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
여인은 현수와 라세안을 유심히 살핀다. 특히 상석에 앉은 현수에게 오랜 시간 시선을 주었다.
워낙 귀하게 길러 평소 다소 직설적이던 손녀이기에 혹시라도 말실수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케, 케이트야! 무, 무례하지 말거라.”
아르가니 후작의 말 가운데 후반부는 얼버무려졌다. 케이트라 불린 여인이 큰 목소리로 현수에게 물은 때문이다.
“말해봐요. 당신은 대체 누구지요? 왜, 우리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거예요?”
“네……?”
느닷없는 물음이기에 현수는 짧은 반문을 했다.
“말해보라구요. 우리 할아버지는 이 나라의 후작이세요. 근데 대체 당신은 누구이기에……. 설마 왕자님이신 건가요?”
후작이 공작에게 예를 표할 때에도 허리를 45。 정도 숙인다.
국왕 또는 차기 국왕이 될 왕세자를 알현할 때에도 직각 정도로 숙일 뿐이다.
아르가니는 그보다 더 숙였지만 왕자냐고 물은 것이다.
“네에? 왕자요? 제가요……? 하하, 무슨 농담을……! 아닙니다. 왕자라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왕자도 아니면서 하늘같은 할아버지의 허리를 꺾이게 만든 현수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그럼, 왜……? 그럼 왜 우리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이봐요.”
“케, 케이트! 말조심하거라. 로드시다.”
“네……? 로드라니요?”
“어허, 케이트! 로드시라니까.”
“그러니까 로드가 뭐냐고요?”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케이트의 모습은 확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고혹적이다.
‘헐……! 내가 왜 이래?’
현수는 순간적으로 현혹될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 아르가니 후작의 말이 이어진다.
“케이트, 얼른 예를 취하지 못할까? 로드시다. 어서!”
“네……?”
여전히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자 아르가니가 얼른 고개를 숙인다.
“로드! 죄송합니다. 소인이 잘못 가르쳐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할아버지, 대체 왜……?”
“케이트! 로드시라고 말했지 않느냐? 어서 예를 갖춰라.”
아르가니가 호통을 치자 케이트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현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는 절이다.
“뉘신지 모르지만 케이트 에이런 판 포인테스라 합니다.”
“하하, 네에, 저는 하인스고 이 친구는 라세안이라 합니다.”
“아……! 그래요?”
가볍게 응대하고 고개를 들던 케이트는 노려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을 느끼곤 흠칫거린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느냐는 표정이다.
이때 아르가니가 아예 바닥에 엎드리며 고개를 조아린다.
“로드시여! 손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
“저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서 로드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옵니다. 소인을 봐서라도 한 번만 봐주십시오.”
“할아버지, 왜 이래요?”
부복하여 말하는 사이에 슬쩍 다가가 한 말이다.
“케이트! 네가 얼마나 큰 무례를 저질렀는지 아느냐? 저분은 이실리프 마탑에서 오신 로드이시다. 너는…….”
아르가니 후작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경악한 케이트의 음성 때문이다.
“네에? 이, 이실리프 마탑의 대마법사님이시라고요?”
케이트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때 라세안의 전음이 있었다.
[이보게 친구! 자네 진짜 이실리프 마탑 소속인가?]
[그래. 거기서 나왔지.]
현수의 대답에 라세안의 눈 또한 커진다.
[그, 그럼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과는 어떤 관계인 거야?]
[그분은 내 스승님이시네.]
[헐……! 진짜인가?]
라세안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내가 스승님의 하나뿐인 제자이지.]
현수의 대답에 라세안은 기억을 더듬었다.
수백 년 전, 멀린 아드리안 반 나이젤이라는 마법사가 있었다. 아드리안 공국의 시조이다.
당시의 드래곤 로드는 다른 모든 드래곤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드리안 공국 변방에 위치한 영지에서 난장판을 벌이던 광룡이 멀린에 의해 사냥당한 직후의 일이다.
9써클이지만 워낙 마나 효율이 높아 10써클 위력을 내기에 드래곤 로드조차 10써클 마법사인 것으로 오인한 결과이다.
당시의 드래곤들은 어느 누구도 10써클에 이르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분쟁이 벌어질 경우 더 많은 드래곤이 사냥당할 수 있다 생각했기에 내린 경고이다.
라이세뮤리안 역시 전언을 들은 바 있다.
그때 묻기를 소드 마스터이면서 8써클 마법사와 멀린이 대결하면 그 결과가 어떻겠냐고 했다.
당시의 드래곤 로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라이세뮤리안! 감히 10써클 마법사와 대결할 생각을 해? 너는 그의 말 한마디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일랑 말아라.”
이에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때 로드는 이렇게 덧붙였다.
“조금 전에 말했지? ‘파워 워드 킬’이란 다섯 글자만으로도 너는 죽는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이에 라이세뮤리안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몇이 덤벼야 10써클 마법사와 대등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에 로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너와 나, 둘이 전력을 다해 덤벼도 그를 이기진 못할 거다. 아마 우리 둘 다 목숨을 잃을 게야.”
로드의 이 말은 경각심을 주기 위한 말이다.
하지만 라이세뮤리안에겐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리고 10써클 마법사에겐 절대 덤비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9써클 마스터에 이른 로드조차 감당하지 못한다는데 겨우 8써클에 머무는 자신이 어찌 무엇을 해보겠는가!
아무튼 현수의 말에 라세안은 저도 모르게 공경어를 쓴다.
[그, 그럼 자네 스승님은 어디에 계신가?]
[얼마 전에 작고하셨네.]
현수의 대답에 라세안은 잠시 말을 끊었다.
[……! 그럼 자네가 이실리프 마탑의 신임 탑주인 건가? 그리고 스승님의 진전을 다 이은 거야?]
[그래! 이젠 내가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인 셈이지. 그리고 스승님의 유전은 고스란히 내게 이어졌네.]
현수는 이실리프 마법서를 떠올리고 한 말이다.
하지만 라세안은 달리 이해했다. 현수가 멀린에 버금가는 10써클 마법사인 것으로 확정지어 생각한 것이다.
이때 케이트의 음성이 있었다.
“저, 정말인가요? 정말 공자님이 이실리프 마탑의 대마법사이신 건가요?”
아르가니는 명상에 빠져 있느라 현수에 대한 소문을 뒤늦게 접했지만 케이트는 아니다.
케발로 영지에서 있었던 일은 다음 날 이 영지에도 전해졌다. 마법사들이 통신수정구를 통해 알려줬던 것이다.
이실리프 마탑에 관한 소문은 진즉에 번진 상황이다. 현수가 테리안 왕국의 떠난 직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미판테 왕국 등이 아드리안 공국을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최초의 소문엔 이실리프 마탑의 탑주가 기껏해야 7써클일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통신수정구를 통해 들은 이야긴 그게 아니다.
헬 파이어라는 8써클 마법이 구현되었지만 위력이랄지 파괴 반경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9써클 마스터일 것이라는 것이다. 10써클은 인간이 넘볼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귀족가의 여식이지만 케이트는 어려서부터 마나의 길을 걷는 마법사이다. 하여 19세지만 벌써 3써클이다.
아르센 대륙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성취이다.
물론 마법에 미쳐 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의 영향과 훈육이 큰 힘을 발휘한 결과이다.
아무튼 현재 케이트의 넋은 반쯤 나간 상태이다. 매지션 로드는 아르센 대륙 전체에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 기준은 물론 얼마나 고 써클이냐는 것이다. 7대 마탑의 탑주조차 7써클 마스터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9써클 마스터가 등장했다. 이건 대륙 각지의 마탑주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이다.
따라서 더 따져볼 것도 없이 이실리프 마탑에서 나온 하인스라는 C급 용병이 매지션 로드이다.
여기에 하나의 단서가 붙기는 한다. 하인스가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여야 한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이실리프 마탑에 얼마나 많은 마법사가 포진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중 가장 높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튼 케이트는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이제 겨우 20대 중반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 대륙 전체 마법사들의 흠모를 한 몸에 받는 매지션 로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상념이 뇌리를 스칠 때 아르가니 후작이 다시 한 번 허리를 접는다.
“로드시여! 부디 손녀 아이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로드라니요? 전 그런 사람 아닙니다.”
현수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이때 라세안이 한마디 거든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탑주가 매지션 로드가 아니면 대체 누가 로드를 하지? 안 그래?”
“이, 이보게…….”
“왜 감춰? 사실이잖은가!”
라세안의 말에 아르가니 후작의 눈이 더 커진다.
“헉! 마탑주시라니……. 그 말씀 정말이시옵니까?”
“끄응……!”
현수가 침음을 내는 순간 아르가니 후작과 케이트는 아예 바닥에 엎드린다. 오체투지한 것이다.
“오오! 로드시여……. 소인의 일생에 최대 광영이옵니다.”
“로드시여, 소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둘의 태도를 비유하자면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막 입교한 신학생이 로마 교황청 교황을 만났을 때와 흡사하다.
감격에 겨워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가니 후작은 격동 때문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다.
“오오! 오오오! 로드시여, 로드시여……!”
“끄응! 어서 일어나십시오.”
“로드! 말씀부터 낮춰주십시오, 제가 어찌 감히 로드께 존대어를 듣겠습니까?”
“어휴! 알았습니다. 그러니 일어나십시오.”
그래도 나이가 있기에 반쯤 존대했음에도 고개를 흔든다.
“로드시여!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끄응! 알았네. 어서 일어나게.”
“감사하옵니다.”
“케이트도 일어나고.”
“네, 로드!”
아르가니 후작과 케이트는 일어섬과 동시에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린다.
[대체 이 사람들 왜 이래?]
현수의 물음에 라세안이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마법사라는 놈들이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어. 어떤 때 보면 편집증 환자 같기도 해.]
[그래도 정도가 좀 심하지? 너무 공손하잖아. 안 그래?]
[보아하니 자네에게 한마디 듣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네. 그러니 자네가 깨우침을 얻었던 계기를 말해주게. 안 그럼 여길 나가지도 못할 것이네.]
[끄응! 정말 미치겠군.]
라세안은 이제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는 표정이다.
“로드시여……!”
“깨달음이라는 게 강제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 텐데 대체 왜 이러나?”
“……! 소인은 6써클에 오른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한데 아직도 6써클에 머물러 있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길…….”
“끄응! 그럼 한마디만 하지요.”
“아이고, 로드! 말씀 낮추십시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끄응! 알았네. 아무튼 깨달음이라는 것은 누가 말해준다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
“네, 로드!”
“최초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내가 마나라는 물속에 있다는 생각을 한 직후였네. 이토록 널려 있으니 마나를 굳이 몸에 담으려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알아들었나?”
“……?”
아르가니는 벌써 생각에 잠긴 모양이다.
아직 써클이 낮은 케이트는 눈만 말똥말똥하게 뜬 채 현수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