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1
1장 당신의 정체는 뭐죠?
“소개해 준다고요? 누구요?”
지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현수는 싱긋 웃음 지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발생한 어색함을 감추려는 의도이다.
“그건 식사 후에 말해줄게요. 그나저나 이렇게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어머, 아니에요. 현수 씨 덕분에 외국 구경도 해보는 거잖아요. 안 그럼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똑같은 일상 속에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요. 근데 정말 피곤하지 않아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잔뜩 긴장해서 그런지 다리는 좀 아프네요.”
말을 마친 지현이 배시시 웃음 짓는다. 아름답다.
이런 미인이 아프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현수는 속에서 들끓는 선심을 저도 모르게 표현한다.
“그래요? 그럼 다리를 여기에 올려보세요.”
“네……?”
현수의 말에 지현이 눈을 크게 뜬다. 소파에 다리를 올려놓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몹시 더운 지방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해줄게요. 올려봐요.”
현수는 아무런 사심 없이 지현의 종아리를 바라보았다.
“그, 그래요.”
지현은 머뭇거리다 다리를 올렸다.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살을 드러내는 것에 왠지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현수는 지현의 구두를 벗겼다. 지현은 당황한 듯 살짝 웅크리려다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쁜 발이 드러난다.
“다리도 발도 참 예쁘네요.”
“네……?”
지현은 심한 부끄러움에 제대로 대꾸조차 못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현수가 속삭인다.
“눈 좀 잠깐 감아볼래요?”
“네……? 아, 네에.”
눈을 감은 지현의 속눈썹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 이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전형적인 패턴이기 때문이다.
하여 몹시 긴장했다. 이렇게 해놓고 키스를 하려나 보다 생각하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다리도 올려놓았으니 상체만 뒤로 넘어가면 거의 침대나 다름없을 것이다. 저절로 침이 삼켜진다. 이런 긴장 속에서 현수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는데 기척이 없다.
하여 슬며시 눈을 뜨려는데 나직한 소리가 들린다.
“마나여,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켜 줘. 리커버리!”
샤르르르르릉―!
현수의 눈에만 보이는 서늘한 푸른빛 마나가 지현의 곱게 뻗은 다리로 스며든다. 그러자 피로물질인 젖산과 암모니아, 그리고 활성산소가 빠르게 제거된다.
지현은 맡은 업무 특성상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기도 한다.
하여 본인도 모르는 하지정맥류1)가 발생하던 중이다. 그런데 리커버리 마법 한 방에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무릎에도 약간 문제가 있었다. 이것도 완전히 치유되었다.
“어때요? 이제 괜찮죠?”
“어머, 정말 시원해요. 어떻게 한 거예요?”
“후후, 제가 한 마법 한답니다.”
“네……? 마법이요?”
“그래요. 마법으로 치유한 거예요.”
어차피 연희와 이리냐도 아는 사실이니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 밝힌 것이다.
“……!”
지현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의미를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현수는 싱긋 웃어주었다.
“사실은 나 마법사예요. 근데 이건 비밀입니다. 아셨죠?”
“마법사요? 지, 진짜예요? 에이,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플라즈마 볼!”
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바닥 위에 배구공만 한 화염이 생성된다. 그 뜨거운 열기에 화들짝 놀란 지현이 얼른 뒤로 물러나 앉는다.
“헉! 혀, 현수 씨……!”
“너무 놀라지 말아요. 지현 씨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대준 씨와 최장혁 경사를 도울 수 있었던 것 전부 치유 마법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마법이……. 정말 마법이에요?”
지현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의 반응이다.
“매직 캔슬! 플라이!”
손바닥 위에 있던 화염구가 사라지는 대신 현수의 몸이 둥실 떠오른다.
“혀, 현수 씨!”
“이건 비행 마법이라는 겁니다. 이제 믿어져요?”
“세, 세상에……!”
권지현은 입을 딱 벌렸다. 마법이라는 건 책이나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지구엔 단 한 명의 마법사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게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사내는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다. 지금까지 같이 있었으니 어떠한 트릭도 없다.
그럼에도 믿기 힘들다. 상식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럼 이건 어때요? 아이스 포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흰 안개가 사방으로 뻗는다. 그와 동시에 한겨울에나 접할 싸늘함이 느껴진다. 더운 지방인지라 순식간에 실내 기온이 뚝 떨어지니 소름까지 돋는다.
“혀, 현수 씨……!”
자신의 손가락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해지자 지현이 다급성을 토한다.
이러다 잘못되는 거 아닌가 싶었던 모양이다.
“매직 캔슬!”
말 떨어지기 무섭게 자욱하던 안개가 스르르 걷혀 버린다.
“현수 씨!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죠? 외계인인가요?”
지현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가득하다. 지현의 상식으론 마법사는 영화와 소설에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푸흣! 외계인이라니요? 우미내에 사시는 부모님의 아들인 거 뻔히 알잖아요.”
“그,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마법을 익혔죠? 누군가에게서 배웠나요?”
똑똑한 지현은 근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물은 말이다.
“배운 거 맞아요.”
“누구죠? 현수 씨의 스승님은?”
현수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멀린이라고 알아요?”
“멀린이라면……!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 나오는 그 궁정마법사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맞아요. 그분의 풀네임은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죠. 그분은 9써클 대마법사였습니다.”
“……?”
지현은 대체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멀린과 아더왕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마법을 배웠음을 적당히 각색했다.
오래전에 죽었지만 우연히 얻게 된 유품을 통해 꿈에서 마법을 배웠고, 매일 밤마다 꿈속에서 마법을 수련하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지현은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었다. 이건 지현의 또 다른 장점이다.
“아무튼 그래서 마법을 알게 된 겁니다. 나는 주로 치유 마법 위주로 익혔죠. 그래서 지현 씨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치유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
“참, 이 이야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러는지는 대강 짐작하죠?”
“그, 그래요. 말 안 할게요.”
지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현수의 말처럼 마법사인 것이 드러나면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부모님, 그리고 할아버님께도 말 하시면 안 됩니다.”
“네에, 말 안 할게요. 절대……!”
지현은 지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신기한 시간을 경험하는 중이기에 리액션이 상당히 컸다.
지현이 이처럼 당혹스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똑, 똑, 똑!
“주인님!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안에 들어가도 되나요?”
“음, 들어와!”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린다.
그리곤 메이드복을 걸친 알리사와 두 시녀가 바퀴 달린 핸드 카트를 밀고 들어온다.
알리사가 흑인 최고의 미스 USA였던 바네사 윌리암스를 닮았다면, 두 시녀 중 하나는 영화 ‘인디펜던스데이’에서 자스민 역을 맡았던 비비카 A 폭스와 흡사하다. 다른 하나는 모델로 유명했던 타이라 뱅크스의 젊은 시절이다.
이들은 지르코프가 신문에 광고까지 내서 고르고 고른 하녀들이다. 저택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했기에 이토록 빼어난 미모를 지닌 것이다.
아무튼 지현은 세 하녀의 움직임과 태도를 주시했다. 뭔가 의미가 담긴 시선이다.
“어디에 준비해 드릴까요?”
“음, 이쪽에……!”
현수의 손짓에 알리사와 두 시녀가 빠른 손길로 테이블 세팅을 마친다. 그러자 금방 근사한 식탁이 마련된다.
“손님 입에 맞았으면 좋겠어요.”
“아마 그럴 거야. 주방 식구들 솜씨가 좋잖아.”
“네에, 고맙습니다. 뭐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세요.”
알리사의 사근사근한 말씨에 현수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럴게. 수고했어. 모두……!”
“네에, 주인님!”
현수의 고개가 끄덕이자 알리사와 두 시녀가 뒷걸음으로 물러난다. 마치 사극에 나오는 상궁이나 나인 같은 모습이다.
“근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요?”
지현은 약간 발끈한 표정이다. 현수는 대체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하다는 얼굴이다.
“현수 씨! 요즘은 21세기예요. 그리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구요. 근데 하녀라니요? 주인님은 또 뭐예요?”
알리사와의 대화를 알아들으라는 뜻에서 통역 마법을 구현시킨 것이 지현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 그게……!”
현수가 말을 이으려는데 그럴 틈도 주지 않고 지현의 쏘아붙이는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몹시 성난 표정이다.
“설마, 변태들이나 꿈꾸는 메이드 어쩌구를 여기에 실현시킨 거예요? 그쵸……? 그런 거죠?”
“에엑? 아뇨……! 그, 그럴 리가요?”
현수는 너무도 과한 지현의 생각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현의 음성엔 냉랭함이 감돈다.
“아니긴요? 조금 전에 그 아가씨가 주인님이라고 하니까 아주 흐뭇하다는 표정을 지었잖아요. 설마 이 저택에 있는 아가씨들 전부를 벌써 어떻게 한 거 아니에요?”
지현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물론 현수 때문이다.
“말도 안 됩니다. 날 뭘로 보고……?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근데 왜 주인님이라고 해요? 지금 절 속이려는 거예요?”
“아, 아니라니까요. 정말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아니긴요? 이 집에 들어설 때 어째 집이 과도하게 크다 싶었어요. 설마 여기에 하렘(Harem)이라도 차린 거예요?”
“헐……!”
과도한 오해에 현수는 대꾸할 말조차 잃었다.
“아까 들어올 때 뒤에 있던 여자들, 그 여자들은 누구죠? 하나는 요즘 CF에 나오는 이리냐라는 여자지요? 현수 씨가 회사 주식의 절반 이상을 가졌다는 대한약품의 다이어트 보조제를 광고하던……!”
“……!”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여자는 현수 씨가 전무 된 다음에 비서로 뽑았다는 천지건설 양대미녀 중 하나라는 사람이죠?”
지현이 행정고시에 합격한 건 우연이 아니다.
놀랍도록 명석하고 논리적인 두뇌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력도 엄청 좋고, 관찰력 또한 탁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서울고검장이 된 권철현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이다.
지현이 현수의 뒤를 따라 들어서던 연희와 이리냐를 본 시간은 불과 몇 초이다. 들어서면서 쇼핑한 물건들을 하녀들에게 건네느라 곧바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뒤에 있던 둘과 경호팀의 면면까지 살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연희는 비서이기에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쳤다.
하지만 이리냐는 아니다. 대한약품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일 뿐이라면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의아하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이었기에 애써 잊었다.
2층 현수의 방으로 와서 알리사와 두 명의 시녀가 음식을 내올 때에도 흑인치고는 상당히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눈도 크고, 몸매도 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