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5
“네, 여기서 하루 묵어가려 합니다.”
“좋아, 용병패를 제시하게.”
위병의 말에 용병패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 등급이라 생각하는지 흠칫하는 모습이다.
“B급 용병 라세안과 C급 용병 하인스?”
“그렇소.”
“아, 안으로 드시오.”
왠지 위병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여관의 위치를 물었다.
‘낭만과 추억’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관도 영지처럼 오래되었는지 너무 낡아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삐이꺽―!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실내가 드러난다.
빛이 스며들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어서 옵쇼! 식사입니까? 숙박입니까?”
다가온 꼬맹이는 이제 겨우 열 살쯤 녀석이다.
“둘 다……! 먼저 배부터 채울 거야.”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근데 방은 어떻게 해드려요?”
“1인실 둘 줘. 따끈한 목욕물도 준비해 주고.”
“네에, 이쪽으로 오세요.”
소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험상궂은 장한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뒤쪽에 자리 잡게 되었다.
“뭐로 드릴까요?”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거로 2인분. 그리고 술도 주게.”
“네에, 알겠습니다.”
꼬맹이가 싹싹하게 구는 게 귀여웠기에 현수의 입가엔 웃음이 배어 있었다.
주문을 마친 라세안을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면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객지에서 온 사람이기에 경계하는 것도 아닌 듯싶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잠시 지속했다.
“자아, 요리 나왔습니다.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입에서 살살 녹는 낭만과 추억의 특제 요리 오크 엉덩잇살 무침입니다.”
“뭐어……?”
굶어죽게 생긴 사람들도 오크는 먹지 않으려 한다. 몬스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구 사람이지만 현수 역시 오크 고기는 먹어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눈을 크게 떴다.
이에 꼬맹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헤헤, 농담이에요. 손님! 이건 오크 엉덩이 살이 아니라 트롤 뒷다릿살이랍니다. 헤헤헤.”
“클클클!”
“크크크큭!”
“킥킥, 저건 트롤 뒷다릿살도 아니지. 아마 오거 거시기 살일 걸. 킥킥킥!”
“크하하하! 오거 거시기! 크하하하! 오거 거시기라니…….”
곁에 있던 장한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린다.
현수는 뭐가 진실이냐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때 가장 성질 더럽게 생긴 장한이 괴소를 머금으며 입을 연다.
“이보게. 자네들이 외지 사람이라 토마스가 장난을 친 모양이네. 그건 그냥 사슴 고기니까 마음 놓고 먹게.”
표정과 눈빛을 보아하니 진짜인 듯싶다.
현수는 싱끗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아! 고맙습니다. 오거 거시기 살은 진짜 별로거든요.”
“크큭! 크크크큭!”
옆에 있던 장한들이 생각만 해도 웃기다는 듯 웃는다. 그러고 보니 험상궂게 생기긴 했지만 불량하진 않은 듯싶다.
“아저씨! 그런 거짓말 하면 안 되죠. 이거 진짜 오크 엉덩이 살이잖아요. 사람 속이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
토마스라는 꼬맹이의 말에 모두들 움찔거린다. 이때 라세안이 입을 연다.
“꼬마야. 이거 진짜 오크 엉덩이 살로 만든 거니?”
“네, 영지에 있던 도축장이 모두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오크를 잡아다 파는 중이에요.”
“……!”
아무래도 토마스의 말이 사실인 듯싶다. 현수는 가장 험상궂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썩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오크 엉덩이 살이라니……. 근데 맛은 괜찮니?”
“네, 아버지가 먹을 만하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럼 한번 먹어볼까?”
현수가 포크로 오크 엉덩잇살 무침을 집어 들자 라세안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웬만하면 그거 먹지 말게. 오크는 맛이 별로거든.”
“맛이 별로야?”
“그래! 퍽퍽하고, 질기기만 하네. 그냥 자네가 요리해 주게.”
현수는 집었던 오크 고기를 내려놓았다.
“꼬마야! 아니, 토마스. 아빠에게 가서 여쭤봐, 내가 주방을 써도 되는지.”
“아저씨, 요리사세요?”
“요리사? 그래 그쯤 된다 치자.”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토마스가 쪼르르 주방 쪽으로 가자 라세안이 입을 연다.
“나, 탕수육이라는 그거 먹고 싶은데 되나?”
“탕수육? 그럼, 가능하지.”
“좋아, 그럼 그걸로 부탁하세.”
오는 동안 현수의 요리 솜씨에 완전히 매료된 라세안은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모양이다.
“아저씨, 아빠가 주방 쓰셔도 된대요. 근데 고기는 없으니까 알아서 하시래요.”
“그래? 알았다.”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토마스의 뒤를 따르자 라세안은 기대에 찬 눈빛이고, 옆 테이블의 장한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고기도 없는데 주방에서 뭘 하겠나 싶은 모양이다.
예상했던 대로 주방은 얀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하다.
토마스의 아빠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토마스는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더니 후다닥 나가 버린다.
“라이트!”
현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광도가 달라진다. 조금 전까진 어디에 무엇이 있나 정도만 식별 가능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도 환히 보인다.
“흐음, 이 정도는 돼야지.”
현수는 두리번거리며 화덕을 찾았다. 예상대로 나무로 불을 피워 음식을 조리한 듯하다.
“흐음, 이 정도면 오래 걸리겠는걸.”
탕수육을 만들려면 기름이 펄펄 끓어야 한다. 그렇기에 강염 가스버너를 꺼냈다. 출력이 8,500㎉/h나 되는 놈이다.
참고로,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스레인지가 대략 3,600㎉/h 정도 되니 화력이 매우 좋다는 뜻이다.
아무튼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하도 여러 번 해봐서 그런지 이젠 제법 주방장 포스가 풍긴다.
능숙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는 동안 기름이 끓기 시작한다. 탕수육 옷을 조금 넣어 온도를 확인하곤 곧바로 튀겨냈다.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이게 뭔가 싶어 토마스가 가장 먼저 기웃거린다. 곧이어 라세안이 침을 질질 흘리며 들어선다.
“이봐, 아직 멀었나?”
“아니, 조금만 기다려. 하는 김에 뭘 좀 더 만들었으니까 술이나 잘 챙겨놓으라고.”
“술도 자네가 내놔야 하잖나.”
“참, 그렇군. 알았네. 내가 챙겨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라세안과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 튀겨냈다.
현수가 홀에 나타난 것은 10여 분이 흐른 뒤였다.
“자아! 하인스표 특제 요리가 나가네.”
현수의 뒤에는 토마스가 조심스러운 발길로 따르고 있다. 접시 위에 수북하게 쌓인 음식을 흘릴까 싶어서이다.
“그게 다 뭐요?”
옆 테이블 사내들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탕수육과 라조기를 처음 보니 묻는 말이다.
“이건 이 친구의 특제 요리지. 맛 좀 보겠소?”
라세안의 말에 험상궂은 사내가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않아도 냄새 때문에 침이 질질 흐르던 중이다.
“토마스, 테이블마다 한 접시씩 가져다줘.”
“네, 손님!”
주방에서 탕수육 맛을 본 토마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자아, 이제 슬슬 먹어보실까?”
현수가 젓가락을 들자 라세안이 얼른 잡는다.
“이, 이보게. 그건 안 꺼내나?”
“그거……? 아! 술……. 그래, 꺼내야지.”
현수가 꺼낸 것은 한국산 소주이다. 라세안은 이미 이 맛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이다.
술이 따라지자 한국식 주법에 따라 둘은 잔을 가볍게 부딪치고는 단숨에 비웠다.
“캬아아아! 역시 이 맛이야.”
탕수육 한 점을 우물거리며 라세안이 한 말이다.
“맛이 괜찮나?”
“그럼! 자네가 만든 건 뭐든 맛이 있네. 자아, 한잔 더 따라주게. 오늘 아주 뽕을 뽑으세.”
“헐……! 뽕까지 뽑아? 그냥 적당히 마셔. 접때처럼 내일 아침에 머리 아파 죽겠다고 하지 말고.”
“아! 그랬지. 알겠네. 적당히 세 병만 마시지.”
“헐! 그래. 그렇게 해. 자넬 어찌 말리겠나. 안 그래?”
“그럼! 난 아무도 못 말리지.”
둘은 서로 술을 권하며 배를 채워갔다. 그러는 동안 다른 테이블에서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하긴 먹을 고기가 없어 오크 엉덩이 살까지 먹었다.
맛도 없고 질기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다 탕수육과 라조기를 먹으니 어찌 감탄사를 터뜨리지 않겠는가!
다만 라조기가 조금 맵다고 엄살 부리는 자들이 있었다.
현수와 라세안이 각자 두 병씩 비웠을 즈음이다.
삐이꺽―!
문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의례적인 인사를 하려던 토마스가 중간에 말을 끊는다.
“어서 옵……?”
들어선 사내는 심상치 않다. 시커먼 로브를 걸쳤는데 족히 90살은 되어 보인다. 허연 머리카락과 수염이 인상적인 이 노인의 손에는 굵직한 용두괴장이 쥐어져 있다.
“……!”
토마스의 음성에 따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
“허억! 여, 영주님!”
털썩―!
“……!”
조금 전 현수를 놀리려던 험상궂은 사내가 얼른 옆으로 한걸음 이동하더니 부복한다.
“영주님……?”
라세안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은 현수는 들어선 노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했던 간달프(Gandalf)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모든 사내가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린다. 까불까불하던 토마스도 포함되어 있다.
현수와 라세안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이는 위장된 표정이다. 이곳 영주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고픈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하인스님이십니까?”
현수와 라세안을 번갈아보던 노인의 시선은 현수에게 닿아 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다.
“네, 제가 하인스인 것은 맞습니다. 한데 누구십니까?”
“아아! 로드시여, 저는 이곳 포인테스 영지의 영주인 아르가니라 하옵니다.”
“아! 그러세…….”
나이가 훨씬 많은 인물인지라 어른 대접을 해주려던 현수는 말을 멈췄다. 아르가니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진 까닭이다.
“괜찮으시다면 로드를 제 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네……?”
“이실리프 마탑에서 오신 위대한 로드께서 어찌 이토록 누추한 곳에 계십니까? 모시기엔 협소하지만 제 성으로 가시지요.”
“……!”
부복한 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한들은 전신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포인테스 영지를 다스리는 아르가니 후작은 30년 전에 6써클에 오른 왕국 최고의 마법사이다.
최소 7써클이 되어야 현자 칭호를 듣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대륙 7대 마탑의 탑주 가운데에도 6써클 마법사가 있다.
그렇기에 6써클이지만 ‘미판테의 현자’라 불린다.
그런 아르가니 후작이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자신들과 농을 주고받던 청년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이실리프 마탑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얼마 전 있었던 케발로 영지에서의 일은 이미 왕국 전역에 소문이 번져 있는 상태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현상은 이곳 아르센 대륙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지금은 대륙의 구석구석까지 번지는 중이다.
영지전 당시 성의 뒤쪽에서 벌어진 일은 벌써 조사되었다.
미판테 왕국은 물론이고, 쿠르스 왕국와 엘라이 왕궁의 5써클 이상 마법사 거의 모두가 그곳을 방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7대 마탑의 수뇌부 전원도 그곳에 머물고 있다.
이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은 헬 파이어를 시전한 마법사가 최하 9써클 마스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