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능의 팔찌-416화 (416/1,307)

# 416

대륙에 새로운 매지션 로드가 출현한 것이다.

매지션 로드란 이 세상 모든 마법사의 수장을 뜻하는 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법사들의 총두목쯤 된다.

아무튼 C급 용병이라던 하인스가 바세른 산맥에서 내려온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라는 추측이 나왔다.

그 결과 대륙은 발칵 뒤집어졌다.

7대 마탑에도 7써클 마스터는 없다. 그런데 그런 7써클 마스터 100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감당할 수 없는 9써클 마스터가 출현했으니 어찌 난리가 나지 않겠는가!

국가와 이념을 떠나 모든 마법사는 조금 더 높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 평생토록 연구에 몰두한다.

이건 백마법사나 흑마법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검술이나 학문을 익힐 때에도 스승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매우 크다. 이미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의 조언은 수십 년의 고련을 단숨에 메워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여 거의 모든 고위 마법사가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로 추측되는 하인스를 보고자 사방을 뒤지는 중이다.

8장 오오! 로드시여, 한 말씀만 하소서

오늘 아르가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명상에 잠겨 있었다. 수백, 수천 번을 읽은 마법서는 이제 필요가 없다.

아예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르가니는 하루에 최소 10시간 이상 명상 속에 잠겨 있다. 더 늙기 전에 7써클에 오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실마리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오늘은 여느 날과 달리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하여 흐뭇한 마음으로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여섯 시간쯤 지났을 즈음 뭔가가 떠오르려는 순간이다.

벌컥―!

“여, 영주님!”

누군가의 무단 침입에 아르가니가 호통을 친다.

“갈―! 내가 명상에 잠겨 있을 때에는 어느 누구도 들이지 말라 했거늘……! 네놈들이 감히……! 네놈들이 방금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아느냐? 아느냔 말이다!”

집사장의 무례한 난입에 화가 난 아르가니 후작이 인상을 찌푸리자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인다.

“그, 그게……! 얄루신 집사장님이 너무 급한 일이라고 해서……. 죄, 죄송합니다. 소인들을 죽여주십시오.”

“끄응……!”

너무도 화가 났지만 어찌 평소 충성을 아끼지 않던 영지의 소중한 재산인 기사들을 죽이겠는가!

후작은 나지막한 침음을 내며 명상을 방해한 집사장을 노려보았다. 단숨에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눈빛이다.

“얄루신! 이 시간이 내가 늘 명상에 잠겨 있는 시간이라는 거 모르나? 앙?”

후작의 음성엔 노기와 더불어 냉기까지 담겨 있다. 이에 집사장은 얼른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소리친다.

“여, 영주님! 소인이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왜……?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다고 날 방해해? 이웃 영지가 영지전이라도 걸어왔느냐?”

“아, 아닙니다. 영주님! 어느 누가 감히 우리 영지를 노리겠습니까? 근데…….”

“그런데 뭐……? 누가 죽을 지경이라도 되었나?”

“그, 그것도 아닙니다. 지금 밖에…….”

얄루신 집사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이으려 했다. 그때마다 후작이 말을 끊으니 미칠 지경이다.

“밖에 뭐? 드래곤이라도 나타났어?”

“아, 아닙니다.”

“근데 왜 내 소중한 명상 시간을 방해해?”

아흔 살이 넘었기에 이젠 웬만한 일엔 화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막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으려는 순간을 방해받았다 생각하니 짜증이 나는지 후작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집사장은 평범한 보고 방식으로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경을 칠 것이라 생각했기에 본론부터 말한다.

“여, 영주님! 로드께서 오셨습니다.”

느닷없는 어휘에 아르가니가 표정을 바꾼다.

“로드……? 무슨 로드……?”

“매지션 로드 말씀입니다.”

“뭐어……?”

대경실색 그 자체로 표정이 바뀐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매지션 로드? 9써클 마스터께서 오셨단 말이야?”

늘 명상에 잠겨 있느라 후작은 현수가 벌인 일을 몰랐다. 그렇기에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9써클 마법사가 존재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네, 영주님! 일전에 케발로 영지에서…….”

얄루신 집사장의 보고를 들은 아르가니 후작은 대경실색했다. 그리곤 곧장 이곳 여관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리곤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9써클은 인간의 수명만으론 오를 수 없는 경지이다.

눈앞의 인물은 청년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 나이는 수백 살이 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9써클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르가니 후작 본인의 나이가 92세이다.

마법사이기에 아직도 살아 있지만 인간으로선 이미 수명이 끝났을 나이이다. 그럼에도 겨우 6써클이다.

그만큼 써클 하나 올리는 것이 어렵다. 그러니 수백 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무튼 아르가니 후작은 매지션 로드의 마음에 들기 위해 더 이상 정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고개를 숙인 채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로드시여! 소인의 청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현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세안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 영감님, 왜 이러시지?]

[왜긴, 보아하니 6써클 끝에 있는 자이네. 자네가 펼친 헬 파이어가 문제인 듯싶으니.]

[그게 왜?]

[인간의 수준을 넘었으니까……. 그래서 로드라고 부르나 봐.]

라세안은 현수가 펼친 헬 파이어의 위력을 보고 어쩌면 10써클 마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사실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같이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현수는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무림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삼 푼은 감출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라세안은 일부러 이런 반응을 보인다 생각했다.

‘무서운 놈!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정체를 감출 수 있지? 대체 몇 백 년을 살았기에 이처럼 노회8)한 거야?’

라세안의 이런 상념은 길지 못했다.

“로드시여!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따라주십시오.”

아르가니가 더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아무래도 그냥은 물러가지 않을 것 같다. 하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흐음! 그럽시다.”

“가, 감사하옵니다. 로드!”

감격했는지 부르르 떠는 후작이다.

현수가 후작을 따라 여관을 나서자 안에 있던 사내들은 그제야 바닥에 대고 있던 이마를 뗀다.

“어쩐지……! 매지션 로드셨다니.”

“후와, 까딱 잘못했으면 목숨 부지하기 힘들 뻔했다.”

“맞아, 마법사들은 다 괴팍하잖아. 이봐, 자네 아까 죽을 뻔한 거 알아?”

“내가 죽을 뻔해? 왜?”

“아까 매지션 로드께 오거 거시기라고 농담했잖아.”

“헉……! 마, 맞아. 후와, 오늘 내가 운이 엄청 좋은 거구나.”

“그래! 그러니까 오늘 술값은 자네가 내게.”

“응……? 그, 그래! 까짓 것 내가 내지.”

인상 험악한 장한들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지만 내심 취했던 술이 단숨에 깨는 경험을 하는 중이다.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로드!”

아르가니 후작이 안내한 곳은 접견실이다. 그리고 현수에게 최상석을 내주었다. 정중하다 못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다.

한편, 라세안은 인간보다 못한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 떫은 표정이었지만 일이 어찌 전개될지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보고만 있다.

노인을 앞에 두고 편히 앉은 것이 미안해 한마디 했다.

“흐음, 아늑하고 좋군요.”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로드!”

“근데 아까부터 제게 로드라 부르시는데 왜 그러는 겁니까?”

이 말에 아르가니 후작은 몹시 당황스럽다는 표정이다.

“로, 로드! 로드께 로드라 부르지 뭐라 하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로드! 소인이 6써클에 오른 지 어언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촌보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 소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금과옥조9)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아르가니 후작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다.

“금과옥조라고요……?”

“네, 로드! 감히 한 말씀 청합니다. 소인을 어여삐 여겨주십시오. 한 말씀만 하소서.”

현수는 라세안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 잠자다 일어나 봉창 두드리는 소리람? 금과옥조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해달라는 거지? 자네 아나?]

[아! 마법이 나아지지 않아 죽겠다잖아. 한마디 해줘.]

[뭘 말이야?]

[자네, 10써클에 이를 때까지 뭔가 계기가 있었을 거 아닌가? 그중 아무거나 하나 말해주면 될 것 가지고 뭘 그러나?]

[뭐어? 10써클? 내가……? 대체 무슨 소린가? 내가 10써클 마법사라니. 말도 안 되네.]

현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라세안은 진짜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쩜 눈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저렇게 딱 잡아뗄 수 있는지 놀랍다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9써클도 안 된다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젠 9써클 마스터인 척하려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무서운 놈! 그런데도 지금껏 딱 8써클인 척하고 있었던 거야? 흐음, 이것도 스스로 자신을 감추려는 것이겠지? 삼 푼이라고?’

라세안의 착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때 뇌리로 또 하나의 상념이 스친다.

‘쳇! 친구 하기로 해놓고도 이렇게 잡아떼? 그리고 너 인마 10써클 맞잖아. 근데 왜……? 오호라, 그럼 내가 9써클쯤으로 낮춰볼까 싶어서 그러는 모양이구나.’

라세안은 또 제멋대로 재단하고는 눈빛을 빛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의 전음이 이어진다.

[뭘 해달라는 건지 모르지만 그런다고 나아질까?]

[그거야 모르지. 하여간 한마디 해줘.]

아르가니 후작은 숙였던 고개를 아직도 들지 않고 있다. 이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삐이꺽―!

“말씀하셨던 음료수 가져왔습… 어머……!”

유리잔에 든 핑크빛 음료수를 소반에 받쳐 들고 오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

복장을 보아하니 시녀는 아닌 듯싶다. 화사한 문양이 들어 있는 의복은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는 갓 이십을 넘긴 듯한데 살짝 틀어 올린 머리 때문에 조금은 성숙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늘씬하면서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어여쁘다.

이 여인을 보는 순간 현수의 뇌리로 지구에서 보았던 영화 하나가 스친다.

1982년에 개봉한 ‘파라다이스’라는 영화이다.

19세기 바그다드에서 다마스카스로 여행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회교도들의 습격을 받는다.

이때 졸지에 양친을 잃은 데이빗과 아름다운 영국 소녀 사라는 사막 한가운데서 적들의 추적을 피해 달아난다.

그러다 발견한 둘만의 공간에서 소년과 소녀는 사랑을 느끼고, 마침내 서로를 경험하며 성에 눈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히로인인 피비 케이츠는 당시 17살이었다.

눈앞의 여인은 그때의 피비 케이츠와 너무도 흡사해 보인다.

한때 대한민국 모든 청소년의 로망이었기에 현수는 놀랍다는 표정이다. 반면 라세안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다.

이때 여인의 입술이 열린다.

“할아버지!”

“어! 그, 그래.”

현수는 상석에 앉아 있고, 아르가니 후작은 그 앞에 깊숙이 허리를 숙여 조아리고 있는 상황이다.

손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생각했는지 아르가니가 떫은 표정을 짓고 있다.

“할아버지 왜 그러고 계세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대체 뉘신데 허리까지 숙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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