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6
이에 수질 관리인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난다.
한편, 줄 서 있던 러시아 청춘남녀들은 눈 찢어진 동양인 청년에게 메트로의 사장과 수질 관리인이 보여주는 극상의 예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경호 차량에서 내린 덩치들이 절대 무례하지 말 것을 경고한 때문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거물이라 생각한 러시아 청춘남녀들은 잠자코 현수와 이리냐가 안쪽으로 들 때까지 찍소리 않고 바라만 보았다. 이곳은 아직 공권력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쿵, 쾅! 쿵쾅! 쿵쿵! 쾅쾅! 쿵쾅!
클럽 안에 발을 들여놓자 신나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절로 어깨가 들먹일 분위기이다.
“자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세르게이가 안내한 곳은 방음이 제대로 되는 룸이다.
“이렇게 저희 업소를 방문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모든 비용은 저희 업소가 드리는 작은 성의이니 부담 없이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하하, 네에. 고맙습니다. 한데 성함이…….”
“아! 세르게이 블라디미르입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부디 즐겁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세르게이는 현수의 곁에 찰싹 붙어 있는 이리냐가 원망스러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 이곳을 찾은 미녀들을 안겨줌으로써 확실한 점수를 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대에 고맙습니다. 미스터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보스께 고맙다는 말 꼭 하겠습니다.”
“하하! 네에,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지요.”
세르게이는 본인이 레드 마피아의 일원임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중기업 대표쯤 됨에도 바싹 자세를 낮춘다. 그래야 할 대상이라 여긴 것이다.
잠시 후, 룸에는 현수와 이리냐만 남았다. 물론 술과 음식들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세팅되어 있다.
“호호! 역시 메트로예요.”
“그치? 좋네.”
“그런 의미에서 건배해요.”
“좋아!”
이리냐와 현수는 클럽 메트로에서 두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특급 경호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정부와 마피아 양쪽에서 신경 썼으니 불상사는 없었다.
물론 중간에 괜한 시비를 걸려던 녀석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술 취한 녀석 몇이 눈 찢어진 황인종이 러시아 미녀를 끼고 있다면서 괜한 객기를 부렸다.
듣기에 거북한 욕설을 뱉던 그들은 조용한 곳으로 끌려가서 크렘린궁에서 온 양복 입은 스페츠나츠에게 작살나거나, 레드 마피아의 혹독한 맛을 톡톡하게 보았다.
뿐만 아니라 메트로의 고객에서 제외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메드베데프의 귀빈에게 까분 죄이고, 알렉세이 이바노비치의 손님에게 무례를 저지른 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와 이리냐는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이날 밤 현수와 이리냐는 리츠 칼튼 모스크바 호텔에 투숙했다. 전과 다른 점은 다른 방에 투숙했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이리냐의 육탄 공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그럴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
노보로시스크의 지배자 지르코프가 이리냐의 모친인 안나 게라시모바 체홉를 데리고 와 있었던 것이다.
안나는 삶의 무게에 눌려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어 다른 러시아 여자들처럼 뚱뚱하지 않고 북어처럼 바싹 말랐다.
안나와 이리냐는 상봉의 기쁨을 눈물로 표현했다.
모녀지간이지만 안나에겐 전화가 없고, 이리냐에겐 교통비가 없어 오랫동안 연락조차 못 하고 지냈다고 한다.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눈물이 진정되고, 그간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이다.
이때까지 지르코프와 다른 방에 있던 현수는 안나를 보자마자 한국식으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곤 귀한 딸을 인생의 반려로 맞이하려 하니 허락해 달라는 말을 했다.
이때 현수가 쓴 말은 체첸어4)이다.
이 말에 안나는 눈물을 쏟으면서도 기쁘게 웃었다. 현수가 평소에 사윗감으로 생각하던 체첸 사람이 아님에도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간 이리냐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때문이다.
현수가 하룻밤 인연으로 끝냈다면 이리냐는 몸 파는 여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돈 없고 힘없는 여자들이 그러하듯 홍등가로 흘러갔을 확률이 매우 높다.
본인은 원하지 않지만 그녀의 미모를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나쁜 놈들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리냐는 현수 덕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원이었던 모델도 되었다. 그리고 깊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현수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안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현수에게 여자 둘이 더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멈칫거렸다.
사랑하는 딸이 외국인의 첩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하지만 지현과 연희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음 날 아침, 현수는 다시금 대통령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미처 논의하지 못한 세세한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자신들이 받은 도움에 대한 대가로 전향적인 양보를 해주었다. 덕분에 회담은 금방 끝났고, 현수는 많은 부분에서 이권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아직은 공표하지 않기로 했다. 정치적인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한다.
현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서로 도울 것이 많기에 배반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하하! 어서 오시게.”
“네에, 반갑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죠?”
“그럼, 그럼! 오오, 이리냐! 많이 예뻐졌군.”
현수를 따라 들어온 이리냐를 본 이바노비치의 눈이 커진다.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여성인 연희로부터 피부 관리는 어떻게 하고, 화장은 어떻게 하며, 옷은 어떻게 입는지 배운 결과이다.
“네, 보스가 잘 돌봐주신 덕분이에요.”
이리냐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만한 딸이 있어 그런지 이바노비치는 만면에 웃음을 짓는다.
“자아, 자리에 앉지.”
“네, 보스!”
둘이 나란히 앉자 이바노비치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리냐에게 시선을 준다.
“이리냐! 지르코프가 후견인이라고?”
“네, 보스 덕분에 그분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이리냐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바노비치가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연다.
“듣자하니 홀어머니만 남았다고?”
“네, 아빠와 오빠는 전쟁 통에 돌아가셨거든요.”
“흐음, 그거 유감이군.”
“고맙습니다.”
이리냐가 또 고개 숙여 사의를 표했다. 그런 이리냐는 잠시 바라보던 이바노비치가 입을 연다.
“이리냐, 내 딸이 되어주겠느냐?”
“네……? 방금 뭐라고…….”
이리냐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내 양딸이 되어달라고 했다. 곧 미스트르 킴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식장에 같이 들어갈 아빠가 없지 않느냐?”
“그, 그건……!”
“내 수양딸이 되거라. 아빠가 되어 널 돌봐주마.”
“……!”
이리냐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할 때 현수가 입을 연다.
“이리냐! 축하해. 멋진 아빠가 생겼음을……!”
“네……?”
“보스께서 이리냐의 아빠가 되어주신다고 하잖아.”
“……!”
“좋은 아빠가 되어주마. 이리냐.”
“……!”
이리냐는 잠시 혼란을 느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순간, 현수는 이리냐가 고개를 끄덕이길 바랐다.
이바노비치에게 있어 이리냐는 친딸보다 몇 살 어린 아름다운 러시아 처녀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거래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게다가 장차 영향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이리냐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 질수록 이바노비치는 안전한 거래, 더 많은 이득, 흔쾌한 협조 등을 기대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늘 신경 써야 하는 러시아 정부와의 관계 개선도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수양딸을 언급한 것이다.
똑똑해진 현수는 이런 속내를 모두 감지했다.
현수로서도 이리냐가 이바노비치의 수양딸이 되는 게 결코 손해 볼 일 아니다.
첫째, 러시아 내에서 벌이는 사업의 안전이 보장된다.
절대 권력자인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이미 반 이상 넘어왔다. 여기에 밤을 지배하는 레드 마피아마저 가세한다면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언터처블이 될 수 있다.
둘째, 이실리프 무역상사가 보다 든든한 반석 위에 앉을 수 있다. 드모비치 상사에 더 많이 수출할 수 있고, 필요한 때엔 무엇이든 수입이 가능하다.
레드 마피아가 구하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셋째, 아직 아공간에 많이 남아 있는 황금을 무리없이 처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현수의 자금 동원력과 직결된다.
지금껏 많은 황금이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꺼내서 쓰지 못했다. 출처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걸 러시아에서 처분하고, 그 돈이 투자금 명목으로 한국으로 흘러들어 간다면 마음껏 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된다.
“어떠냐? 시간을 좀 주랴?”
“아니에요. 아빠!”
이리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 없이 자라는 동안 늘 든든한 그늘막이 될 존재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다 현수를 만났다.
자상하고, 배려심 깊으며, 순수하고, 착하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부자이며, 지구에 단 하나뿐인 마법사이다.
언제든지 자신을 지켜줄 능력이 있는 남자이다. 그렇기에 정신없이 빨려들어 갔다. 하지만 2% 부족한 점이 있었다.
사랑해 주는 남자로서는 100점짜리이지만 정신적 지주가 될 나이 지긋한 존재는 결코 될 수 없다.
이런 차에 이바노비치가 먼저 아빠가 되겠다고 한다. 물론 엄마와 재혼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바노비치는 레드 마피아의 보스이다. 누군가에겐 냉혹한 철퇴를 가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리냐에겐 아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중했고, 배려심 깊었으며, 자상했다.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하하! 이거 기쁘구나. 내가 오늘 아주 예쁜 딸 하나를 얻었어. 안 그런가, 이고르?”
“감축드립니다. 보스! 말씀대로 아주 예쁜 따님입니다.”
늘 이바노비치의 뒤쪽에 서 있던 이고르가 험한 인상을 풀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 뭔가 언밸런스한 느낌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하! 그렇지? 이고르! 조직에 내게 새 딸이 생겼음을 알려. 그리고 경호팀 구성하고.”
“네, 보스!”
이고르가 밖으로 나가자 이바노비치가 환히 웃는다.
“이리냐! 내 딸!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
“네, 아빠!”
“하하! 하하하!”
“축하드립니다. 장인어른!”
“으응? 아! 아하하하! 하하하하! 그래, 그래! 하하하!”
현수의 말에 이바노비치는 잠시 멈칫거렸다. 느닷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속뜻을 알아들었다.
이리냐가 딸이 되었으니 이제 곧 장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내게 오늘 예쁜 딸도 생기고, 사위도 생겼네. 오늘 같은 날 축배를 들지 않아선 안 되겠지?”
“찬성입니다. 맛있는 거 사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이봐, 집에 연락해서 음식 좀 차려놓으라고 해. 마누라와 애들에게도 오늘은 일찍 들어오라고 하고.”
“네, 보스!”
이바노비치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령을 전하러 밖으로 향한다. 셋만 남게 되자 이바노비치가 키폰의 버튼을 누른다.
삐리리, 삐릴리리, 삐리리!
백조의 호수의 선율이 잠시 울린다. 그리곤 웬 여인의 음성이 들린다.
“네, 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