채취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