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그래서 마법인장을 요구했는데 얄팍한 무엇인가를 내놓기에 의아하다는 표정이다.
“그게 본국의 신분증명서요. 좌측에 있는 것이 내 초상화요. 확인해 보시오.”
“헐……! 세상에 어떻게 이렇듯 정교하게…….”
현수의 말에 따라 주민증에 시선을 주었던 알버트 자작이 입을 딱 벌린다. 물론 그림이 너무도 정교했던 때문이다.
“그림 아래 찍혀 있는 붉은 것은 본국 황제 폐하의 직인이오. 그리고 그 문자들은 내가 백작이라는 내용이고.”
“아! 그렇습니까?”
“이곳과는 문자 자체가 달라 읽지 못하겠지만 내가 셰울이라는 영지의 영주라는 내용도 담겨 있소.”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고 반듯반듯한 것을 보니 평민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지 알버트 자작은 고개를 끄덕인다.
“뒤쪽을 보면 본인의 지문이 찍혀 있소. 앞의 그림뿐만 아니라 손가락 끝의 문양까지 확인할 수 있소.”
“아! 그렇군요.”
“우리 제국에선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다는 것을 이용하여 신분증을 만든 것이오.”
자신의 손가락 끝을 유심히 살피던 알버트 자작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인된 것 같습니다. 백작님!”
“그럼 이제 입국해도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드리안 공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알버트 자작은 주민등록증을 내주며 옆으로 비켜선다. 지나쳐 가라는 뜻이다.
현수는 주민증을 챙겨 넣고는 천천히 걸어 입국심사대를 지나쳤다. 이때 알버트 자작이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저어, 백작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방금 제가 본 그 신분증의 재질이 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처음 보는 거라…….”
어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가!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의 비늘이라오. 우리 제국에선 백작 이상 고위 귀족과 그 가족에겐 드래곤의 비늘을 손봐서 신분증을 만들어주오.”
“네에……? 드, 드래곤의 비늘이라고요?”
알버트 자작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장난기 많은 현수가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맞소! 드래곤의 비늘을 만진 사람은 재수가 좋다고 하니 오늘은 도박을 해봐도 될 것이오.”
“아……! 정말입니까?”
알버트 자작이 눈을 번쩍 뜬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진의 파악을 위해 눈빛을 빛낸다.
“해보면 알 것이오.”
“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알버트 자작이 환히 웃는다. 현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경비를 하던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차렷 자세를 취한다.
모르긴 몰라도 전쟁 발발 이후 이렇게 들어온 귀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보게, 병사!”
“네, 말씀하십시오.”
잔뜩 군기가 든 걸 보니 아직 신병인 모양이다.
“멀린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멀린 말입니까? 멀린은 저쪽입니다. 하지만 혼자선 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지?”
“저쪽에 보이는 저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데 워낙 몬스터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상단을 따라 가시거나, 용병을 고용하셔야 할 겁니다. 참고로 용병지부는 저쪽에 있습니다.”
“흐음, 고맙네.”
현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용병지부 쪽으로 이동했다. 길이 그것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라세안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입국심사대에서 용병지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천천히 걷던 중 눈에 익은 표시가 보인다.
“어라! 저건…….”
현수가 본 것은 아내가 될 카이로시아의 이레나 상단 마크였다. 반가운 마음에 상단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딸랑―!
누구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소리가 나는 종이 달려 있었는지 경쾌한 소리를 낸다.
“아!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선 인물은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서글서글해 인상의 사내이다.
“흐음, 나는 하인스라 하는데 혹시 미판테 지부에서 온 전갈이 있는지 알고 싶네.”
“네? 하인스님이시라고요? 그럼, 혹시 하인스 멀린 백작님 본인이십니까?”
“그래, 그렇네.”
“아! 백작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뵙습니다. 잠시 접견실로 드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당도한 전언문이 있습니다.”
“그래? 그러지.”
서기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이레나 상단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곳은 널찍한 접견실이다.
밖은 평범한데 안은 화려하고 아기자기하다.
테세린의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인 걸 보면 이레나 상단만의 스타일인 모양이다.
현수가 푹신한 소파에 앉자 정중히 고개 숙이며 입을 연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흐음, 그러지.”
사내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 하나가 잔에 주스 비슷한 걸 내온다.
걷느라 입맛이 썼기에 단숨에 비웠지만 양이 차질 않는다.
“뜨거운 물은 가져다주겠느냐? 아, 마실 거다.”
커피를 마셔볼 생각을 한 것이다.
“네, 백작님!”
공손히 허리 숙여 예를 갖춘 소녀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운물을 가져왔다.
그런데 뜨겁지 않아 마법으로 이를 데웠다.
“히팅!”
물이 부글부글 끓자 미리 준비해 놓은 커피잔에 그것을 부었다. 곧이어 향긋하면서도 그윽한 아라비카 향이 번진다.
“흐음!”
향을 맡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언제든 명이 떨어지면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시립해 있던 소녀의 코가 살짝 움직인다.
“한 잔 줄까?”
“네? 아, 아닙니다. 소녀가 어찌……. 괜찮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다. 하긴 백작과 상단에서 심부름하는 소녀가 어찌 동석하여 차를 마시겠는가!
덜컹―!
문이 열리며 처음 현수를 맞이했던 사내가 들어선다. 그 역시 향을 맡았는지 잠시 멈칫한다.
그리곤 현수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본다. 사내의 시선은 곁에 있던 소녀에게로 향했다. 높은 가격에 팔아야 할 상품을 소녀가 꺼내온 것으로 여긴 것이다.
어찌 이 뜻을 모르겠는가!
소녀는 자신과 관련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하지만 사내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현수 앞에 놓인 한국도자기에서 만든 찻잔은 요즘 아드리안 공국 귀족들이 앞다퉈 구하려는 귀물 중의 귀물이다.
두 개의 잔과 잔 받침으로 이루어진 커피잔 세트는 12골드에 판매되는 중이다. 한국 돈으로 대략 1,200만 원에 해당한다.
한국에선 3∼4만원에 팔리는 것이다.
금이나 은으로 장식된 것은 30골드까지 받는다. 한국에선 8∼10만 원에 팔리는 것이다.
아무튼 이레나 상단 아드리안 공국 지부에서 요즘 가장 귀한 물건이 바로 커피잔이다. 그런데 그걸 무단으로 꺼내서 썼으니 표정이 굳은 것이다.
하지만 현수를 앞에 두고 시녀를 야단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 사내는 가져온 서류를 공손히 내려놓았다.
“저어, 백작님! 이게 미판테 지부로부터 백작님께 온 전언 통신문입니다.”
“흐음, 그런가? 일단 앉게. 궁금한 게 좀 있네.”
“아이고, 제가 어찌 백작님과 함께…….”
사내의 말은 중간에 끊겼다.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흐음, 자네도 차 한 잔 하겠나?”
현수는 말을 하며 아공간에서 다른 커피잔 세트를 꺼냈다. 화사한 꽃 그림이 그려진 아주 예쁜 잔이다.
그제야 사내는 커피가 담긴 잔이 자신들이 취급하는 상품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미판테 지부에서 판매하라며 보내준 것이 누구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도 눈치챘다.
“이건……! 상당히 고급 찻잔이군요.”
“그래? 괜찮지?”
“아이고, 물론입니다.”
“자, 일단 차나 한 잔 마시게. 히팅!”
현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녀가 떠다 준 물이 다시 끓는다. 커피를 넣고 물을 따르자 향이 또 번진다.
“자네 입엔 맛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셔보게.”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래.”
사내가 향을 맡고 한 모금 들이켤 때까지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현수의 뒤쪽에 있던 소녀는 침을 꿀꺽 삼킨다.
자기도 맛을 보고 싶지만 감히 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수는 피식 실소를 짓고는 다시 물을 데워 커피를 만들었다.
“자! 너도 마셔보거라.”
“네? 아, 아닙니다. 소녀가 어찌…….”
“괜찮다! 그러니 어서 받아라.”
현수가 찻잔을 들고 있으니 받지 않을 수도 없는지라 사내의 눈치를 살핀다. 이에 사내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소녀가 얼른 잔을 받자 그제야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았다.
“자네 이름은?”
“아!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윌리엄입니다. 이곳 아드리안 공국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 그런가? 그럼 카이로시아와는 동급이군.”
“아닙니다. 제가 어찌 카이로시아 영애님과 동급이 되겠습니까? 저는 평민입니다.”
그러고 보니 카이로시아는 백작의 딸이다. 하여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상단은 좀 어떤가? 미판테 지부에 뭔 일이 있는 건 아니지?”
“그럼요! 미판테 지부는 새로 독점 취급하는 찻잔과 티스푼, 그리고 포크와 머리핀 등으로 저희 이레나 상단 최고의 이문을 남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그거 다행이군. 그밖에 다른 일은 없나? 유카리안 영지와의 분쟁은 어찌 되었다고 하나?”
“그 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카리안 영지의 영주님께서 마나석 광산의 채굴권을 이미 다른 상단에 넘겼는지라…….”
“그럼 먼저 받아간 15,000골드는 반환했다고 하나?”
“아닙니다. 아직 반환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그래?”
이 말을 끝으로 현수는 묻지 않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카이로시아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서둘러 차를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백작님! 전언 통신문을 확인하시는 동안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바쁜 일 있으면 나가도 좋아.”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고위 귀족과 마주앉아 있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윌리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중들던 소녀도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나간다.
“헐, 이런 걸 종이라고…….”
전언 통신문이란 마법 통신구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다. 이건 얇은 짐승 가죽에 기재된다.
그리고 한번 사용된 것은 물에 빨아 다시 쓴다. 그러다 보니 오래 사용한 것은 너덜너덜해진다. 여기저기 구멍 나기도 한다. 지금 현수가 펼친 것이 그러하다.
작은 구멍들이 뻥뻥 뚫린 짐승 가죽엔 잉크 비슷한 것으로 쓰인 문자들이 있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하인스 백작님께!
어디에 계신지 몰라 모든 지부에 이 전언문을 보냅니다.
미판테 지부는 요즘 폭풍 같은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 백작님의 덕분이기에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인스 상단의 물건은 결국 다 팔렸습니다. 하여 저희가 취급하던 곡물을 취급하도록 하였답니다.
백작님,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뵙고 싶은 마음뿐이랍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잠시 들러 저의 이 외로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당신의 카이로시아가 사랑을 담아 보냅니다.
“흐음!”
내용은 별게 없다. 하긴 마법사들을 통해 기재될 것이니 속 깊은 이야길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수는 뇌리를 스치는 카이로시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꺼운 마음으로 되새겼다.