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
드래고니안, 또는 그의 후손들과 루디 언니에게 부탁하여 채취를 부탁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
이곳에 가장 부족한 것은 소금이다. 이밖에도 일반적인 생활용품 역시 턱없이 부족하다.
라세안이 인간과의 접촉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그걸 공급하는 조건이라면 아마도 원하는 만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드라고라로 기력 회복제를 만들면 어떨까? 100살이 다 된 노인도 펄펄 날아다니게 되지 않을까?’
현수는 자신의 상상에 피식 실소를 지었다.
‘정말 그렇게 되기만 하면 좋겠네. 상품명은 기력 회복 포션이 되나? 그럼 제품명은 뭐로 하지?’
현수는 피식피식 웃으며 걷는다.
‘그래, 펄펄 날아다닐 테니 전에 생각했던 대로 ‘펄펄’이라고 하면 되겠군.’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다니나?”
“아! 저기서 방금 만드라고라를 캤거든.”
“만드라고라? 그깟 걸 왜?”
“내 고향에서 제법 귀한 약재 대접을 받는 거거든.”
“흐음, 만드라고라라면 이곳 라수스 협곡에 꽤 많이 있지.”
“오! 그래? 나중에라도 그걸 캐줄 수 있겠나?”
“그럼 내게 뭘 줄 건데?”
라세안은 완전히 장사치 같은 표정이다.
“뭐가 필요한가?”
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꾸한다.
“자네가 가진 무기!”
라세안은 K―6와 AT―16의 작동 원리를 알고 싶다. 그렇기에 내주기만 하면 산산이 분해할 생각이다.
그런데 현수가 찬물을 끼얹는다.
“엥, 그건 안 되네. 코리아 제국의 전략 무기라 내 맘대로 반출 불가하네.”
“왜? 자네가 가지고 다니질 않는가?”
“나는 제국의 백작이네. 따라서 내가 쓰는 건 되지만 타인에게 넘기는 것은 국법으로 엄히 금하고 있네.”
“듣자하니 코리아 제국은 여기서 엄청 멀지 않은가! 그런데 그걸 어찌 알겠나?”
“명색이 백작이네. 귀족으로서 양심에 거리끼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현수의 반문에 라세안은 한참 동안 입을 닫았다. 명예가 뭔지 알기 때문이다.
“근데 무기 말고 다른 건 뭐 없나? 소금이랄지, 후춧가루 이런 거 필요하지 않나?”
“뭐, 별로.”
라이세뮤리안 입장에선 소금과 후춧가루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텔레포트로 인간이 사는 도시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신통치 않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럼 이런 건 어떨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현수가 아공간에서 꺼낸 것은 아이스크림이다. 날이 밝으면서 기온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아이스크림이라고 하는 것이네. 코리아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친히 우리 가문에 하사해 주신 귀한 물건이지.”
“아이스크림? 먹는 건가?”
“그렇다네. 한번 먹어보게.”
“좋아.”
현수가 건넨 아이스크림!
정확한 상품명은 브라보콘 화이트바닐라이다. 바닐라빈 씨가 콕콕 박혀 있는 이것은 매우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낸다.
“흐으음!”
현수가 껍질을 까주자 한입 덥석 베어 문 라세안의 표정이 또 바뀐다. 이번에도 ‘세상에 이런 맛이!’라는 얼굴이다.
어느새 다가온 다프네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먹는 거 가지고 사람 차별하지 말라는 눈빛이다. 이런 미인으로부터 미움을 사면 손해이다.
현수는 기꺼운 마음으로 다른 하나를 꺼내 주었다.
다프네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시원하고 달콤하며, 부드럽고 향기롭다. 이런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라세안은 하나를 다 해치웠다.
“이거 엄청 맛있군. 하나 더 주게.”
“그러지.”
현수는 미끼 상품인 브라보콘 화이트바닐라를 하나 더 꺼내 주었다. 라세안이 맛에 심취한 얼굴로 그걸 반쯤 먹었을 때 입을 열었다.
“자네가 먹는 그거 엄청 귀한 거네. 내 고향에선 그거 하나에 1,000골드를 받지.”
“……!”
1,000골드는 10억 원에 해당된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싸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라세안은 반문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쩐지!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또 있을까 했네. 근데 돈만 있으면 이걸 사 먹을 수 있다는 건가?”
“아니.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건 불가능하네. 코리아 제국의 마법사들이 만든 이것은 그 수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네.”
“……?”
라세안은 어서 말을 이으라는 표정이다.
“설명하자면 기네. 아무튼 자네와 나, 거래를 하세.”
“거래? 어떤 거래?”
“만드라고라 한 뿌리에 이거 하나! 어떤가?”
현수는 칼만 안 들었지 강도이다.
브라보콘 화이트바닐라의 정가는 1,500원이다. 대형 할인마트에선 다섯 개를 5,000원에 팔기도 한다.
하나당 1,000원이라는 뜻이다.
100년 정도 된 만드라고라를 산삼과 같은 반열에 놓고 가치를 판단한다면 감정가만 1억 원 정도 된다. 그렇다면 조금 아까 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물이다.
아무튼 1,000원 VS 1억 원은 1대 100,000이다.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 같은 거래를 요구한 것이다. 그럼에도 라세안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표정을 짓는다.
“정말? 정말 그렇게 해주겠는가?”
만드라고라는 한 뿌리당 100골드 정도에 거래된다. 그런데 1,000골드짜리로 바꿔준다니 어찌 안 좋겠는가!
현재 라수스 협곡 곳곳에 만드라고라 군락지가 있다. 그걸 뽑지 않은 이유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훨씬 더 많은 양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고니안과 그의 후손들을 총동원하면 될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하나에 1,000골드씩 주고 사 먹으면 된다. 레어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보석을 주면 된다.
그게 다 떨어지면 라수스 협곡에 빌붙어 사는 드워프들을 닦달하면 된다. 그렇기에 환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지금 당장은 말고 일단 여길 벗어난 다음에 구해주게. 다프네 양이 사는 마을과 드래고니안 마을의 좌표를 아니 다음엔 텔레포트로 이동하면 되니까.”
“그건 그래. 근데 그거 외상은 안 되나?”
“외상?”
아르센 역사상 처음으로 드래곤이 외상으로 군것질을 하려는 상황이다.
“그래. 먼저 아이스크림을 주게. 그럼 같은 수량의 만드라고라를 주겠네.”
“…좋아, 그러지. 자넬 믿겠네.”
현수가 잠시 말을 끊은 까닭은 뜸을 들이기 위함이다. 시선을 마주치고 신뢰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늠한 척한 것이다.
어찌 보면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다. 상대를 믿지 못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믿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거래는 성립되었다.
“먹고 싶으면 말만 하게. 꺼내 줄 테니.”
“근데 그거 많은가?”
라세안은 이게 가장 중요하다는 듯 눈빛을 빛낸다.
“자네가 먹을 만큼은 있네.”
“조금 많았으면 좋겠는데, 얼마나 있나?”
“잠시 기다려 보게.”
말을 마친 현수는 아공간 속의 브라보콘 수를 헤아렸다.
냉동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박스 속의 것까지 따져 보니 대략 1,500여 개가 있다.
“흐음, 1,500여 개쯤 남았네.”
“그래? 그거 내가 다 찜하겠네.”
“그건 아니 될 말이네. 이건 우리 가문에서 기사 작위를 내릴 때마다 하나씩 하사하는 귀한 물건이네. 자네에게 다 주고 나면 우린 어쩌나?”
“그, 그런가?”
대답하는 라세안의 눈에 탐욕의 빛이 감돈다. 몽땅 갖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그럴 것이다.
현수는 이쯤에서 타협안을 내놓았다.
“자네가 정히 원하면 1,000개까지는 교환하지.”
“1,000개? 그건 더 못 구하는 물건인가?”
“그렇진 않네. 황실 마법사들이 매년 일정량을 만드네. 작위에 따라 황실로부터 구매할 수도 있네.”
“아! 그런가? 그럼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이군?”
“아니네. 방금 말했듯 일정량만 만들 수 있으므로 무한정 구입할 수는 없네. 우리 가문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량은 연간 1,000개가 상한선이네.”
“일 년에 겨우 1,000개?”
라세안은 아쉽다는 표정이다. 그러다 문득 현수를 따라 코리아 제국으로 갈 생각을 해보았다.
이곳에서 그러했듯 코리아 제국의 황실을 위협하면 아이스크림을 독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 것이다.
그러다 번뜩이는 상념이 있어 부르르 떤다.
K―6, AT―16, 그리고 핵배낭 등을 기억해 낸 것이다. 하마터면 사냥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다.
“아무튼 최대한 많이 팔게. 얼마든지 사겠네.”
돈이 떨어지면 다른 드래곤의 레어를 털어서라도 사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라이세뮤리안이라는 이름만 대면 몇몇 드래곤은 벌벌 떤다. 그러니 보석 몇 포대나 황금 몇 톤 정도는 쉽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1,000개를 주게. 조금 전에 먹은 걸 빼고 998개를 주면 되네.”
“아니네. 그건 맛보기로 준 거니 대가를 받지 않겠네. 우린 친구 아닌가!”
친구라면서 10만 배나 폭리를 취하는 현수는 몹시 뻔뻔한 인간이다.
“그래?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아무튼 얼른 주게.”
“그러지.”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브라보콘을 라세안에게 넘겨주었다. 드래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종족이니 이 거래는 사기당할 위험이 전혀 없는 안심 거래이다.
그렇기에 현수의 입가엔 웃음기가 배어 있다.
‘흐흐, 만드라고라 1,000개면… 흐흐흐흐!’
현수의 입가는 절로 위로 올라간다. 너무나 만족스런 거래이기 때문이다.
“저기… 저희 마을엔 안 파시나요?”
“……?”
“저희 마을 인근에도 만드라고라 자생지가 있어요. 그걸 뽑아 줄 테니 우리 마을에도 파세요.”
“얼마나 있죠?”
“오십 뿌리쯤 돼요.”
“좋아요. 드리죠. 근데 지금 드리면 다 녹을 텐데 어쩌죠?”
“그럼 나중에.”
“그럽시다.”
현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면서 다프네의 얼굴에 나타난 탐욕의 빛을 읽었다.
너무나 맛있어서 하나 더 먹고 싶다는 표정이다.
“미리 하나 줘요?”
“…네, 주세요.”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를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라세안은 하나를 다 먹고 또 하나를 까는 중이다.
“차가운 거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나네. 적당히 먹어.”
“으읍! 그, 그래. 알았어. 이것만 먹고.”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안 된다는 듯 연신 혀를 내밀어 날름거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웃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새로운 거래를 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추가로 거래하지 않겠나?”
“뭐가 또 있어?”
“아암, 있지. 이건 어떤가?”
이번에 꺼내 든 것은 ‘자유시간’이라는 초콜릿바이다. 이것도 브라보콘처럼 해태제과에서 만든 것이다.
“그건 뭔가?”
현수가 한 입 베어 물자 라세안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연신 아이스크림을 핥는다.
“이건 고혈압과 각종 심장질환, 그리고 다이어트에 효능이 있는 것이네.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이 체내 산화질소량을 증가시켜 혈관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폴리페놀? 그건 뭔가?”
“그런 게 있네. 전문적인 내용이라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것이네. 아무튼 이건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일으키는 위 점막 손상을 억제하여 위염 및 위암 억제 효과도 있지.”
“색깔과 생긴 건 조금 그런데?”
“그래도 맛은 있지. 그거 다 먹으면 하나 줄 테니 먹어보게. 이것도 제국의 황실에서 만드는 거거든.”
현수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뻥을 쳤다.
“다 먹었네. 이제 줘보게.”
“그러지.”
껍질을 벗겨 자유시간을 건네 주자 덥석 베어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