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
지금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물에 잔잔한 동심원이 그려지는 중이다. 이건 물고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일행 주변을 은밀히 주시하던 존재가 있다.
그게 뭔지는 라세안도 모른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의 감시였고, 마나 사용에 제약을 가했기 때문이다.
라세안은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마나를 감춘 상태이다.
현수 역시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는 마나량을 보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건 손가락에 낀 마법 반지의 능력이다.
라세안은 마나를 모두 감추었기에 마법을 구현시키려면 먼저 응축시켜 놓은 마나를 풀어야 한다.
따라서 약간의 시간차가 발생될 수 있다.
위급한 순간이 닥치면 큰 핸디캡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든 8써클 마법까지 시전할 수 있는 현수가 곁이 있다.
마나를 응축시켜 제한을 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라세안과 현수가 이렇게 한 이유는 알 수 없는 존재 때문이다. 라수스 협곡의 지배자는 라이세뮤리안이다.
이건 모든 드래곤이 인정하는 것이고, 인간과 몬스터, 그리고 유사인종 또한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라수스 협곡에 주인도 모르는 존재가 은밀하게 빈대 붙어 살고 있다.
주인으로도 당연히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괘씸한 세입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러내 놓고 드래곤임을 알리고 다니면 정체 모를 존재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멀리 도망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범한 척하려 스스로 마나를 동결시켜 놓은 것이다.
이 때문에 일행 중 다프네가 마나량이 가장 많은 존재인 것처럼 여겨지는 중이다.
어쨌거나 현수와 라세안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반면 다프네는 잔뜩 긴장해 있다.
수시로 출몰하는 미지의 존재가 혹시 드래곤 찜쪄먹을 무시무시한 마족이나 마왕이 아닌가 싶었던 때문이다.
다프네는 라세안과 현수가 마나를 감추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은밀한 감시를 하는 존재가 어쩌면 엄청난 능력을 지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라세안이 예리한 눈빛으로 파문이 일고 있는 수면 아래를 노려본다. 조금 전 무언가가 그 안으로 파고들었음을 감지한 때문이다.
‘물속에 뭔가가 있네.’
‘그래, 알아. 조금 전에 뭔가가 들어갔지.’
현수와 라세안이 주고받은 전음이다.
‘뭔지 봤나?’
‘뒷모습만 조금. 체구가 작았네.’
‘그치? 그런데 엄청 빨라서 그게 뭔지 확인이 안 되네.’
‘그렇담 확인해 봐야지. 내가 확인할 테니 자넨 경계 태세를 유지하게.’
현수의 전음에 라세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봉인된 마나를 해제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마나가 감지된다.
“와이드 센스!”
현수는 모든 감각을 수중으로 집중시켰다.
‘어라? 물고기가 하나도 없어? 이렇게 넓은 호수에?’
고개를 갸웃거린 현수는 천천히 범위를 넓혀가며 수중을 탐색했다. 하지만 생명체가 감지되지 않는다.
“분명 뭔가 들어갔지?”
“그래.”
“근데 아무것도 없어. 생명 반응이 없다구.”
“그래? 내가 한번 확인해 볼게, 이번엔 자네가 경계해.”
“그러지.”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세안이 마나로 수중 탐색을 시도했다. 그러더니 이내 갸웃거린다. 그 역시 생명체 탐지에 실패한 것이다. 이때 현수의 뇌리를 스치는 상념이 있었다.
“혹시 수중에 동굴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그럼 들어가 봐야 하잖아.”
현수의 말처럼 수중에 동굴이 있는데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거나 공기가 있다면 탐색하기 어렵다.
마나의 직진성 때문이고, 동일한 매질이 아닐 경우 탐색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으음, 확인해 봤으면 좋겠는데.”
라세안이 현수를 힐끔 바라본다.
“왜 날 봐?”
“나, 솔직히 말해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뭐?”
“어릴 때 물가에서 놀다가 빠지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
개미가 하품할 소리이다. 드래곤이 물을 무서워하다니!
하지만 현수는 비웃지 않았다. 대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설마 나보러 들어가 보라고? 그런 거야?”
“그래. 헤엄 칠 줄 알잖아.”
“끄으응!”
현수는 나직한 침음을 냈다. 날씨도 더우니 물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보통은 최대 4분간 잠수할 수 있다. 하지만 탁월한 능력을 지닌 신체가 있으니 훨씬 긴 시간 동안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넓은 호수를 언제 다 뒤지느냐는 것이다.
“이보게, 친구. 확인 부탁하네.”
라세안이 정중히 고개까지 숙인다. 자존심 강한 드래곤은 다른 존재에게 이렇게 부탁하지 않는다.
현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확인해 보지.”
말을 마치곤 숲 속으로 들어가 수영복으로 바꿔 입었다.
물론 수경도 썼다. 오리발도 착용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작살까지 꺼내 들었다.
“헐! 그게 다 뭔가?”
“뭐긴, 이건 물속에서 사물을 또렷하게 보기 위한 장비지. 이건 훨씬 빠르게 헤엄칠 수 있도록 돕는 장비고.”
수경과 오리발을 본 라세안과 다프네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그럼 손에 든 건 뭐예요?”
수영복 차림의 현수가 등장하자 민망한 듯 슬쩍 고개를 돌렸던 다프네는 이내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조각 작품 같은 현수의 신체를 샅샅이 훑어보는 것이다. 그러다 손에 들린 작살을 보고 물은 것이다.
“이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작살이라는 겁니다.”
라세안이 끼어든다.
“작살?”
“그래. 여기 있는 이 방아쇠를 당기면 여기 있는 이 화살이 쏘아져 가는 거야. 수중 쇠뇌라고 생각하면 되네.”
“흐음, 그거 재미있게 생겼네.”
“관심 끊어. 내게도 하나밖에 없는 거니까. 아무튼 물속에 들어가 볼 테니 자네는 뭔가가 튀어나오나 잘 확인하게.”
“그래, 걱정 붙들어 매. 집중하고 있을 테니.”
고개를 끄덕인 현수는 천천히 얼어 물속으로 들어갔다.
현수의 몸이 들어가자 파문이 인다.
“너는 저쪽에 있으면서 뭔가 튀어나오는지 확인해.”
“네.”
“나오면 소리를 지르고. 알았지?”
“네.”
다프네는 아버지이자 위대한 존재의 명령에 찍소리도 않고 뛰어간다.
“흐음, 대체 어떤 놈이 내 구역엘…….”
라세안은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내며 수면을 째려보았다.
한편, 수중으로 들어간 현수는 수심이 깊어짐에 따라 점차 어두워지자 수중 랜턴을 켰다.
그러자 강력한 빛의 빔이 쏘아져 간다. 현대 문명의 이기는 역시 편안함을 제공한다.
아무튼 밖에서 확인한 대로 수중엔 아무런 생명체도 없다.
현수는 천천히 전진하며 사방을 훑었다. 그러다 숨이 차면 수면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잠수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거의 두 시간에 걸친 탐색을 마친 현수가 호수가로 나오자 라세안이 다가온다.
“휴우!”
“뭐가 있나?”
“아니,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뭔가 이상하기는 해.”
“그치? 뭔가 있는 것 같지?”
“아무것도 없는 게 이상해서 그래. 아무튼 조금 쉬었다가 다시 확인해 볼게.”
“그러게. 근데 물속에 오래 있었는데 춥지 않나?”
“이 정도론 끄덕없네.”
말을 마친 현수는 풀밭에 누워 작열하는 태양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몸을 달궜다. 천연 선탠을 한 것이다.
“다시 들어가네.”
“그래, 조심하게.”
어느새 라세안을 현수의 안위까지 걱정하는 말까지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수를 시도했고, 다시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또 한 번의 휴식을 취하고 호수의 중심부로 잠수했다. 이제 그쪽을 수색할 차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이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잠수한 현수의 눈에 무언가가 뜨인다.
“어! 저건……?”
현수는 수경 속의 눈빛을 빛냈다. 커다란 동굴을 발견한 때문이다.
천천히 유영해 다가간 현수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으음! 대체 이건 뭐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마나의 농도가 점점 진해지는 것 같다.
마치 밀집된 만드라고라 군락지로 다가갈 때의 느낌이다.
‘수중에 수천 년 묵은 만드라고라가 있을 리 만무하지. 그럼 이건 뭐지? 대체 안에 뭐가 있는 거야?’
헤엄을 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는데 숨이 차다.
현수는 수면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하곤 빠른 속도로 잠수했다.
동굴 내부의 지형을 알기에 조금 전보다는 훨씬 신속한 이동이 가능했다.
그렇게 헤엄을 쳐서 안쪽으로 들어가던 현수의 눈이 커진 것은 엄청난 무엇인가를 발견한 때문이다.
그 순간 정체 모를 것이 쇄도한다.
쐐에에에에엑!
“삐이이익―!”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환경이 바뀐다.
수면 위로 치솟게 된 것이다. 어찌 된 것인지 확인하는 것보다는 방어가 우선이다.
“배리어!”
샤르르릉―!
쿵―!
“캐애액!”
뭔가가 배리어에 부딪친 뒤 나가떨어진다.
보니 갓난아이보다도 작은 체구를 지닌 생명체이다. 충격 때문에 혼절한 듯 움직임이 없다.
자세히 살펴보니 키는 30㎝쯤 된다. 사람처럼 생겼는데 금발이고 귀엽게 생겼다. 그런데 날개가 달려 있다.
적어도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다.
배리어에 부딪친 부분이 이마인 듯 혹이 불거져 있다. 조금 웃기는 모습이다.
“피식!”
나직한 실소를 머금은 현수는 정체 모를 생명체에게 마법을 구현했다.
“힐―!”
샤르르르릉!
마나가 뿜어져 나가자 이마에 솟았던 혹이 천천히 줄어든다.
“끄으응! 삐이이이익―!”
“어어! 이러지 말라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현수를 본 자그마한 생명체가 쇄도한다. 현수는 배리어 대신 몸을 피했다.
쐐에에엑!
삐이이익―!
“어허! 이러지 말라니까.”
작은 생명체는 끊임없이 현수에게 부딪쳐 왔다. 배리어에 부딪쳐 혹이 나고 혼절할 정도면 공격력이 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하지만 이에 당할 현수가 아니다. 동체시력만으로도 충분히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살필 정도가 되었다.
“헐! 저건……!”
현수의 눈에 뜨인 것은 황금빛 찬란한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다. 그런데 생명 반응이 없다. 이미 죽은 것이다.
끊임없이 쇄도하고 있는 작은 생명체는 골드 드래곤의 가디언이라고 하기엔 공격력이 형편없다.
그렇다면 애완용 뭔가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쉬지 않고 공격을 한다.
그런데 점차 속도가 느려지는 걸 보면 지친 듯하다.
현수는 작은 생명체를 공격하여 상처를 입히거나 죽일 마음이 없기에 막는 대신 피하기만 했다.
그렇게 10분쯤 지나자 바닥에 내려앉아 헐떡거린다.
“히잉! 히이잉! 히잉! 히이이잉!”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말이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지만 일단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낮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한 말이다.
“거짓말! 주인님의 보물과 마나가 탐나서 온 거잖아.”
“주인님? 저기 있는 저 골드 드래곤이 네 주인이니?”
“그래. 주인님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알았어. 안 건드릴게. 근데 네 주인님은 자는 거야, 아님 죽은 거야?”
“히잉! 돌아가셨어. 되게 오래되었어. 히이잉!”
현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래곤이 죽으면 신체를 구성하고 있던 마나가 흩어진다. 그러면 사체 역시 먼지처럼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수면 아래 잠겨 있는 골드 드래곤의 사체는 멀쩡해도 너무 멀쩡하다.
그렇기에 수면기에 있는 거냐고 물었던 것이다.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히잉! 해가 40만 번쯤 떴다가 졌어.”
“40만 번? 그럼 천 년도 더 되었단 말이야?”
“히잉, 그래. 다시 일어난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일어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