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12화 (412/1,307)

# 412

* * *

“어서 오게. 등급은……?”

멋진 수염을 기른 장한이 펜을 들며 시선을 준다. 이곳 용병지부는 어제와 오늘 몸살을 앓는 중이다.

용병 총동원령이 내려진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말끝을 흐린다. 말하기도 귀찮은 모양이다.

“나는 C급, 이 친구는 B급입니다.”

“흐음, 둘이 같이 있어야 하겠지?”

“그렇습니다.”

대답은 라세안이 했다. 현수와 같이 있으면서 조금 더 탐색하려는 의도이다.

“좋아, 자네 둘은 성문 좌측에서 수비를 맡게.”

“……?”

“성문이 허술해서 충차 공격이 있을 시 깨질 우려가 있네.”

“……!”

성문이 뚫리면 그곳을 통해 적군들이 물밀 듯 쇄도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위험한 곳을 지정받은 것이다.

“라세안이라고 했지? 자네가 그곳 용병들을 지휘하게. C급 30명이 배치되었네. 아! 이 친구까지 합치면 31명이지.”

“흐음, 알겠소.”

라세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전투는 하루 안에 끝날 것이네. 자. B급은 1골드 50실버, C급은 1골드씩 주라 했으니 받게.”

용병지부장이 내미는 돈을 받은 둘은 피식 실소했다. 1골드는 한국 돈으로 대략 100만 원이다.

하루 치 일당치고는 엄청 세다. 하지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푼돈이 된다.

아무튼 주는 것이니 받아 챙겼다.

“자네 둘은 지금 즉시 성문으로 가게. 그곳에 가면 윌리엄이란 기사가 있을 것이네. 자세한 내용은 그에게 묻게.”

“알겠소.”

말을 마친 지부장이 어서 거라는 손짓을 했기에 둘은 밖으로 나섰다.

“가장 위험한 곳에 용병들을 배치하라고 시킨 건가?”

“글쎄? 가보면 알겠지.”

* * *

“자네 둘은 누군가?”

성문 안쪽에서 서성이던 기사의 물음에 현수가 대답했다.

“B급 용병 라세안과 C급 용병 하인스입니다.”

“오, 드디어 왔군. 근데 누가 라세안이지?”

“납니다.”

“좋아, 지금부터 이곳의 책임은 자네가 진다. C급 용병 30명과 병사 50명을 이곳에 남겨놓을 것이네. 성문이 깨지면 즉시 안에 기별을 보내야 하네.”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

“아니,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적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아야 하네.”

말을 하면서 기사 윌리엄은 손짓으로 성문 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또다시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니 성벽 위에 두 개의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다.

“저 속엔 기름이 들어 있네. 성문이 깨지면 즉시 기름을 부을 것이네. 자네들은 불을 지르게.”

“……!”

장작의 불길 때문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안에 연락을 하면 지원군이 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있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만일을 위한 조치이네.”

기사 윌리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말고삐를 잡아챈다. 말의 몸을 돌리려는 것이다.

“그럼 자네만 믿겠네. 잘 버텨주게.”

“알겠습니다.”

기사 윌리엄이 가고 난 이후 라세안은 자신을 둘러싼 용병과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의 임무는 간단하다. 만일 성문이 깨지고 적군이 난입하면 하나도 들어갈 수 없도록 반원 형태의 방어진을 치고 대결에 임하라.”

“알겠습니다.”

병사와 용병들이 대답한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불안함이 엿보인다. 언제 지은 성인지 알 수 없지만 성문이 매우 낡아 보였기 때문이다.

“불안한가? 그렇다면 땔감을 더 구해오라. 불길이 강하면 강할수록 지키기 쉬워진다.”

라세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와 용병들이 흩어진다. 오합지졸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본 라세안이 혀를 찬다.

“이거야 원……! 쯧쯧쯧!”

“누구나 제 목숨은 귀한 거야.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려는 거니 욕할 일은 아니지.”

현수가 한 말이다.

“욕을 한 게 아니라 한심해서 그러는 거야. 이곳 영주는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저런 썩은 성문을 여태 놔뒀잖아. 질 좋은 철광석이 나면 뭐해? 써야 할 데를 모르는데.”

라세안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렇기에 현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

“흐음, 철광석이 나기 시작한 건 얼마 전부터이고, 그걸 성문 보강에 쓰기엔 이곳 케발로 영지의 빚이 너무 많았네.”

“……? 누구십니까?”

“자네가 방금 한심하다고 한 이곳 영주이네.”

“아……!”

라세안이 짧은 감탄사를 낸다. 하지만 고개 숙이지는 않았다. 하렌 자작이 연장자로 보이기는 하지만 한낱 인간이다.

드래곤이 하찮은 인간에게 어찌 고개를 숙이겠는가!

보통의 귀족 같으면 라세안을 당장 요절낼 듯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하렌 자작은 그러지 않았다.

“빚을 졌으면 그것부터 갚아야 한다 생각했네.”

“말씀 중에 미안합니다만 그냥 우리끼리 한 이야기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지. 대신 이곳을 잘 지켜주게. 전투가 벌어지면 나는 저곳에 있을 것이네. 성문이 깨지면 곧장 연락하는 거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라세안 대신 현수가 대답하자 하렌 자작은 발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여러 기사가 따라붙었지만 어느 누구도 뭐라 하는 이 없었다.

자작의 태도도 특이했지만 오만한 기사들의 태도 역시 보통은 아니다. 이럴 경우 대부분 호통을 치거나 눈을 부라리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흐음, 이곳 영주는 사람이 괜찮은 모양이군.”

현수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라세안이 응답한다.

“그러고 보니 여긴 세율도 그리 높지 않다 들었네. 평민들을 심하게 착취하지도 않았다고 하고.”

“흐음, 인망은 잃지 않았다는 뜻이군.”

“그래서 요즘 이곳 케발로 영지의 영지민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중이었다고 하네.”

“쩝, 아무튼 우리 임무는 여길 지키는 거지? 그러니 나가서 잠깐 여기저기를 살펴볼게.”

“그러게.”

현수가 아직 닫히지 않은 성문을 살피는 동안 라세안은 성벽 위쪽을 둘러보았다. 용병지부에서 지급한 지휘관 표찰 때문인지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낱 용병이 이토록 마음대로 군사 시설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영지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용병이란 돈만 주면 반대편에도 붙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교적 자유스러웠기에 성벽의 거의 전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같은 시각, 현수는 낡아빠진 성문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너무 오래되어 군데군데 삭아 있다.

이 정도면 성문을 깨부수기 위해 제작된 충차까지 끌고 올 필요가 없다. 노포(弩砲)라고도 불리는 발리스타(Ballista) 정도로도 파괴가 가능할 지경이다.

그만큼 부실하다는 뜻이다.

“흐음, 심각하군.”

영지전을 가장 쉽게 치르는 것은 상대의 성문을 깨고 들어가는 것이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은 힘도 들지만 오르는 동안 상대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문에 대한 집중 공격이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올 것이다.

충차, 발리스타도 문제지만 투석기로도 망가질 게 뻔하다. 하여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현수는 좌우를 살폈다.

모두 곧 있을 전투를 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듯하다.

현수는 아공간에서 작은 마나석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기 힘든 성문 위쪽에 작은 마법진 하나를 새겼다.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오르기는 쉬웠다.

“흐음, 이 정도면 되겠지?”

현수가 새긴 마법진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스트렝스이다. 글자 그대로 성문의 내구강도를 높여주는 마법진이다.

다른 하나는 일래스티서티(Elasticity) 마법진이다. 이는 상대의 공성무기를 퉁겨내는 역할을 한다.

강하게 부딪칠수록 강하게 튕겨 나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긴 것은 두 마법진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현수가 마나석까지 써가며 이런 마법진을 새긴 것은 인품이 괜찮다고 판단한 하렌 자작 때문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막심 백작이 나쁘다는 평판이 작용하였다.

내친김에 밖으로 나가보았다. 적의 침입을 1차 저지할 해자도 없다. 성 밖이 허허벌판이라면 화살로도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 벌목을 해서 시야를 확보한다. 물론 땔감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하지만 이 성은 그러하지 못하다.

라수스 협곡 바로 바깥쪽에 위치한 케발로 성은 수시로 몬스터의 습격을 당한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기사뿐만 아니라 마법사를 양성한 것이다.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마법사와 기사가 필요하다. 당연히 많은 비용이 지출된다. 돈 나올 구멍은 작고 나갈 것은 점점 늘어나니 당연히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빚은 미판테 왕국의 양대 상단 중 하나인 스페른 상단에게 진 것이다. 참고로 하인스 상단의 서기 얀센이 몸담았던 곳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상단은 아렌시아 상단이다.

카이로시아의 이레나 상단이 차지했어야 할 유카리안 영지의 마나석 광산 채굴권을 가진 곳이다.

어쨌거나 자금난에 봉착한 스페른 상단은 케발로 영지의 빚을 막심 백작에게 넘겼다.

채권 총액은 약 100만 골드 정도 된다.

이걸 60만 골드에 넘긴 것이다. 이렇게 채권을 확보한 막심 백작은 즉시 상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갚을 돈이 없던 하렌 자작은 캐낸 철광석을 팔아주겠다고 사정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요구했다.

이에 막심 백작은 석 달을 주었다.

문제는 케발로 영지의 지정학적 위치이다.

라수스 협곡과 츠로쉐 영지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상인이 들어오려면 반드시 츠로쉐 영지를 통과해야 하는데 막심 백작은 이들의 통행을 막았다.

케발로 영지를 고사시켜 꿀꺽하려는 의도이다.

어쨌거나 석 달은 속절없이 지났다. 그러자 사람을 보내 세 가지 요구를 하였다.

첫째는 철광석 광산을 통째로 넘기라는 것이다. 물론 빚은 전액 탕감된다.

둘째는 광산으로부터 츠로쉐 영지까지 통행권을 요구했다. 캐낸 광석을 운반하기 위한 길을 요구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들어줄 수 있는 요구이다.

문제는 셋째 요구이다.

하렌 자작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요구했다.

막심 백작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나이 20에 벌써 본처와 두 첩을 거느리고 있다.

하렌 자작의 딸 루나는 인근에 소문난 미녀이다. 올해 17살이 된 그녀를 요구한 것이다. 말은 아들의 세 번째 첩이라 했지만 실제론 막심 백작의 열두 번째 첩이 될 것이다.

이 제안을 거절하자 즉시 돈을 갚으라는 압박을 가했다. 그리곤 이쪽의 대답도 듣기 전에 영지전을 선포했다.

막심 백작으로선 케발로 영지가 등 뒤의 신경 쓰이는 존재이다. 다른 영지를 집어삼키려 할 때 뒤에서 공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번 기회에 케발로 영지를 집어삼키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아무튼 영지전이 벌어져 막심 백작이 이긴다면 하렌 자작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루나는 성노가 될 것이다.

성 밖에 드문드문 자라 있는 수목들은 궁수들의 공격에 방해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베어낼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곳저곳 허물어지고 있는 성벽을 보수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흐음!”

현수는 나지막한 침음을 냈다. 그리곤 팔짱을 낀 채 바깥 풍경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 있을 즈음 라세안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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