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
감히 넘볼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너무 젊고 잘 생겨 보인다. 하여 현수의 영상이 화인처럼 여린 가슴에 박히는 중이다.
“후작이 명상에 잠겼으니 우린 자리를 비켜주세!”
“그래! 그러지.”
현수와 라세안이 나가는 동안에도 케이트는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있었다.
둘은 조용히 접견실을 빠져나와 곧장 성 밖으로 향했다.
“목욕 좀 하고 쉬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그냥 가자.”
“그래.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현수와 라세안은 곧장 영주성을 빠져나와 아드리안 공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시각, 케이트는 로드께서 머물 방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먼저 가장 깨끗하고 전망 좋은 방을 골라냈다.
자신이 쓰던 방이다.
그리곤 시비들을 총동원시켜 먼지 한 점 없도록 청소를 시켰다. 다음엔 가장 좋은 침대를 들여놓고 새 침구를 깔았다.
주방에도 연락하여 최상급 요리들을 준비토록 하였고, 술도 최고급으로 골라냈다.
그다음이 목욕재계이다. 후작의 손녀지만 로드에게 기꺼이 몸을 바치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비록 하룻밤에 끝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일생의 광영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같은 시각, 현수와 라세안은 포인테스 영지 외곽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
제법 울창한 숲인지라 금방 오크 몇 마리가 나타난다.
이 녀석들은 현수와 라세안에게 접근하려다 아이쿠 뜨거워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쏜살처럼 사라졌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라세안이 존재감을 드러낸 직후의 일이다.
9장 드디어 아드리안 공국 도착!
“후작의 손녀 제법 예뻤지?”
“응? 뭐라고……?”
꽤 울창하지만 이 숲만 지나면 아드리안 공국이다. 그렇기에 어찌 처신할 것인지를 생각하던 현수의 반문이다.
“아르가니 후작의 손녀 말이야. 케이트라는 아가씨!”
“그래, 케이트가 뭐?”
“예쁘지 않던가?”
라세안이 무슨 의도인지 몰라 현수가 눈을 크게 뜬다. 그러다 번뜩이는 상념이 있어 한마디 했다.
“……! 설마, 자네도 자네 아버지 라이세뮤리안처럼 인간 여자를 취하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 그러면 안 되나?”
“드래고니안 마을에도 여자들 많잖아. 왜 그래?”
현수가 변태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니 얼른 말을 주워담는다.
“아……! 미안하네. 자네가 마음을 품었나 보군. 하긴 오랜만에 본 예쁜 얼굴이었어. 몸매도 괜찮았고. 내가 양보하지. 그래! 이번엔 내가 양보할 테니 자네가 취하게.”
“뭐라고……?”
현수가 이번엔 대체 무슨 망발이냐는 표정을 짓자 라세안이 얼른 말을 얼버무린다.
“포기했다니까! 그러니 자네 가지라고.”
“헐……!”
현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대화는 일단락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숲을 지나는 내내 툭하면 케이트에 관한 말을 꺼낸다.
입었던 옷이 어땠고, 그 속에 감춰진 몸매가 상상 이상일 것이라는 등등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어지간히 탐이 나는 모양이다. 놔두면 몰래 납치라도 할 수 있겠다 싶다.
그렇기에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 라세안!”
“왜 그러나 친구!”
“케이트를 그만 넘봤으면 좋겠어. 내가 점찍었거든.”
“자네가 점을 찍어? 그게 무슨 뜻인가?”
“지금은 바빠서 그냥 가는 거지만 나중에 내가 가질 생각이라는 뜻이야. 그러니 이제 케이트 이야긴 그만하게.”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이다.
현수는 꿈 많은 소녀 하나가 드래곤에게 납치되어 신세 망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걸 어찌 라세안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 그런 거였어? 알았네. 자네가 가진다면 내가 양보해야지. 우린 친구니까.”
이 말을 끝으로 라세안은 케이트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끔 입맛을 다시는 걸 보면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다. 사실 그럴 정도로 예쁘고 육감적이긴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수는 숲을 헤치며 전진했다. 그러다 멀리 양국 국경 수비대가 대치하는 모습이 보이는 곳에 당도했다.
“흐음, 드디어 국경에 당도했군. 나는 C급 용병이라 괜찮지만 자넨 B급 용병이라 출국이 자유롭지 못할 텐데 어쩌지?”
“그냥 자네 혼자 넘어가게.”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소리지?”
“아니! 나는 내가 알아서 월경하겠다는 뜻이네.”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먼저 가지.”
현수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국경수비대들의 엄중한 경계망 쪽으로 다가갔다.
힐끔 바라보니 라세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이에 현수는 얼른 의복을 갈아입었다. C급 용병 하인스는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로 소문이 난 상태일 것이다.
당연히 국경을 넘기 힘들 것이다. 미판테 왕국 입장에서 보면 적국의 편을 들어줄 너무도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현수가 갈아입은 의복은 누가 봐도 귀족티가 나는 고급 옷이다. 천천히 걸어 경비병 근처에 당도하니 정중히 묻는다.
“누구십니까?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수고가 많다.”
“……! 누군지 신분을 밝혀달라고 했습니다.”
경비병은 예사롭지 않은 현수의 의복을 보고 존대한다.
“나는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이다.”
“네……? 어디의 백작님이시라고요?”
생전 처음 듣는 나라 이름이기에 저도 모르게 반문한 모양이다. 그리곤 아차 실수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귀족에게 잘못 보이면 작살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흐음, 코리아 제국이라고 했다.”
“네에? 그런 제국도 있습니까?”
말을 해놓곤 또 실수했다는 표정이다.
“있다. 그러니 비켜서라.”
“자,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 후 백 자 남으로 규정된 귀족 서열 가운데 백작은 중앙에 있으면서도 고위 귀족으로 분류된다.
이는 국경 수비 임무를 맡는 변경백 때문이다.
변경백10)은 주로 백작이 맡는다. 그리고 같은 백작이라 할지라도 중앙의 백작보다 높이 친다.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위 귀족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경비병은 지금 하인스라는 코리아 제국의 백작에 관한 일을 처결할 수 없다. 그만한 직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황급히 상부의 지시를 받으러 자리를 비웠다.
물론 그 이외에도 20여 병사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이기에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괜한 시비를 만들기 싫어서이다. 하지만 귀족으로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짜증은 표정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경비병이 긴급보고를 하러간 지 십 분 만에 당도한 풍채 좋은 사내는 오십대 중반으로 보인다. 실제는 어떨지 모르지만 욕심 사납게 생긴 메기를 닮은 인물이기도 하다.
“허엄, 본관은 베르세 반 스트마르크 백작이라 하오. 코리아 제국의 백작이라는 보고를 받았는데 맞소이까?”
“그렇습니다.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한데 수행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베르세 백작은 현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제법 먼 곳을 여행하다 보니 모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렇다고 어찌 수행원 하나 없이 여행을 한단 말씀입니까? 고위 귀족인 백작께서…….”
베르세 백작은 왕국의 백작이고, 현수는 제국의 백작이다. 그렇기에 나이도 많지만 쉽게 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처음엔 불편했으나 이젠 혼자 다니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길을 막는지요? 타국의 귀족이라 할지라도 어느 국가든 왕래는 자유롭다 들었는데.”
“그야 그렇습죠. 하지만 출국 이유를 기록으로 남겨야 해서……. 아드리안 공국으로 가려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흐음, 좋습니다. 공국 남쪽에 있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본국으로 귀국하기 위함입니다.”
“아! 그렇다면 엘라이 왕국 남쪽에 위치한 드래곤랜드로 가시는 겁니까? 풍문에 듣자니 거긴 카린이라는 웅대한 산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괜스레 아는 척하는 표정이다. 내심 웃겼지만 표정 구기지 않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남쪽에 위치한 어스 대륙으로 갈 겁니다.”
“네에? 어스 대륙이라고요? 그런 땅덩이도 있답니까?”
“있습니다. 그러니 가려 하지요.”
현수의 단호한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진실인 듯싶었던 모양이다. 베르세 백작은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기록을 남기지요. 그런데 우리 미판테 왕국에서의 시간은 즐거우셨습니까?”
“뭐, 나쁘진 않았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좋았군요. 참으로 인상적인 방문이었습니다.”
현수는 인연을 맺은 카이로시아와 로잘린을 떠올리고는 싱긋 웃었다. 이게 상대에게 호감을 준 모양이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앞으로도 편한 여행을 하십시오. 참, 수행원이 없어 불편하시다면 이곳에서 노예 몇을 사는 건 어떻겠습니까?”
“노예요?”
“네, 제법 큰 노예시장이 상설되어 있습죠. 수수료도 싸고 하니 한번 둘러보길 권합니다.”
“아! 네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혼자 다녀버릇 하니 이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뭐, 그러시다면……! 아무튼 즐거운 여행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경비병! 하인스 백작님이 국경을 넘어가신다. 길을 열어드려라.”
“네, 백작님!”
경비병은 명이 떨어지는 즉시 바리케이드를 치운다. 그 주위엔 기사 다섯이 삼엄한 표정으로 지키고 서 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려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서 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나오지 못한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통행을 금지한 듯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국경을 통과하자 이번엔 아드리안 공국 경비병이 앞을 가로막는다.
“잠시 멈춰주십시오. 그리고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백작이다. 아드리안 공국에 입국하려 한다. 책임자는 누군가?”
처척―!
신분을 밝히자 즉각 차렷 자세를 취한다. 귀족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백작님이셨군요. 죄송합니다만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국경 경비대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흐음, 알겠네.”
잠시 후 40대 장한이 큰 창을 든 채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아드리안 공국 중서부 국경대장 알버트 폰 드세린 자작입니다.”
“반갑소. 코리아 제국의 하인스 멀린 백작이오.”
똥개도 제집에서는 큰소리치는 법이다. 한 등급 낮은 작위이지만 나이도 있는 듯하여 반쯤 말을 높여주었다.
“반갑습니다. 백작님! 본국 입국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여행이오.”
다소 오만한 표정이다. 이는 백작에 걸맞은 태도였다.
“네……? 아, 여행이요.”
자작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실리프 마탑의 마법사가 출현했다는 소문 이후로 모든 전투가 멈춰 있다. 그렇다 하여 휴전이나 종전인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칼부림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때라면 여행을 목적으로 전쟁 중인 나라에 입국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아드리안 공국의 인심이 좋고, 풍광도 좋다 하여 방문했소만 입국 못할 이유라도 있소?”
“아, 아닙니다. 본국에 입국하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본국은 현재 삼국 연합과 전쟁 중에 있습니다. 백작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걸 내주십시오.”
“흐음, 그러라면 여기 있소.”
현수는 태연스레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게 뭡니까?”
아르센 대륙의 귀족 대부분은 반지 형태의 인장을 신분증명용으로 들고 다닌다. 처음 제작할 때 귀족 본인의 혈액을 이용하므로 누구도 위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