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
“우리 영지에서 나는 질 좋은 철광석을 탐내서다. 자, 이제 의문이 풀렸으면 내 물음에 대한 답을 해라. 너는 어제 어디로 사라졌다가 왔느냐?”
상당히 고압적이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졌다.
현수는 텔레포트 마법으로 빌모아 일족이 사는 라수스 협곡 내부에 갔다 왔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한낱 C급 용병이 텔레포트 같은 고위마법을 썼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영지 곳곳을 돌아보았습니다.”
“밤이 새도록 말이지?”
“……! 그렇습니다.”
“좋아, 왜 그랬지?”
혹시 적의 첩자가 아니냐는 눈빛으로 바뀐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았을 뿐입니다. 뭐 잘못되었습니까?”
현수는 귀찮은 마음이 들어 죠반니 남작이 돌아가면 바로 이 영지를 떠날 생각을 품었다.
한편, 죠반니 남작은 현수가 첩자는 아닐 것이란 생각을 했다. 너무 태연했기 때문이다.
“으음! 좋아, 믿어주지. 그럼 어제 사용한 마법은 뭐지?”
“흐음, 어제 사용한 마법이라면 클린과 워싱, 그리고 데시케이션입니다. 옷이 단벌이라 마법으로 세탁했습니다.”
“……!”
태산명동서일필이라는 말이 있다.
태산이 떠나갈 듯이 요동하게 하더니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었다는 뜻으로, 예고만 떠들썩하고 실제의 결과는 보잘것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어젯밤, 여행자를 위한 시냇물이란 이 여관에선 상당량의 마나 유동이 감지되었다.
하여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기사와 병사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그런데 겨우 세탁 마법을 썼다고 한다. 어찌 맥이 풀리지 않겠는가!
죠반니 남작은 공을 탐낸 마법사가 부풀려 보고했다는 생각을 품었다. 비일비재한 일이다.
하여 굳었던 인상을 조금 더 푼다.
“아무튼 용병지부에 들러 임무를 배당받도록! 만일 허락 없이 영지를 떠나면 그에 대한 보복은 다른 용병들에게 돌아가니 허튼짓할 생각 품지 마라. 알겠나?”
“보복이요?”
“그래, 용병 하나가 영지에서 사라지면 20명의 목을 벤다. 그러니 몰래 도망갈 생각은 품지 말도록! 가자.”
말을 마친 죠반니 남작이 몸을 돌려 나가자 기사와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게 대체 웬 소동이지?”
마법 한번 썼다고 난리법석이 벌어진 상황이다. 그렇기에 마저 영문을 말해달라는 표정을 짓는다.
“방금 나간 저 녀석 말대로야. 영지전이 선포되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말도 안 되는 벌칙을 만든 거지.”
“그러니까 누군가 영지전이 두려워 도망가면 남은 용병들에게 해코지를 하겠다는 거야?”
“정확해.”
“끄응!”
현수는 나지막한 침음을 냈다.
이 동네는 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지 이해되지 않은 때문이다.
“영지에선 영주가 왕이나 다름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할 거야? 여길 뜰 거야?”
“당연하지. 뜨긴 떠야지. 근데 우리가 가면 용병 40명이 목숨을 잃는다잖아.”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이 말은 라세안의 진심이다. 하긴 드래곤이 한낱 인간들의 목숨에 왜 연연해하겠는가! 하지만 현수는 아니다. 자신 때문에 남들이 피해를 당한다니 떠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참, 영지전은 언제쯤 일어날 거 같은데?”
“아마도 내일일 거야. 저쪽에 대규모 마나 유동 현상이 잦은 걸 보니.”
라세안이 가리킨 곳은 영지의 동쪽이다.
“흐음, 영지전이 벌어지면 하루면 결판이 나지?”
“지금껏 내 경험에 의하면, 그래, 하루면 끝나지.”
“그럼 하루만 더 머물자.”
“뭐, 자네가 원하면 그래야지. 우린 친구니까.”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이젠 현수와의 동행이 유희가 되었다.
이번 유희는 아르센 대륙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현수의 고향이 있는 어스 대륙이라고는 곳까지 가볼 수도 있다.
기억을 더듬어본 라세안은 지금껏 아르센이 아닌 다른 대륙을 경험한 드래곤이 없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렇기에 가급적이면 현수의 의견을 존중해 주려 하는 것이다.
“고마워. 날 친구로 생각해 줘서.”
현수는 라세안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런데 이 웃음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어떻게든 라세안으로 하여금 본인의 정체를 실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이다.
둘째는 드래곤으로서 맹세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복종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럴 리 없기 때문이다.
현수가 바라는 것은 불가침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을 향한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언약이 나오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은 본인의 뜻대로 움직여 주길 바라는 것이다.
아무튼 라세안은 싱긋 웃는 현수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마음이 동한 때문이다.
“그나저나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대?”
“대강 살펴보니 저쪽 영지군이 올 길목 좌우에 매복을 하고 있더군. 일단 기습을 하고 난 후에 수성전을 펼칠 모양이네.”
“일단 전략 자체는 괜찮군. 근데 병사들 수효는?”
“저쪽은 1만 5천, 이쪽은 7천이네. 용병 포함해서.”
“저쪽도 용병 포함한 인원인가?”
“이쪽에서 보낸 세작6)의 보고에 의하면 그러하네.”
금방금방 대답하는 것과 표정을 보아하니 라세안이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 듯싶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 수성전에선 보통 세 배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어야 승세가 있다고 보네.”
“그래! 그게 상식이긴 하지.”
여러 번 유희를 한 경험이 있기에 라세안은 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 말대로라면 저쪽의 병력은 이쪽의 두 배를 조금 넘네. 뭔가 야로7)가 있지 않다면 영지전을 걸지 않는 게 정석이지.”
“그래, 그래서 이곳 영주가 뭔가 더 알아오라고 세작들을 급파했네.”
“흐음, 내일 영지전이 벌어지는데 아직 정보를 모으지 못했다면 문제군. 틀림없이 뭔가 더 있을 텐데…….”
현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지구와 비교했을 때 중세 유럽과 유사한 면이 많은 곳이다. 왕족과 귀족, 그리고 평민과 노예 같은 신분제도가 그 중 하나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모든 장정이 동원되어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이는 것도 같다.
문제는 매우 잔인하다는 것이다.
칼과 화살에 찔려 죽는 건 양반이다. 목이 베어지거나 창자를 쏟아내는 경우도 많고, 전투도끼(Battle Axe) 같은 것에 격중되어 두개골이 깨져 뇌수가 튀어나오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영지전에서 승리할 경우 승자가 상대 영지의 모든 것을 갖기 때문이다.
미처 도주하지 못하여 생포된 영주의 가족은 모두 참수당하거나 노예로 전락되어 타국에 팔려 나갈 수도 있다.
물론 왕국법은 그러하지 않다.
귀족은 예우를 받아야 하기에 귀족과 그 가족은 패자가 되어도 목숨을 빼앗지 않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기에 다른 귀족의 후원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몰락귀족이 되어 쓸쓸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무튼 영지전 참관인에게 뇌물을 쓰면 왕국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패자를 죽이고 그의 아내나 딸을 성노로 쓰기도 한다.
영지전에서 승리한 자는 모든 것을 취하되 전투에 투입된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의 절반을 왕궁에 헌납해야 한다.
이판테 왕국의 역사를 보면 본시 후작가였던 이판테 가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실을 전복시켰다.
국왕의 폭압 정치, 그리고 만연된 부정부패와 평민들에 대한 탄압을 빌미로 권력을 가로챈 것이다.
그렇게 건국을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을 귀족으로 임명하고 영지를 나눠주다 보니 국왕 직속령이 없다시피 한 것이다.
권력은 부하와 백성의 충성심이 아니라 돈으로부터 나온다. 돈만 있으면 귀신 틀니도 살 수 있고, 처녀 고쟁이도 구할 수 있다. 역사책의 기록을 보면 아주 오래전엔 드래곤 하트도 돈 주고 샀다는 내용이 있다.
아무튼 건국 이후 이판테 왕국의 국왕은 귀족 간의 다툼을 조장했다. 물론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영지전이 가능하다.
자칫 국가 전체가 전쟁터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작과 백작이 싸워 자작이 이기면 승작시켜 주었다.
하여 더 높은 작위를 갈망하는 귀족들은 착실히 병력을 확충시켰다.
고위 귀족 역시 하극상을 당하지 않기 위한 힘을 길렀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국은 두 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하나는 계속된 전투로 정예화된 병사들이 양성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귀족의 수효가 줄어드는 반면 국왕의 재산은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힘을 키운 이판테 왕국은 이웃이었던 미리엄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곧 두 나라의 합병이 이루어졌다.
다음엔 미리엄 왕국 백성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미리엄의 첫 글자를 이판테 앞에 두어 미판테라는 괴상한 이름의 국가명이 탄생한 것이다.
6장 10써클 위력의 마법
이곳 케발로 영지의 영주 하렌 폰 케발로 자작은 모든 걸 걸고 영지전에 대비하고 있다.
용병으로 참전하게 되는 현수는 전투에서 패할 경우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감히 상대 진영에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괘씸죄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이자 8써클 마법사인 현수와 라세안이 있는 이상 케발로 영지가 패할 일은 없다.
상대가 어떤 준비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기관총 K―6 한 정만 꺼내도 결론은 난다.
상대의 기사단이 제아무리 강하고 많다 하더라도 검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궤멸당할 것이다.
유효 사거리 1,830m짜리 이것에 마법을 인챈트하면 3,000m 밖에서 사격할 수 있다. 텔레스코프 마법을 구현시키면 누가 누군지 얼굴을 식별할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투구와 갑옷에 구멍이 숭숭 뚫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현수와 라세안은 누구보다도 느긋한 시선이다. 상대가 어떤 것을 감추고 있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용병지부에 들러보자.”
“그래.”
둘은 여관을 나서 용병지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참, 영지전을 걸어온 상대는 누구래?”
“츠로쉐 영지의 영주 막심 에밀 드 츠로쉐 백작이래.”
“어떤 인물인지 평은 들어봤어?”
“원래는 남작이었는데 자작의 영지를 집어삼켜 자작이 되었다가 백작에게 영지전을 걸어 백작이 된 놈이지.”
“놈……?”
다소 과격한 표현이기에 반문한 것이다.
“그래, 욕심만 사나운 놈! 영지전으로 배를 불리는 귀족이라는 풍문도 있다는군.”
“겨우 남작이 자작을 치고, 곧이어 백작까지 공격했다고? 놈에게 배후라도 있지 않고야…….”
현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라세안이 끊은 까닭이다.
“놈의 장인이 미판테 왕궁 최고사령관 할만 공작이라네.”
“할만 공작?”
“그래, 미판테 왕국의 재상인 에드가 폴랑 폰 갈리아 공작이 문(文)이라면 무(武)에 해당하는 권력자이지.”
“가만 에드가 롤랑 폰 갈리아 공작이라면 전에 들어본 이름인데 누구였더라……? 아! 맞아.”
현수의 뇌리로 스친 이 이름은 테세린 바로 곁에 있는 유카리안 영지에서 들어본 바 있다.
영주인 데니스 백작은 카이로시아를 내놓으라 했을 때 제1 권력자인 갈리아 공작에게 보냈다는 말을 했었다.
미판테 왕국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는 두 공작 중 할만은 소드 마스터이고, 갈리아는 6써클 마법사이다.
둘 다 별로 좋은 인물은 아닌 듯하다.
“아무튼 막심이라는 놈은 자네 관점에서 보면 악질이라 할 수 있네. 지독한 이기주의자이기도 하고.”
“그래? 그렇담 골탕 좀 먹어야 하겠군.”
용병지부에 이르기까지 둘의 대화는 이어졌고, 현수는 라세안이 알아낸 사실 전부를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