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
“이리냐를 내보낼 테니 백화점에 데려가서 멋지게 꾸며줘. 오늘부터 내 딸이니까 알아서 잘해.”
“네, 보스!”
수화기를 내려놓고 이리냐를 바라본다.
“이제 곧 굼 백화점으로 가게 될 거야. 가거든 가장 멋진 것을 골라. 비용은 신경 쓰지 말고. 알았지?”
“네, 아빠! 고마워요.”
이리냐는 영리하다. 그렇기에 이바노비치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래줘야 할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수와 단둘이 할 말이 있어 내보낸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겸양 부리지 않고 냉큼 일어섰다.
“다녀올게요.”
“그래! 변신의 끝을 보여줘.”
잠시 후, 현수와 이바노비치 이렇게 둘만 남게 되었다.
“자네와 이런 인연이 되다니……. 앞으로 잘해보세.”
“네, 장인어른!”
현수는 부러 환한 웃음을 지었다. 법적 구속력 없는 가족이 되었지만 친해서 손해 볼 일 아니기 때문이다.
“지르코프에게서 보고받았네. 대한약품에서 발매한 쉐리엔의 유럽 판매권을 주어 고맙네.”
“별말씀 다 하십니다. 어차피 유럽 판매망이 없어 새로 구축하려면 많은 돈이 들 일이었습니다. 장인께서 맡아주신다니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현수의 말은 진심이다. 대한약품이 쉐리엔 등을 유럽에 판매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직접 유통망을 구축하는 것과 판매 대행을 지정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는 이익은 보존되지만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할 일이다. 직원도 뽑아야 하고, 관리 감독도 해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초기 투자는 적지만 이익이 반분된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다. 내부적으로는 두 번째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한약품은 아직 유럽 각국에 지사를 설치할 역량이 없는 회사이다.
프랑스에서의 유통은 세계 4위이자 유럽 1위 제약사인 사노피 아벤티스에게 맡길 생각을 했다.
영국은 글락소 스미스 클라인에게 맡기고, 스위스에서의 판매는 로슈에 일임한다.
미국은 얀센 또는 화이자, 독일은 바이엘 또는 베링거 잉겔하임 중 하나를 고를 것이다.
네덜란드는 베드나바이오텍, 스웨덴은 아스트라 제네카와 페링이라는 다국적 제약사의 유통망에 맡기려 했다.
그런데 드모비치 상사에게 유럽 판매를 일임하면 이 모든 번거로운 일을 덜 수 있다.
게다가 3년 후엔 판매망을 넘겨준다고 한다. 물론 합당한 비용은 지급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한약품은 두 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첫째는 초기투자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3년 후 판매망을 넘겨받을 때 이미 탄탄하게 구축된 상태라는 것이다.
여의치 않으면 드모비치에 더 맡겨도 싫지 않다고 할 것이다. 쉐리엔의 판매망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참, 맥주를 구해달라고?”
“네, 체코산 부드바이저 200만 병이 필요합니다.”
“허어, 그 많은 걸 어디에 쓰려고……? 참,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군. 알겠네. 최선을 다해서 구해주지. 그리고 전투화 6만 족도 필요하다고?”
“네, 이실리프 농산에서 일할 인부들에게 지급할 겁니다.”
“그런데 내피는 왜?”
“혹시라도 발을 다칠까 싶어 그럽니다.”
이바노비치는 뭔가 석연치 않았지만 캐묻지 않았다.
“알겠네, 사이즈만 알려주면 즉시 구해주지.”
“참, 제가 미스터 지르코프와 사사로이 거래를 하려 합니다.”
“사사로운 거래?”
“네. 드모비치 상사를 거치지 않는 거래 말입니다.”
이바노비치는 정색을 하며 눈빛을 빛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알기로 레드 마피아엔 여러 보스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예카테린부르크, 니즈니노브고로드, 카잔 등에 있는 분들까지요.”
“흐음!”
이바노비치는 경쟁자들에 대한 언급에 심사가 불편한지 슬쩍 이맛살을 찌푸린다.
“노보로시스크는 러시아 도시 순위 3위에 랭크되었음에도 2강 3약에 끼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건 지르코프가 내 아랫사람이라 그런 것이네.”
“아! 그렇군요.”
“아무튼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길 하려던 것이냐는 표정이다.
4장 첩을 위해 준비한 만찬
“저는 보스를 더 강력하게 뒷받침해 줄 세력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기왕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계신 그분이 경각심을 가질 만큼 큰 세력이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알기로 지르코프 보스는 보스께 절대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녀석은 의리가 있지. 배운 것도 많고!”
“네, 그래서 지르코프 보스를 조금 밀어주고 싶습니다. 이리냐의 후견인이기도 하니까요.”
“……!”
이바노비치는 현수의 의중을 짐작해 보려는 듯 실눈을 뜬다.
“보스는 현재…….”
현수의 차근차근한 설명이 이어졌다. 지르코프가 커야 장인어른이 더 큰 인물이 된다는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바노비치는 그럴 수밖에 없다.
한없는 호감을 갖게 만드는 어펜시프 참 마법에 매혹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보스 자리를 지르코프에게 양보하라는 말을 해도 들어줄 정도이다.
그렇기에 현수의 말이 끝날 즈음엔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표정을 짓기까지 하였다.
결국 얼마나 많은 양이 팔릴지 모를 항온 재킷과 바지의 러시아 판매권을 지르코프에게 돌아갔다. 이것은 드모비치 상사를 통하지 않고 가칭 지르코프 상사로 수출될 것이다.
그리고 대한약품에서 발매할 NOPA와 홍익인간은 지르코프와 이바노비치가 공동으로 설립할 의약품 유통망을 통해 러시아 전역에 판매하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이 밖에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들어갈 가스관 공사에 대한 이야기도 제법 오래 걸렸다. 공사비 자체도 엄청난 액수이지만 그에 투입될 인력 또한 무지막지하게 많기 때문이다.
회동이 끝난 것은 저녁 무렵이다. 이바노비치는 여전히 쇼핑 중인 이리냐에게 곧장 저택으로 오라는 전화를 넣었다.
“어서 와요.”
“내 마누라 베르세네바일세.”
“아! 반갑습니다. 김현수입니다.”
현수가 고개 숙여 인사한 인물은 곱게 차려입은 50대 초반 귀부인이다. 모스크바의 밤을 지배하는 인물이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라면 이 여인은 그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 그이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훨씬 젊은 분이시군요.”
“하하, 네에. 제가 조금 어려 보이긴 합니다. 저어, 이건 제 선물입니다. 급히 준비하느라 약소합니다.”
“어머! 고마워요.”
현수가 내민 작은 상자를 받은 여인은 50대이지만 40대 초반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르세네바 마리아 이바노비치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환히 미소 짓는데 희고 고른 치열이 보기에 좋았다.
한국과 달리 외국인들은 선물을 받으면 곧바로 풀어본다더니 베르세네바 역시 그러하다.
“어머! 이건……,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마음에 드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현수가 준 반지를 껴본 베르세네바는 계속해서 그것을 들여다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이건 빌모아 일족을 방문했을 때 족장이 기념으로 준 것이다. 물론 드워프의 세공 솜씨이니 품질은 최상이다.
“안으로 들어가요. 음식 식겠어요.”
“그러지. 자, 가세.”
“네!”
이바노비치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주방장인 듯한 사내와 그의 조수들이 일제히 허리를 꺾는다.
대저택답게 열 명이 넘는다.
“흐음, 오늘 메뉴는 마음에 드는군.”
구운 오리, 양갈비 구이, 꽃등심 스테이크 등을 본 이바노비치가 군침을 흘린다. 채식보다는 육식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여보! 손님도 있는데…….”
베르세네바가 뭐라 타박하려 하자 이바노비치가 입을 연다.
“뭐, 어때. 이제 우리 사위인데.”
“네……? 사위라뇨?”
딸들은 이미 시집가서 잘살고 있기에 베르세네바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오늘 가족이 새로 생긴다고 했잖아.”
“네에……! 그럼 두 아이 중 누구의 남편이 되는 거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현수를 바라보는 베르세네바이다.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 두 딸 가운데 누구를 이혼시킨 뒤 이 동양인에게 주려 하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이바노비치가 전화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 새로운 식구가 생겨 기분이 좋다면서 음식 장만을 하라고 했다. 하여 누가 새로운 식구냐고 반문했다.
이에 이바노비치는 아주 예쁜 아가씨라고 대답했다. 대놓고 첩을 얻겠다는 통보로 오해할 만한 말이다.
하여 눈물을 흘렸다. 늙어가는 것만으로도 서글픈데 남편으로부터 새 여자를 들이겠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환영 만찬을 준비하라는 통보도 받았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첩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면서 기분이 좋겠는가! 하지만 남편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베르세네바는 너무 여린 성품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조리사들을 총동원하여 할 수 있는 요리는 다 만들도록 하였다. 일종의 심통을 부린 것이다.
그렇기에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하게 음식이 차려져 있다.
아무튼 한참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또 전화가 왔다.
드모비치 상사와 중요한 교역을 하는 이실리프 무역상사의 김현수 사장도 동행한다는 말을 깜박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좋은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한 술의 안줏감이 될 육류가 많은 것이다.
아무튼 베르세네바는 자리에 앉아서도 남편을 바라본다.
현수를 어떤 딸과 맺어줄 것이며, 새로 들인 여자는 왜 안 데리고 왔느냐는 뜻이다.
같이 오래 살아서인지 이바노비치는 금방 그 뜻을 이해했다.
“아! 이리냐는 곧 올 거야. 굼 백화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조금 밀린다고 했거든.”
“굼이요?”
러시아 국영 백화점인 굼엔 온갖 명품 판매장들이 즐비하다. 이리냐가 그곳에서 출발했다 함은 쇼핑을 했음을 의미한다.
베르세네바는 레드 마피아 보스의 아내이지만 검소한 편이다. 그렇기에 굼에는 아주 가끔 갈 뿐이다. 세계의 일류 브랜드들은 거의 모두 있지만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일 년에 겨우 몇 번 가지만 그것도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두 딸의 시부모가 되는 사돈들의 생일선물을 챙기기 위함이다. 남편의 위치가 있기에 약소한 선물은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남편이 새로 얻은 젊고 예쁜 아가씨는 굼에서 온갖 명품으로 도배되는 모양이다. 이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러 모로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나저나 미스트르 킴이 사위라고 했는데 누구의 남편이 되는 거죠? 올가예요? 나타샤예요?”
“으잉……? 뭔 소리야?”
잘게 찢어놓은 오리구이에 포크를 갖다 대려던 이바노비치가 눈살을 찌푸린다.
“사위라면서요? 우리한테 딸은 둘밖에 없잖아요.”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이바노비치는 웃겨 죽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호탕하게 웃는다.
“이이가……? 음식 앞에 두고 그렇게 웃으면 어떻게 해요?”
베르세네바는 사위가 될 현수가 싫은 표정을 지을까 싶어 노심초사하는 얼굴이다.
“하하! 하하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이바노비치는 웃음만 터뜨리고 있다.
“아이고, 그만 웃어요. 그리고 누굴 이혼시킬 거냐고 물었잖아요. 올가예요? 나타샤예요?”
“하하! 하하하!”
“아, 왜 자꾸 웃어요? 말해봐요. 어떤 아이를 이혼시킬 거냐고요. 올가도 나타샤도 잘살고 있는데.”
엄마로서 두 딸 중 하나의 행복을 깨는 것이 싫다는 표정이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