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
오는 동안 현수와 많은 대화를 했기에 다프네는 예전과 많이 달라진 상태이다.
이전의 다프네는 남자를 혐오했다. 수컷 드래고니안들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남자는 여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며, 평생 하늘처럼 떠받들 존재라 여긴다. 현수가 장난을 친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수의 말이 떨어지자 곧바로 대답을 한다.
“지금부터 최하 석 달은 살아야 한다는 건데 아무것도 없군요. 흐음, 이래선 곤란하죠.”
“……!”
라세안과 다프네는 말없이 현수만 바라보았다.
“일단 식량과 잠자리가 필요하군요. 아공간 오픈!”
가장 먼저 간이침대를 꺼냈다. 그리곤 12월 초까지 사용할 침구류를 내놨다. 두툼한 매트리스와 순면 패드, 그리고 오리털 이불과 베개 등이다.
다음엔 식재료이다.
창고 비슷한 게 있어 그 안에 서너 달 동안 먹을 음식을 내놓았다. 보존 마법을 걸었기에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금이 필요하다 하니 비금도 천일염도 꺼내 놓았다. 라면 공장에 워낙 많이 있었기에 거의 반 트럭분을 꺼냈다.
다음엔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겨울옷들을 꺼내 놓았다.
현수가 앙심을 품고 백두마트 서초점을 턴 날은 12월 3일이다. 당연히 겨울 의류가 많을 때이기에 넉넉하게 꺼내 놓았다.
루디 언니 등 다른 여인들까지 고려한 것이다.
발 시리지 말라고 어그부츠도 잔뜩 꺼냈다. 이 밖에도 많은 물건을 꺼내 라세안을 놀라게 했고, 다프네를 기쁘게 했다.
현수가 이런 선심을 베푼 이유는 자신 때문에 이곳에서 외로운 석 달을 보내야 할 다프네를 생각해서이다.
“흐흑! 정말 고마워요. 흐흑!”
결국 다프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나온다. 현수의 호의가 너무나 고마웠던 때문이다.
“에구, 울지 말아요.”
“흐흑! 이제 가시면 언제 또…….”
“내기에 졌으니 한 번은 꼭 들를게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흐흑! 네에. 꼭 오셔야 해요. 아셨죠?”
“그래요. 그럼 잘 있어요.”
“흐흑! 네에.”
다프네는 현수와 라세안의 신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현수 역시 간간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휴우! 다프네 양이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자꾸 뒤돌아보는 현수에게 라세안이 한 말이다.
라세안을 오두막을 떠나기 직전 인근을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근처에 살던 고블린과 늑대, 그리고 오크 등에게 경고한 것이다.
그리곤 곳곳에 소변을 봤다. 영역 표시를 한 것이다.
그것이 자연 속에서 완전 분해되기 전까진 웬만한 몬스터는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딸이니 보호한 것이다.
사실 이곳에 당도하기 며칠 전부터 라세안은 밤만 되면 자리를 비웠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몬스터가 있나 확인해 본다는 핑계를 댔다.
사실은 현수와 다프네가 분위기에 휩싸여 사고 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떻게든 엮어놓으면 많은 비밀을 빼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바른 생활 사나이인 현수가 어찌 그런 사고를 치겠는가!
게다가 이곳 아르센 대륙엔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이 있다. 그렇기에 순종적인 다프네를 보면서도 욕념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끝이 났다. 하여 남몰래 한숨을 쉰다.
‘어휴! 멍청이. 그렇게 자리를 비켜줬으면 확 덮치든지 해야지. 애가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그러기만 했으면 원하는 바를 이뤘을 텐데. 쯧쯧!’
라세안은 다프네를 생각할 때마다 속으로 혀를 찼다.
마을을 떠난 직후부터 다프네가 현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제 곧 라수스 협곡을 벗어나겠군.”
“그래, 인간이 이곳을 통과한 것은 천 년 만에 처음일걸.”
“후후! 그거 영광이네.”
현수는 피식 웃었다.
“여길 벗어나도 여전히 미판테 왕국인데 어디로 가려는 건가? 이 동네는 내가 좀 알거든.”
“미판테 왕국엔 볼일 없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아드리안 공국이라고 했잖은가.”
“아드리안 공국? 아! 멀린이라는 인간 마법사의 후손이 만든 나라를 말하는군.”
“그래!”
“거긴 왜 가려는 건가?”
“내가 전에 말했지? 이곳에 와서 어떤 분을 만났다고.”
“그래. 많은 걸 배웠다고 들었네.”
“그분의 당부로 거길 가야 하네.”
“아! 그런가?”
라세안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현수의 일정엔 관심 없기 때문이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길 하며 라수스 협곡의 경계를 넘었다.
6월 27일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고, 오늘은 9월 5일이다. 무려 69일 만에 협곡을 통과한 것이다.
* * *
아르센력 9월 6일.
현수와 라세안은 자그마한 마을에 당도했다. 아르센 대륙의 마을 대부분이 그러하듯 당도한 곳도 목책이 둘러져 있다.
입구를 찾으니 경계 근무 중이던 병사가 신분부터 묻는다.
“누구냐?”
“용병이오.”
“신분증을 보여주게.”
현수가 C급 용병패를 보여주자 라세안도 용병패를 보여준다. 힐끔 바라보니 B급이다.
유희를 하면서 만들어둔 것인 듯싶지만 묻지 않았다.
“흐음, 통과! 그런데 이 마을엔 무슨 용무지?”
“좀 씻고 먹고 쉬고 싶어서 왔습니다. 여관은 있지요?”
“여관? 이 마을엔 여관 없네. 저쪽으로 6㎞쯤 가면 영주님의 성이 있네. 거기에 여관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게.”
“그래요? 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우리 영주님? 하렌 자작님이시네. 조금 엄하시지. 하지만 사고를 치지 않으면 별일 없을 것이니 안심하게.”
“감사합니다.”
“참! 영주님 성에 가면 여행자를 위한 시냇물이란 여관이 있네. 그곳 음식이 괜찮으니 웬만하면 그리로 가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현수가 고개 숙여 예를 갖춘 뒤 돌아서자 라세안이 찍소리 않고 뒤를 따른다.
둘은 6㎞를 말없이 걸었다. 가는 동안 들판에서 익어가는 곡식들을 보니 왠지 풍요롭다는 느낌이다.
“멈춰라! 이곳은 케발로 영지. 무슨 용무로 왔는가?”
영주성 입구에서 만난 병사의 첫마디이다.
“용병입니다.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니지요.”
“용병? 그렇다면 신분패를 내놓게.”
“여기 있습니다.”
현수가 용병패를 내밀자 라세안도 내민다.
“잘 왔네. 저쪽 용병 사무실이 있으니 일단 신고하게.”
“네?”
“일거리를 찾아왔다면서?”
현수의 반문에 왜 토를 다느냐는 표정이다.
“네, 그렇습니다만.”
“용병 사무실에 등록을 해야 일을 주지. 안 그런가?”
“아! 네, 물론입니다. 근데 여행자를 위한 시냇물이란 여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배가 좀 고파서요.”
“그 여관은 저쪽에 있네. 참고로 사슴 안심 스테이크가 일품이네. 쩝! 하여간 통과!”
용병패를 돌려주는 위병은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돈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현수와 라세안은 일단 여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더운물로 목욕을 하기 위함이다.
딸랑딸랑!
“어서 옵셔! 두 분이십니까? 그럼 이쪽으로.”
현수를 맞이한, 이제 겨우 열 살쯤 된 어린아이가 손짓으로 빈자리를 가리킨다. 여관에 딸린 식당 겸 주점엔 테이블 여덟 개가 놓여 있고 현재 일곱 개는 손님이 있다.
딱 하나 빈자리의 양쪽에는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대낮임에도 많이 마셨는지 얼굴들이 불콰3)하다.
“뭘 드시겠습니까?”
“뭐가 맛있지?”
소년의 물음에 라세안의 대꾸였다. 이때 곁에 있던 덩치가 한마디 한다.
“뭐가 맛있긴, 다 맛있지. 안 그래?”
슬쩍 바라보니 눈이 풀려 있다. 만취 상태인 것이다. 라세안이 발작하려는 순간 현수가 팔꿈치로 툭 쳤다.
“이봐, 친구! 뭘 먹든 우리 자유니까 끼어들지 말게.”
“어쭈? 친구?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서 감히……. 너 이리…….”
“야! 시끄러. 술 먹다 말고 웬 시비야?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어서 마시기나 해.”
“마셔? 아암, 그래. 마셔야지.”
일행의 한소리에 바로 꼬리를 내리곤 몸을 돌린다. 그러고 보니 곁에 있는 덩치가 더 크다. 힘에서 밀리는 듯하다.
“저어, 손님, 저희 집은 사슴 안심 스테이크가 유명한데 그걸로 드릴까요?”
“그래. 그걸로 2인분 주게.”
“네에, 알겠습니다. 그런데 술은 안 드십니까?”
“대낮인데?”
무슨 뜻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꼬마는 더 물을 것도 없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곤 돌아서려 한다.
“빈방 있지?”
“네, 손님. 저희 여관은 깨끗하고 저렴하며 친절하고…….”
아예 입에 발린 말인 듯하다.
“좋아, 1인실 두 개 주고, 각각의 방에서 목욕할 수 있도록 해줘.”
“네, 손님! 1인실 두 개, 각 방 목욕이요. 목욕 시중 시녀도 대기시킬까요?”
“목욕 시중 시녀?”
“네, 손님이 목욕하실 때 시중 들어줄 누나들이 있잖아요.”
“…난 필요 없네. 라세안 자네는?”
“나? 난 있으면 좋지. 하나 준비시켜 줘.”
“알겠습니다, 손님.”
꼬맹이가 물러가자 모두의 시선이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목욕 시중 시녀라니… 여기도 참…….”
“미판테 왕국 사람들은 호색하기로 유명하네. 그래서 노예 계집들이 많지.”
“흐음, 그런가?”
“그럼 그 노예들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지?”
“전쟁에 패한 국가에서 끌고 오거나 영지전에서 패한 가문에 소속된 사람들이 노예가 되지.”
“그래?”
미판테 왕국의 사회 구조를 뜯어고치러 온 것이 아니기에 현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곤 어두컴컴한 주점 겸 식당의 내부를 살폈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호리호리한 녀석이 간간이 눈빛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본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린다. 왠지 기분이 나쁘다.
잠시 후, 사슴 스테이크가 나왔다.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누린내가 적어 후춧가루를 치지 않아도 되었다.
“에이, 맛없어.”
라세안이 반쯤 먹다 남긴다.
“왜? 먹을 만하구만.”
“자네가 해준 음식이 훨씬 맛있네. 쩝! 입맛만 버렸어. 술이나 한잔할까? 그거 한 병만 주게.”
라세안이 요구한 것은 소주이다. 삼겹살을 몇 번 먹더니 아예 중독된 듯 저녁 먹을 때마다 달라고 했다.
현수는 슬쩍 아공간을 열어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쭈우우우욱!
“캬아아! 그래, 이 맛이야.”
라세안은 광고에서 많이 듣던 소리를 한다. 그리곤 맛없다는 사슴 스테이크 한 점을 우물거리며 먹는다.
그리고 또 병나발을 분다.
꿀꺽, 꿀꺽, 꿀꺽!
“캬아아아!”
라세안이 한 병을 비우는 데 걸린 시간을 불과 10여 분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주점 내의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술을 마신 뒤의 리액션이 워낙 특이했던 때문이다.
11장 업어치기 한판!
“이봐, 이 주점 전세 냈나? 왜 이렇게 시끄러워?”
처음 시비를 걸었던 덩치가 겁도 없이 라세안을 째려본다.
“……!”
너무 어이가 없었기에 라세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이를 쫀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당장 사과해!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우리가 마신 술값을 내고. 알았어?”
덩치의 한마디에 라세안이 폭발하려는 순간 현수가 먼저 나섰다.
“뭐야, 이 십장생은? 지금 우리에게 시비 건 거야?”
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덩치가 가소롭다는 듯 괴소를 터뜨리며 일어선다.
“크흐흐흐! 이런 애송이가… 지금 감히 나 라이쇼님에게 시비를 거는 건가? 크크크크! 좋아. 아주 좋아. 너 나와.”
술이 과했는지 비틀거리는 덩치를 본 현수는 피식 비웃었다.
“나 참, 별것도 아닌 것이! 그래, 좋아. 나와.”
라세안이 나서면 덩치는 반쯤 죽거나 아예 죽을 것이다. 그렇기에 보호 차원에서 먼저 나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