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13화 (413/1,307)

# 413

“제법 강군이더군. 위계질서도 잘 잡혀 있고. 마법사들은…….”

라세안은 제법 많은 것들을 보고 왔다.

기사와 병사들은 잘 벼려진 검처럼 군기가 바싹 들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늘 저 잘났다고 떠들게 마련인 마법사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라면서 칭찬 일색이다.

“다행이군. 그런데 문제가 있는 거 같아.”

“문제? 무슨 문제?”

“이곳 영주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적의 병력! 그게 다가 아닐 것이란 예감이야.”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을 살펴봤는데 추가 병력은 없는 것 같던데?”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뭔가 찜찜해.”

“그냥 두고 보자고. 우린 지나다 발목 잡힌 상황이잖아.”

“그래! 그러지. 참 자네 그거 아나? 여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날이 으슥해진다.

언제 적의 내습이 있을지 몰라 화톳불을 피워놓고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해가 떨어져 어둠이 몰려왔지만 적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이슬 맺히는 새벽 무렵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길목 좌우에 매복해 있던 케발로 영지군이 적을 공격하는 소리일 것이라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명 속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인다.

“쏘지 마라. 아군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시위를 당겼던 궁병들이 활을 밑으로 내려 건다.

와드드드드! 와드드드드……!

매복을 나간 병력은 기사 40명, 병사 1,600명이다.

기사가 탄 말이 앞에서 달려오고 그 뒤를 병사들이 따르고 있다. 작전이 성공이었다면 이처럼 달려오지 않을 것이다. 적은 입은 피해를 수습하느라 발걸음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전투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때가 바로 후퇴할 때이다.

질서정연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강병이었다 하더라도 오합지졸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후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은 초급 병사들도 아는 일이다.

“모두 대기! 궁수, 활을 들어!”

누군가의 명에 따라 성벽 위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긴다. 이 순간 모든 시선은 후퇴하는 아군의 뒤쪽에 쏠려 있다.

“이런……!”

성벽 위에 있던 죠반니 남작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온다. 후퇴하는 아군의 뒤쪽을 악착같이 따라붙는 일단의 무리 때문이다. 아군이 있기에 활로는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군의 후미를 따라잡은 적은 후퇴하는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며 마구잡이로 목을 베어낸다.

쉬익! 챙! 서걱! 쉬악! 채챙! 퍼억! 쉬익! 파악! 퍼걱!

“케엑! 컥! 크흑! 아악! 쿠엑! 크윽! 큭!”

뒤따르던 병사들이 목숨을 잃기 시작하자 선두에서 달리던 기사들이 일제히 돌아선다. 그리곤 칼을 휘둘러 적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아군과 적군이 섞여 난전이 벌어지진 것이다.

“이런……!”

죠반니 남작의 입에서 또 한 번 당혹성이 터져 나온다. 이렇게 되면 궁병을 전혀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악! 저기 저쪽에 적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비명에 사람들이 시선을 돌려보니 삼면으로부터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다. 혼전을 벌이는 곳에도 그 정도 인원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적의 군세는 2만 정도이다. 이쪽에서 매복에 내보냈던 병사와 기사 1,640명은 거의 전멸이다.

그렇다면 이쪽은 5,360명이고, 저쪽은 2만이다.

병사의 수효만 거의 네 배이다. 게다가 저쪽은 이쪽의 계략을 깨부쉈기에 기세가 올라 있다. 반면 이쪽은 아군 병사들이 도륙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는 중이다. 당연히 사기가 떨어진다.

아군이 거의 전멸하자 죠반니 남작이 이를 악물고 소리친다.

“이익……! 모두 활을 쏘아라!”

휙! 휘휙! 휘휘휘휙! 휘휘휘휘휘휙!

혼전으로 인한 사체가 즐비한 곳에 화살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때 누군가 외친다.

“적의 시신을 방패 삼아라.”

휘이이익! 퍽! 퍼퍽! 피피피픽! 퍼퍼퍼퍽!

“크윽! 악! 케엑! 끄윽……!”

혼전 중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기절해 있던 아군 병사들의 몸에 화살이 꽂히자 비명을 토한다.

“저, 저런 간악한……!”

“이익! 저, 저런 개자식들을……!”

성벽 위의 병사와 기사들은 나직한 신음을 토한다.

아군의 시체에 박히는 화살을 본 사람들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분노하는 것 이외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이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내가 있다. 막심 백작이다.

이번 영지전이 벌어지기 전 막심은 병력의 일부를 감추고 세작을 파견했다. 그 결과 매복 작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백작은 역계략을 꾸몄다. 케발로군이 매복할 곳 주변에 먼저 매복을 시켜놓은 것이다.

그것도 적 병력의 세 배를……!

그 결과 하렌 자작과의 병사 차이를 단숨에 네 배로 만들었다.

공성전을 하려면 적어도 세 배의 병력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이기더라도 지리멸렬할 수 있다. 하여 아군 병력의 일부를 감추었다. 그 인원만 5천이다.

그렇기에 케발로에서 파견한 간세들이 이들의 존재를 모른 것이다. 그 결과 적 병력을 대폭 줄였다.

이제 남은 것은 공성전뿐이다.

낡아빠진 성벽을 깨기 위해 각종 공성 병기를 준비했다.

병사들은 두 번에 걸친 영지전에서 단련되어 있다. 따라서 패배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웃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화살의 비가 그친다. 시신들을 내려놓고 일어서는 병사들을 보니 피해는 거의 없는 듯하다.

“크하하하! 무엇들 하느냐? 공격하라!”

“예! 알겠습니다. 모두 전진하라.”

막심 백작의 명이 떨어지자 기사단장의 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진다. 진격신호이다. 그와 동시에 갈리아 영지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든다.

“여, 영주님!”

적의 어마어마한 군세에 질린 죠반니 남작이 저도 모르게 다급성을 토했다. 병사들 뒤쪽에 등장한 공성무기 때문이다.

발리스타, 충차, 투석기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 이런……!”

하렌 자작 역시 경악성을 터뜨린다. 적의 대공세를 버텨내지 못할 것임을 직감한 때문이다. 성벽 위의 병사와 기사들 역시 낯빛이 창백해진다. 패배할 것을 예감한 것이다.

휘이이익―!

“아악! 바위다. 피해라.”

쿠웅! 우르릉―! 콰앙! 휘익! 콰아앙! 콰르르릉―!

“아아악! 케엑!”

같은 순간 바위들이 성벽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린다. 이 와중에 죽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몇 번만 더 공격당하면 굳이 성문을 깨지 않아도 병사들이 난입할 수 있게 된다.

워낙 차이가 크기에 병사들은 겁에 질렸다. 이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터져 나온다.

“몬스터다! 몬스터들이 쳐들어온다.”

“뭐어……? 하필이면 이때……! 남작, 어서 뒤쪽을 확인하게.”

“네, 영주님!”

죠반니 남작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막심 백작군의 공세는 계속되고 있다.

휘이익! 콰아앙! 우르르르! 휘이익! 콰앙! 콰르르르!

“여, 영주님! 큰일입니다.”

“……!”

“몬스터가… 라수스 협곡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몬스터가 내습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오, 오크의 수만 족히 5천입니다.”

“5천?”

“네, 뿐만 아니라 트롤과 오거들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 끄응!”

털썩―!

하렌 자작은 맥이 풀리는지 주저앉고 말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같은 순간, 현수와 라세안 역시 성의 뒤쪽에서 몬스터들이 달려든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넨 여기에 있어. 난 뒤로 가볼 테니.”

“그래. 가보게.”

“하필이면 이때 왜……?”

라세안을 남겨두고 황급히 뒤쪽으로 달려가는 현수는 하렌 자작이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했다.

앞의 공격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뒤쪽마저 대책 없는 몬스터들이 공격하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아아! 이제 우린 끝이야. 끝이라고!”

털썩―!

누군가 주저앉는다.

삶의 의욕마저 잃었는지 낯빛이 창백하다.

뒤쪽의 성벽은 앞쪽보다 성하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기어오를 수 없는 높이는 아니다.

“이런……!”

성벽에 오른 현수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탄식이다.

너무 많은 몬스터가 한꺼번에 쇄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성벽 위에 있던 병사 하나가 실족하여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를 향해 수많은 오크가 달려들더니 삽시간에 해체해 버린다.

“이, 이런! 저 빌어먹을 놈들이……?”

게걸스럽게 뜯어먹는 몬스터들을 본 현수의 눈빛이 사나워진다. 그와 동시에 가슴에서 엄청난 마나가 유동한다.

인간이 한낱 미물의 먹이로 전락하는 모습에 피 끓는 분노가 솟은 탓이다.

“야, 이놈들아! 모두 죽어라. 헬 파이어!”

쉐에에에엑! 화르르르르르!

케엑! 끄윽! 크아아악! 케엑!

어마어마한 화염의 비가 쏟아지자 쇄도하던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몬스터들을 사람이라고 치면 가히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참상이 벌어지는 중이다. 용암처럼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발버둥치는 몬스터들을 본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5천이 넘던 오크와 2백여 트롤, 그리고 150여 마리의 오거가 재가 되고 있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병사 1만이 있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몬스터가 지옥의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중이다.

몇몇 병사와 영지민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순간 뒤따라온 라세안 역시 입을 딱 벌린다.

현수가 방금 전에 시전한 마법은 8써클 마법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헬 파이어이다. 글자 그대로 지옥의 불길이 펼쳐지는 무시무시한 마법이다.

8써클 마법을 익히고 있기에 라세안 역시 헬 파이어를 시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놀라는 것은 현수가 시전한 마법의 범위와 강세가 너무도 대단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간이……! 어떻게 해서 저런 위력이 나오지?’

라세안은 벌린 입을 좀처럼 닫을 수 없었다. 분명 8써클 마법이지만 10써클에 버금갈 위력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의 불바다가 펼쳐진 현장엔 더 이상의 몬스터가 없다. 마법의 범위 밖에 있던 놈들은 놀라서 도주했기 때문이다.

라세안이 이처럼 놀라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존재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 갓 서른을 넘긴, 몸매 호리호리한 장한이다.

“헐……! 세상에 맙소사……!”

너무도 강력한 마법을 본 사내는 얼른 뒷걸음질 친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건만 조심스레 주위를 살핀 사내는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았다. 성문 입구에 충천하는 화광 때문이다.

현수가 뒤로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충차의 공격을 받은 성문이 깨진 때문이다. 현수가 마법을 걸어놓았기에 이십여 차례나 견뎌냈지만 결국 빠개지고 만 것이다.

안 그랬다면 단번에 성문이 빠개졌을 것이다.

7장 이실리프 마법사의 등장

현재는 사전에 계획된 대로 누군가 불을 놓아 화마가 치솟는 중이다. 하여 막심 백작의 군사들은 충천하는 화광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막심 백작은 이제 곧 케발로 영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다가간다.

잠시 후, 막심 백작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주춤거리며 몇 발짝을 물러난다.

같은 순간, 절망에 빠진 하렌 자작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 곧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루나는 적에게 더럽혀질 것이다. 모든 재산은 약탈당할 것이고, 소중한 영지는 간악한 자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하여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