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14화 (414/1,307)

# 414

이때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와아아! 적이 물러난다! 와아아! 적이 물러간다!”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자 하렌 자작이 시선을 든다. 기세등등하던 막심 백작군이 뭐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일제히 물러나는 모습이다.

준비해 왔던 공성무기들도 내팽개친 채 뭐에 놀랐는지 허둥지둥 도주하고 있는 것이다.

“……?”

하렌 자작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 새에도 막심 백작군은 놀란 기러기처럼 물러난다.

“와아아! 우리가 이겼다. 적들이 물러간다. 와아아아!”

병사와 기사, 그리고 영지민 모두 하나가 되어 함성을 지른다. 같은 순간 하렌 자작은 비틀거리며 몇 발짝 물러난다.

허탈해서 다리에 힘이 빠진 것이다.

이 순간 성의 뒤쪽에서 앞으로 나오던 라세안이 현수에게 묻는다.

“그거 8써클 헬 파이어였지? 그치?”

“그래.”

현수는 자신이 시전한 마법의 위력에 놀라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라세안은 현수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하여 오해를 한다. 자신조차 장담할 수 없는 엄청난 마법을 현수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대체 뭐야? 그건 9써클, 아니, 10써클 마법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어. 근데 그게 당연해? 저 친구는 대체 뭐지? 분명 8써클 마법사인데 어떻게 그런 위력이 나왔지?’

8써클 마법은 자주 시전되지 않는다. 아니, 볼 수 없다. 인간 가운데에는 8써클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수를 제외했을 때의 일이다.

하지만 드래곤 중에는 8써클 마법을 펼칠 존재들이 많다.

라세안, 아니, 라이세뮤리안은 다른 드래곤들이 펼치는 헬 파이어를 여러 번 본 바 있다.

그들 어느 누구도 방금 전 현수가 보인 위력을 내지 못했다. 9서클 드래곤도 방금 전 것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라세안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같은 순간, 하렌 자작에게 보고하는 이가 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는 바람에 귓속말로 듣던 자작의 안색이 크게 변한다. 그리곤 주위를 둘러본다.

누군가를 찾는 듯하다.

잠시 후, 자작의 명에 따라 몇몇 기사와 병사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우린 이만 가세.”

“응……? 그, 그러지.”

현수가 소매를 잡아당기자 라세안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8써클 마법으로 10써클 위력을 내는 것을 본 이후에 위축되는 기분이 들어서이다.

성을 나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방이 온통 어수선하기 때문이다.

“왜? 자네 덕에 몬스터들이 모두 죽었잖아. 막심이라는 놈이 군사를 물린 것도 자네 때문일 것이네. 그런데 왜? 자넨 일등 공신이지 않는가?”

“그냥 가!”

“그래? 뭐, 자네가 원하면…….”

라세안은 현수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는 사람이 있다. 영주성 첨탑에 숨어 있던 하렌 자작의 딸 루나이다.

첨탑에선 영주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렇기에 현수가 헬 파이어 마법을 구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위력에 화들짝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드래곤의 브래스 정도 된다 여겼다.

“아! 왜 그냥 가시지?”

루나는 현수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젊은 청년이다.

7써클 대마법사가 되면 바디체인지를 통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바 있다.

그렇기에 나이가 많지만 얼굴만 어려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떠랴?

영지에 닥친 위기를 단번에 해소시킨 영웅이다. 이런 영웅이라면 일생을 의탁해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중이다.

그런데 그냥 가버리고 있다.

루나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다. 마침 첨탑 아래엔 하렌 자작이 위기를 해소시켜 준 인물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리는 중이다.

막심군의 대규모 공세를 보고 이제 끝났다 싶었을 때 성의 뒤쪽에서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엎친 데 덮치고, 서리 내린 데 눈 내린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이다. 하여 마법사들을 급파했다. 몬스터들 상대로는 병사보다 마법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명을 받은 마법사들은 대규모 마나 유동을 느끼고 기절할 듯 놀랐다. 드래곤이 출현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겁이 덜컥 났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여 부지런히 발길을 놀려 성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대경실색했다.

5천이 넘는 오크와 트롤, 그리고 오거들이 단체로 불고기가 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익은 정도가 아니라 시커멓게 탔다.

누가 봐도 단번에 시전한 마법의 결과이다.

마법사들의 뇌리로 스친 생각은 헬 파이어라는 8써클 마법이다. 한 번도 본적도 없고, 상상조차 못해봤지만 이건 최소한 9써클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이라 단정 지었다.

마법이 구현된 범위가 어마어마했던 때문이다.

서둘러 복귀하여 막 하렌 자작에게 보고했다. 이때 루나가 내려온 것이다.

“헉, 헉! 아, 아버지. 헉, 헉!”

“오! 루나야. 우리가 이겼구나. 우리가 이겼어.”

하렌 자작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린다. 어서 와서 안기라는 몸짓이다. 하지만 루나는 달려들지 않는다.

“헉, 헉! 아버지! 그분이 가요. 가고 있다고요. 헉, 헉!”

“그분……? 그분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하렌 자작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마어마한 마법을 펼치신 분 말이에요. 지금 저쪽으로 나갔단 말이에요.”

“뭐어……? 근데 누, 누구이더냐?”

“젊은 분이에요. 머리카락이 검은 분이세요.”

“뭐? 머리카락이 검다고?”

“네, 붉은 머리와 검은 머리 두 분이 가고 있어요. 어서요.”

“그, 그래! 무엇들 하느냐? 어서 쫓아가서 모셔와라.”

하렌 자작의 명이 떨어지자 기사와 병사들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네, 영주님!”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쫓아나갈 때 루나가 소리친다.

“꼭 데리고 와야 해! 아니, 꼭 모시고 와!”

“네, 아가씨!”

기사와 병사들이 현수와 라세안의 뒤를 쫓을 때 둘은 이미 상당한 거리를 이동한 뒤이다.

라세안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는다.

“하하! 하하하! 아마 깜짝 놀랐을 거야.”

“그런가? 그게 놀랄 일이야?”

“그럼! 헬 파이어잖아. 아르센 대륙의 인간 중에는 8써클 마법사가 없어. 그런데 그게 시전되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나?”

“쩝!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데 하나 묻겠네.”

“뭐 말인가?”

“내가 시전한 헬 파이어 말일세.”

“그래, 그 헬 파이어! 조금 무지막지했지.”

라세안이 잠시 움찔한다. 말 그대로 무지막지한 헬 파이어의 위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거 위력이 원래 그런가?”

“그, 그거……?”

라세안은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리곤 곧이어 말을 잇는다.

“그, 그럼! 원래 그 정도는 되네. 그럼……! 헬 파이어란 모름지기 그 정도는 돼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8써클 마법이지만 궁극의 마법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거지.”

말을 하는 순간 5천여 오크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불타오르던 순간을 떠올린 라세안은 갑작스러운 오한을 느꼈다.

너무도 어마어마한 마나 유동 때문이다.

그건 인간의 몸으로 뿜어낼 수 없는 양이었다.

숲의 종족 엘프의 장로급 둘이 동시에 마법을 구현시켜도 그 정도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드래곤 이외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라세안은 현수의 실체를 다시 한 번 의심했다.

하지만 알 수는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말일세. 우리가 이 길로 쭉 가면…….”

현수와 라세안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가는 동안 하렌 자작은 성 뒤쪽에 죽어 있는 몬스터들의 사체를 치우도록 했다.

그냥 놔두면 엄청난 악취가 풍기기 때문이다. 또한 먹이가 부족한 몬스터들이 재침공할 수도 있다.

사실 이번 사태는 라세안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라수스 협곡을 떠나기 직전 라세안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들의 접근을 차단하도록 영역표시를 했다.

홀로 남겨진 다프네를 위한 조치이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마지막 수단을 준비했다. 그것은 본인의 소변이다. 폴리모프한 상태에서 배설한 것이 아니다.

라세안은 이것을 다프네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말하길 몬스터로부터 공격을 받아 경각지경에 이르거든 그것을 뿌리라 하였다.

아무튼 현수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협곡 초입에 살고 있던 몬스터의 대규모 이동이 시작되었다.

라세안이 아무런 대책 없이 영역표시를 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몬스터들이 도주할 길을 열어두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우왕좌왕하던 몬스터들이 향한 곳은 하필이면 다프네가 머무는 오두막 쪽이다. 도주하느라 굶주린 몬스터들은 먹잇감인 다프네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굶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함이다.

한편 오두막 안에 있다가 밖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튀어나왔던 다프네는 사색이 되었다. 사방을 에워싼 채 달려드는 몬스터들 때문이다. 몇 마리라면 소지하고 있던 활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너무 많다.

화들짝 놀란 다프네는 얼른 오두막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라세안이 준 플라스크를 들고 나왔다.

주둥이를 막고 있던 헝겊 뭉치를 뺀 다프네는 그것을 사방에 뿌렸다. 드래곤의 소변 냄새가 풍기자 모든 몬스터가 혼비백산하며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근처에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하여 본능대로 모든 오크와 트롤, 오거는 물론이고 드레이크까지 비명을 지르며 도주했다.

이들이 내처 달린 방향이 바로 케발로 영지 쪽이다. 결국 일은 라세안이 저지르고 수습은 현수가 한 셈이다.

“자아, 이제 곧 미판테 왕국을 벗어나겠군. 안 그래?”

“그래!”

울창한 숲을 헤치고 나온 현수와 라세안이 바라보는 곳엔 고색창연한 성채 하나가 동그마니 자리 잡고 있다.

미판테 왕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포인테스 영지의 영주성이다. 이곳은 아드리안 공국과의 국경에 접한 영지이다.

아무튼 아르가니 판 포인테스 후작은 현자로 소문난 사람이다. 소문에 의하면 재상이자 6써클 마법사인 에드가 롤랑 폰 갈리아 공작보다도 더 화후가 깊다.

이쯤 되면 중앙에서 떵떵거리는 권력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아르가니 후작은 좀처럼 성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지난 30년간 영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오로지 마법 연구에 몰두한 때문이다. 이쯤 되면 칩거라 할 수 있다.

아무튼 후작의 영지이기에 규모가 제법 커서 거의 모든 것이 자급자족된다. 그렇기에 타 영지와의 교류조차 없다.

심지어 후작가의 혼례 역시 영지 내에서 해결했다.

그럼에도 영지전을 겪지 않았다. 6써클 마법사의 분노를 감당하고 싶은 영주는 없기 때문이다.

영주성을 힐끔 바라본 라세안이 묻는다.

“어떻게 할 거야? 여길 들어갔다 갈까? 아님 그냥 갈까?”

“들어가세! 더운물로 목욕 좀 하고 싶어.”

“뭐,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라세안은 이제 현수의 말이라면 가급적 들어주는 태도가 되어 있다. 그날 이후의 일이다.

아무튼 현수와 라세안이 다가가자 성문 밖에서 창을 들고 근무하던 위사들이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누구냐?”

“아! 우리는 지나가는 용병입니다.”

“용병……? 둘 다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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