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
“흐으음!”
아프리카에 사는 부시맨이 처음 초콜릿을 먹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라세안은 입안에 감도는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향에 취한 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황홀한 느낌 때문이다.
초콜릿 성분 가운데 테오브로마인(Theobromine)은 신경을 자극한다.
폐의 평활근을 이완시켜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느끼도록 해줄 뿐 아니라,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엔돌핀 생산도 돕는다.
또 다른 성분인 트립토판(Tryptophan)은 뇌에서 세로토닌(Serotonin)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을 만든다.
이는 사랑에 빠졌을 때 분비되는 물질로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다.
특히 ‘초콜릿의 암페타민’이라 불리는 페닐에틸아민(Phenylethylamine) 성분은 대뇌피질을 각성시켜 뇌 속의 행복중추를 자극한다.
라세안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중이다. 너무도 예민한 감각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다프네는 브라보콘을 다 먹고 또 바라본다. 말은 안 하지만 ‘나도 하나 주세요’라는 뜻이다.
“다프네 양도 먹어볼래요?”
“네에!”
고개가 거의 반사적으로 끄덕여진다.
껍질을 까주자마자 자유시간을 입에 넣은 다프네의 반응도 라세안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쯤해서 거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현수가 입을 연다.
“이건 제법 많은 양이 있네. 오다 보니까 쉐리엔이 많던데 그걸 채취해 주면 바꾸지.”
“쉐리엔? 그 잡초는 왜?”
아무 쓸모도 없는 잡초와 황홀감을 느끼게 하는 초콜릿을 바꾸자는 말이기에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내 고향에선 많은 가축을 사육하네. 쉐리엔을 채취해 사료로 주려고.”
졸지에 지구에 사는 살 빼고 싶은 모든 여인들을 가축화하는 현수이다.
“정말인가?”
“그래. 대신 뿌리와 줄기, 그리고 열매를 분리해서 채취해 줘야 하네. 아울러 이물질도 제거되어야 하고.”
“……!”
“섞어서 먹이면 가끔 설사를 해서. 아무튼 분리해서 주게.”
“그래? 그럼 그렇게 해주지. 좋아, 근데 그거 하나당 얼마나 채취해 주면 되나?”
“글쎄? 보기엔 이래도 이게 제법 값이 나가. 그러니 이거 하나당 쉐리엔 100㎏ 정도면 어떨까?”
“100㎏? 좋아, 그렇게 하지.”
라세안은 별 생각 않고 단박에 고개를 끄덕인다. 놀고먹는 드래고니안과 그 후손들을 닦달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면 드워프들을 굴려도 되고, 라수스 협곡 끄트머리에 둥지를 틀고 있는 엘프를 시켜도 된다.
그래도 부족하면 율리안 영지에 요구하면 된다.
모르긴 몰라도 나후엘 자작가는 모든 영지민을 총동원해서라도 바라는 양만큼 바칠 것이다.
현수로서는 쉽게 막대한 양의 쉐리엔을 공급 받을 길이 열린 셈이다. 하여 슬며시 미소 짓고 있는데 다프네가 묻는다.
“우리 마을도 그래도 돼요?”
다프네가 끼어들자 라세안의 표정이 바뀐다. 루디 촌장에게 지시하여 쉐리엔 채취를 명령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되죠. 라세안과 같은 조건입니다.”
“네에, 고맙습니다. 근데 어떻게 드리죠?”
다프네의 물음에 라세안이 개입하여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못을 박았다.
“나중에 내가 커다란 쇠 상자를 가져다 놓을 겁니다. 채취한 것을 거기에 넣으면 됩니다.”
“나도 그 쇠 상자라는 걸 줄 건가?”
“그럼. 보관하기 편해야 하니까. 몇 개나 줄까?”
“쇠 상자가 얼마나 큰데?”
“잠깐 기다리게.”
현수는 아공간에 담겨 있던 컨테이너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화원공사 왕영백이 의류 수입을 하는 척하면서 금괴와 마약을 들여왔던 그 컨테이너이다.
“흐음! 생각보다 크군.”
라세안은 또 눈빛을 빛낸다. 컨테이너의 정교함에 눈길이 간 때문이다.
“참, 다프네 양, 이 컨테이너 안에는 옷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골라서 입어도 됩니다.”
“어머, 정말요?”
그렇지 않아도 삐져나와 있는 의류를 보며 저건 대체 뭘까 했던 다프네이다.
“흐음! 여기 있는 게 여성용이니 원하는 것을 골라요.”
“남자 건 없나?”
“자네도 필요한 게 있으면 골라서 입게.”
“그거 고마운 말이군.”
라세안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스 안에 담긴 의복들을 꺼내 자신의 몸에 대본다. 그러는 사이에 다프네는 현란한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의 이모저모를 살핀다.
“뒤쪽에 가서 갈아입어 봐요.”
“네, 고마워요.”
다프네가 입어보러 간 사이에 현수는 라세안의 옷을 골라주었다. 초록색 아베크롬비 스타일 티셔츠와 베이지색 캐주얼 바지가 잘 어울렸다.
아공간에서 적당한 허리띠까지 꺼내 주었다.
라세안은 이런 종류의 의복을 입어본 적이 없기에 입어보는 걸 도와주어야 했다.
“잘 어울리는군.”
“그래?”
“근데 신발이 좀 그러네. 잠깐 기다리게.”
현수가 아공간에서 꺼낸 건 트래킹용 아쿠아 샌들이다.
“오오! 이거 좋은데?”
샌들을 신어본 라세안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보기보다 가볍고 신어보니 착용감이 매우 좋은 때문이다.
이때 노란색 바탕에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다프네가 다가왔다.
“저, 어때요? 저한테 맞는 건가요?”
“……!”
허름한 마의에서 촌스런 원피스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확연히 달라 보인다.
아까까지는 상당히 괜찮은 미녀였다. 거지같은 의복에 민낯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 미모가 대단하다. 카이로시아도 예쁘고 로잘린도 예쁘다. 줄리앙도 엘리시아도 상당한 미인이다.
그런데 붉은 머리 다프네는 그녀들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다. 그렇기에 잠시 말을 못 이었다.
물론 현수가 그렇다는 것이다. 라세안은 혹시 또 건질 건 없나 싶어 박스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프네 양,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요.”
현수는 아공간에서 빗과 머리끈을 꺼내 다프네의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해 줬다. 반짝이는 인조 보석이 붙어 있는 머리띠도 꺼내서 끼웠다.
여전히 민낯이지만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다프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님프2)의 이름이다. 과연 이름에 걸맞은 미모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프네는 현수가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인 라세안의 친구인지라 꼼짝도 못하는 것이다.
“이제 되었네요. 참, 이거 신어봐요.”
다프네에게도 아쿠아 샌들을 꺼내 주었다.
미혹의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 길을 안내해 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그리고 신고 있는 오크 가죽으로 만든 투박한 신발이 거의 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 정말 발이 편해요. 딱딱하지도 않고요. 고마워요.”
다프네는 새로 얻은 신발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라세안은 티셔츠 몇 벌과 바지 몇 개를 골라냈다.
“다 골랐나?”
“그래, 이 정도는 줄 수 있지?”
“그럼. 그나저나 이게 내가 말한 쇠 상자야. 빈 걸 줄 테니 그 안에 쉐리안을 가득 넣어주게. 뿌리 따로 줄기 따로, 그리고 열매도 따로 채취해 주게.”
“그러지. 당연히 보존 마법을 걸어야겠지?”
“물론이네. 내 고향까지 가져가려면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이런 쇠 상자를 얼마나 꺼내 놓으면 되겠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네. 얼마든지 채취해 주지.”
라세안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그래도 너무 많이 꺼내 놓으면 자리만 차지하니 나중에 적당히 꺼내 주겠네.”
“그러게.”
이때 다프네가 또 끼어든다.
“저어, 하인스님, 저희 마을에도 주실 거죠?”
“네, 한 30개 정도면 될까요? 아니다. 조금 더 줄게요.”
“네?”
현수가 갑자기 말을 바꾸자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쇠 상자를 2층으로 쌓으면 훌륭한 방어 시설이 될 거예요. 오크들은 이 상자를 넘어올 수 없으니까요.”
“아! 그러네요.”
다프네는 현수의 말을 금방 이해한 듯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자, 너무 지체했어. 이제 다시 출발하지.”
“그래. 근데 그거 미리 좀 주면 안 되겠나?”
“뭐? 초콜릿바?”
“그래. 조금 전에 먹은 거.”
“그러지.”
라세안의 아공간으로 들어간 자유시간은 1,000여 개다.
쉐리엔 100톤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길을 재촉하며 마을을 떠나온 지 사흘 만에 미혹의 숲이라는 곳에 당도하게 되었다. 과연 그럴 만하다.
“여길 왜 미혹의 숲이라 하죠?”
“짙은 안개 때문이에요. 그리고 묘한 지형 때문이기도 하죠.”
“안개와 지형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맨다고요?”
“네, 저희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야 여길 통행하는 방법을 알아냈어요.”
다프네가 말을 하며 의복 속에 넣어두었던 지도를 꺼내 든다. 어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이리저리 빙빙 돌리더니 방향을 잡았다는 듯 손으로 가리킨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쪽으로 갈 거예요.”
“왜요? 저쪽으로 가려면 이리로 가야 하잖아요.”
현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라수스 협곡을 지나치려면 동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다프네는 북쪽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혹의 숲이라는 거예요. 북쪽으로 가야 나중에 동쪽에 당도해요.”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말론 설명할 수 없어요. 하여간 저만 따라오세요. 그러면 이 숲을 지나게 해드릴 테니까요.”
“…좋아요. 지도를 믿어보죠.”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프네가 앞장을 선다. 그런데 혹시 몬스터라도 나올까 싶어 그러는지 몹시 두리번거린다.
9장 혼돈의 숲에서
“와이드 센스!”
현수가 마법을 구현시켰다. 그리곤 전후좌우를 살폈다. 예상대로 많은 생명체들이 있다.
그런데 모두 이동 중이다. 현수가 있는 쪽으로 몰려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도주하는 중이다.
물론 라세안의 존재감 때문이다.
하긴 어떤 몬스터가 감히 드래곤에게 겁없이 덤비겠는가!
이야길 해주고 싶었지만 라세안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현재는 모르는 척해야 한다. 그렇기에 다프네가 두리번거리는 것을 만류하지 않았다.
조심스런 발길로 앞장서던 다프네가 손을 번쩍 든 것은 미혹의 숲으로 들어온 지 10분쯤 지났을 무렵이다.
“왜?”
“앞에 뭐가 있는 거 같아요.”
“앞에? 별다른 거 없는데? 흐음, 마나의 유동이 조금 이상하긴 하군. 안 그런가?”
라세안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금방 잠잠해졌지만 뭔가의 급격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현수 역시 대마법사이기에 라세안과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때 지도를 살피던 다프네가 손가락질을 한다.
“잠깐만요. 지도를 보니 이곳을 우회해서 가라고 되어 있어요. 저쪽이에요.”
다프네가 가리킨 곳은 남쪽이다. 그리곤 가야 하는 방향과는 관계없는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다프네는 과도한 긴장으로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지는 상황이지만 현수와 라세안은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롭다.
하긴 현수는 소드 마스터에 보우 마스터이고, 8써클 마법사이다. 뭐가 무섭겠는가!
게다가 드래곤이 바로 곁에 있다.
라세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곳 라수스 협곡은 본인의 영역이다. 이 안에선 다른 드래곤조차 한 수 접어줘야 한다. 따라서 미혹의 숲에 무엇이 있든 두렵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영역 속에 있음에도 정체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멈춰!”
라세안의 말에 현수와 다프네의 움직임이 멈춘다.
이곳은 미혹의 숲 안쪽에 자리 잡은 커다란 호숫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