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09화 (409/1,307)

# 409

“……!”

현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은 들지만 이번 기회에 지현을 정리할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왜 대답을 안 해? 그럴 거야, 안 그럴 거야? 이 어민, 새아가가 마음에 쏙 든다. 그러니 안 그러면 너 안 본다.”

“끄응……!”

현수가 나직한 침음을 낼 때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진다.

“너 없는 새에 고검장님과 네 아버지가 만나셨다. 만나서 기분 좋게 술도 한잔하고 들어오셨어. 그리고 해가 바뀌기 전에 식을 올리자고 말씀하셔서 날짜도 잡았다.”

“헐……!”

현수는 본인도 모르는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헐은 무슨……. 몇 안 되지만 친척과 친지, 그리고 성당 식구들에게도 모두 이야기해 놨어. 주임 신부님이 혼배 미사 집전을 해주기로 하셨고……. 내 얘기 듣고 있니?”

“네, 어머니.”

너무 어이가 없는지라 뭐라 할 말이 없어 한 대꾸이다.

“네 결혼식은 올해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이다. 평생 결혼기념일 잊어먹지 말라고 네 아버지가 그날을 고르셨다. 사돈어른도 좋다고 하셨고.”

“끄응……!”

현수는 또 나직한 침음을 냈다. 성질 급한 어머니는 말씀대로 동네방네 있는 소문 없는 소문을 다 냈을 것이다.

어쩌면 별 볼일 없던 아들이 수직상승하여 천지건설 전무이사가 되었을 때보다도 더 많은 통화를 하셨을 것이다.

서울고검장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자, 5급 사무관이며, 절세미녀인 권지현이 너무도 마음에 든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지현의 외조부인 안준환 옹은 현수의 할아버지께서 독립군 전령 노릇을 할 때 독립군으로 활약하셨던 분이다.

권철현 서울고검장과 현수의 부친은 독립군 집안 간의 결합이라며 크게 기꺼워했다.

“아무튼 빨리 귀국해서 새아가 마음 돌리도록 해라.”

“……!”

“아, 왜 대답이 없어? 그렇게 할 거지?”

“네. 어머니.”

현수는 짧은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대략 난감이라는 인터넷 용어가 문득 떠오른다.

어머니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며느리로 권지현이 이미 결정되었다. 강연희와 이리냐에 대해선 묻지도 않았다.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쪽에선 이미 둘과 평생을 같이하기로 결정지었다.

하여 연희와 이리냐의 모친 모두를 불러들였다.

각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니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서 가족 간의 사랑을 나누라는 뜻이다. 물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한국과 러시아로 되돌아갈 수 있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휴우……! 정말 골치가 아프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전화기가 또 몸살을 앓는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번호를 보니 태백조선소 강전호 과장이다.

“흐음, 이 시간에 웬일이지? 여보세요.”

“아! 김 전무님! 제가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각에 전화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신지 몰라서…….”

“그건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러죠. 뭐 급한 용무라도 있습니까?”

“네. 전무님의 도움이 또 한 번 절실하게 필요해서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전화 드렸습니다.”

“에구, 염치없다니요?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습니까? 친구 사이엔 그런 말 하는 거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제 도움이 왜 필요한 거죠?”

“MSC 사와의 조선 계약이 너무 난항을 겪는지라……. 아폰테 사장님의 마음을 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폰테 사장님의 마음을 돌려요?”

“네, 이번에 발주할 물량을 전부 오시마조선소에 주려는 것 같습니다.”

“아! 오시마조선소요.”

“네, 그쪽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내놓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마음을 굳히셨는지 저희와의 접견을 허락지 않고 계십니다.”

“으음! 어떤 조건인지는 모르는 거구요?”

“네, 백방으로 알아보려 했지만 아직 모릅니다.”

“한국에 아직 세바스티앙 오머런 부회장님 계신가요?”

있다면 전화를 걸어 알아보려는 의도이다.

“아뇨, 아쉽게도 그제 출국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회장님이 출국하신 뒤에 마음을 굳힌 것이라 통화를 하셔도 알아낼 게 없을 겁니다.”

“흐음, 그래요?”

“네, 바쁘신 줄 알지만 시간 내실 수 있으면 잠시 귀국해 주십시오. 모든 비용은 저희 태백조선소에서 부담할 테니 아폰테 사장님과 한번 만나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귀국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들어가야 하죠?”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언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지 알 수 없어서 그럽니다.”

“좋아요. 최대한 빨리 가죠. 그 전에 배에 대한 기본 상식이 부족해서 그러니 이메일로 배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십시오.”

“네……? 아, 네에, 알겠습니다.”

현수가 출국한 이후 리앙뤼지 아폰테 사장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전무이사를 만났다.

이후에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 현대중공업 울산조선, STX 진해조선, 현대 삼호중공업, 현대 미포조선 사람들과 접촉했다.

세계 10대 조선소 가운데 최상위 1위부터 6위까지 모두 만난 것이다. 그리곤 현대중공업과 먼저 협상을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이 2012년 4월 ‘조선 IT 융합 혁신센터’ 개소식을 갖고 조선 IT 분야의 신기술 개발에 나선 때문이다.

선박의 운항 정보를 모니터링·제어하던 기존 스마트십 1.0의 수준을 넘어 선박이 연비·배출 가스 등을 고려해 자동으로 최적의 운항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업그레이드된 ‘스마트십 2.0’을 구현할 예정이다.

이 기술이 적용되면 선박의 경제적 운항 관리가 가능해 세계 해운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은 이미 발주 받은 물량을 소화해 내기에도 어려움이 많아 MSC 사가 요구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수주를 난감해했다.

비단 현대중공업뿐만이 아니다. 앞에 나열된 나머지 다섯 회사도 넘쳐나는 일감 때문에 바쁘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는 MSC 사가 요구하는 납기 때문이다.

아폰테 사장과 계약을 체결하면 이미 진행 중인 것들 가운데 일부를 스톱시켜 놓고 먼저 제작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새로운 수주를 미련없이 포기한 것이다.

강자들 틈에서 기회만 엿보던 태백조선소가 아폰테 사장과 접촉을 시도했다. 이 일의 진두지휘는 권철 전무이고, 실무자는 강전호 과장이다.

같은 시기에 세계 13위인 오시마조선의 나카무라 쇼헤이 전무도 아폰테 사장과 연을 만들었다.

5장 아이고! 미치겠네

세계 14위인 태백조선소는 현대중공업이나 STX조선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회사이다.

그리고 최첨단 신기술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반면 오시마조선소는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다.

나카무라 쇼헤이 전무는 MSC 사에서 요구하는 첨단기술이 접목된 컨테이너선을 원하는 시기보다도 앞당겨 인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오시마조선소는 2014년 인도 예정인 초대형 컨테이너선 10척을 건조하던 중이다. 선주인 노르웨이 선사 Axel Eitzen 사가 발주한 것이다.

최근 이 회사는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고, 조선 계약은 파기되었다. 이것을 개조하여 인도할 생각인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오시마조선소는 태백조선소에서 제안한 가격보다도 싼값에 인도하겠다고 했다.

이게 가능한 것은 Axel Eitzen 사와 계약을 할 때 선수금으로 30%를 지불받았기 때문이다.

MSC 사로서는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실태를 파악한 태백조선소는 부랴부랴 견적 가격 조정에 나섰다. 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에 기술 제휴 요청도 했다.

가만히 있다간 모두 빼앗긴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시마조선소에서 제시한 가격엔 어렵다. 하여 포기하자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익은 거의 없는데 도크만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권철 전무가 사장에게 MSC 사의 컨테이너선 건조 수주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보고를 할 정도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의지의 사나이 강전호 과장이다.

전호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반전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렇지만 가능성 희박한 계약을 되돌릴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베아트리체 때문이다. 세바스티앙 오머런을 따라 프랑스로 되돌아간 그녀는 출국하기 직전 하나의 약속을 했다.

이번 계약을 성사시키면 결혼해 주겠다는 것이다.

한국에 머무는 사이에 둘은 틈날 때마다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는 동안 전호에 대한 호감이 상승했다.

현수가 마법을 인챈트해 준 반지의 공이 크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결혼을 결심하지 않았다.

문화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외국인이라는 이유와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 전호와의 결혼을 100% 배제한 것은 아니다. 가능성이 있지만 10% 정도로 여겼다.

그럼에도 이런 약속을 한 이유는 운명을 믿기 때문이다.

전호가 자신의 짝으로 예정된 운명적인 사랑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MSC 사와의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전호로서는 기필코 이 계약을 성사시켜야 할 이유가 되었다. 하여 이 궁리 저 궁리를 했다.

견적실에 상주하면서 어찌하면 납품 단가를 줄일 수 있을까를 알아보았고, 개발실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되돌릴 신기술은 없는지를 문의했다.

하지만 방법은 없다. 오시마보다 더한 기술은 없으며, 가격 또한 더 이상 낮출 수 없었다.

몹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강전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어젯밤, 전호는 우정훈과 박창민, 이렇게 셋이 뭉쳐서 술을 마셨다. 이 자리는 밤새 이어졌다.

우정훈 과장은 승진하면서 옮겨간 부서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했다. 담당 부서 부장이 술고래인데 날마다 술 상대를 해주느라 간이 녹는다는 엄살을 피웠다.

박창민 과장도 영전되어 간 본사 근무가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이다. 날마다 밤샘 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이러다 지쳐서 쓰러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둘은 잘 먹고, 잘 논다. 모두 엄살인 것이다.

헤어질 때쯤 대체 왜 그렇게 죽상이냐는 물음을 받았다. 이에 전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내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계약이 성사되면 태백조선소는 세계 10위 이내로 도약한다. 그리고 연말 특별 보너스가 기대된다.

반면, 실패할 경우 침체한 분위기 때문에 한동안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비굴한 상황이 많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현수 이야기가 나왔다.

걸그룹 다이안의 리더 서연과의 하룻밤을 성사시키지 못해 물 건너갔던 계약을 말 몇 마디로 되돌린 기적의 사나이이다.

전호는 현수가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과 시차가 8시간이다.

서울 시각으로 아침 6시 30분이면 킨샤사는 밤 10시 30분이다. 서울 사람으로 치면 늦은 시각이 아니지만 이쪽 사정은 모른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전화를 건 것이다.

아무튼 통화를 마친 전호는 곧바로 현재까지의 상황을 이메일로 보냈다. 아울러 선박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사우나로 향했다. 회사로 출근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처럼의 사색이 끝난 현수는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대신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그리곤 이메일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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